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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 역사에서 '포스트'의 의미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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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 역사에서 '포스트'의 의미를 읽다

[이광수의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 <6>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포스트(post)'에 대한 번역에 대해 생각해본다. 역사학은 당위가 아닌 사실을 시간의 틀 안에서 다루는 종합 학문이다. 따라서 탈(脫)과 이후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포스트를 역사학에서는 '후(後)'로 번역해야 한다. 그러니 post-colonial의 경우는 '식민 후(後)'가 되고, post-modern의 경우는 근대 후(後)'가 된다. 그런데 그 어휘가 너무 생경하다고 해서 다른 말로 사용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포스트'를 '후기'로 번역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후기'는 특정 시대의 성격이 끝나지 않고 엄연히 계속되는데 앞부분과 많이 달라졌다는 의미를 지닐 때 쓰는 어휘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의미를 갖는 post-War를 '전후'하고 사용하는 것에 이미 익숙해 있다. 그러니 생경한 것에 너무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쓰다 보면 생경함은 익숙함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잇다.

'포스트'는 한 시대의 특징이 마감되고 난 후의 시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용어의 사용은 그 자체로서 상당한 역사의식을 표출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의 경우를 한 번 보자. 지금, '3김 시대'는 끝났는가? 끝났다고 생각하면 지금은 '포스트 3김' 즉 '3김후' 시대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후기 3김' 시대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3김 시대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3김이 현역 정치인으로서 활동하고 있을 때를 3김 시대라고 한다면 지금은 3김후 시대가 되겠지만, 지역주의, 보스 중심의 계파주의를 주로 하는 정치 문화가 널리 영향력을 끼친 시기를 3김 시대라 한다면 지금도 그것은 여전하다. 박근혜, 이명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문화는 3김적이지 않은가?

한 가지 더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한국 현대 대중 음악의 시대 구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서태지를 기준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서태지 후(後) 시대인가? 후기 서태지 시대인가? 그렇다면 이 시대 대중 음악의 아이콘인 효리는 어떤 면에서 서태지적이고, 어떤 면에서 서태지적이지 않는가? 이러한 생각을 자꾸 해보면 역사에서 특정 현상에 대해 의미 부여를 하는 일에 익숙해진다. 그렇게 되면 내 개인은 역사에서 좀 더 주체적이고 실존적인 존재로 살 수 있다.

인도사에서 '포스트'에 관한 역사적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곳 가운데 하나가 기원전 6세기이다. 기원전 8세기 경 인도의 북부에 철제 농기구가 도입되면서 농경이 점차 발달하였는데 기원전 6세기 무렵에는 잉여 생산이 매우 많아지고 그 위에서 상업과 교역이 크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도시가 북부 인도에서 크게 생겨났고, 정기적 생산이 중요하게 되면서 그 생산의 근원인 땅에 대한 중요성이 증가하고 이에 땅을 기반으로 하는 영역 국가가 북부에 열여섯 개나 만들어졌다. 생산량의 증가는 계급 (즉 카스트)의 발생으로 이어지고 이에 이전의 부족을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진 법체계가 네 개의 카스트를 기준으로 하는 사회법 체계로 대체되었다. 그 안에서 제사를 담당하는 브라만에게는 모든 특권을 주고 노동을 하는 슈드라는 모든 사회 종교적 권리를 박탈하였다. 이제 베다 시대에 모든 구성원이 평등하게 참여한 부족 회의는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를 브라만 회의가 차지하였다.

베다 시대 말기부터 사회가 카스트로 첨예하게 구분되자 그 체제 안에서 안정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고 이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이는 종교의 변화로 이어졌다. 이전의 베다 종교에서는 그 사회의 모습에 따라 수많은 평등한 신들이 가변적인 물질계에서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모습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이 시대에 들어오면서 그러한 모습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불변의 법과 진리가 차지하였다. 그리고 그 불변의 영원한 존재인 브라흐만이라는 최고 가치의 보편자를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가 카스트 브라만이 되면서 사회를 지배하는 권리를 영원히 보유하게 되었다.

베다 시대가 끝났을 때 실로 모든 체계는 위계로 표현되어 있었다. 인간 세상은 물론이고, 신들이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였다. 베다 시대에 가장 인기 좋은 불의 신 아그니나 폭풍우의 신 인드라는 불변의 진리에 종속된 한낱 하찮은 신으로 전락했고 브라흐만의 인격적 실체로서의 브라흐마가 최고의 신으로 자리 잡았다. 또 여러 가지 직능을 담당하는 신들은 그 직능의 유사성에 따라 카스트와 연계되면서 그 서열이 정해졌다. 아그니가 브라만의 신으로 자리 잡은 것은 브라만의 주업이 제사이고 불의 신 아그니는 불이 제사에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에서였다. 같은 이유로 술의 신 소마와, 성스러운 언어의 신 바쯔는 각기 브라만의 신이 되었고, 인드라는 무장으로서, 바루나는 질서를 잡는 위정자로서 끄샤뜨리야 신이 되었다. 여럿이 모여 다니면서 생업을 담당하는 루드라, 아디띠야, 바수, 마루뜨 등은 바이샤의 신이 되었다. 소의 신 뿌샨이 슈드라의 신으로 자리 잡은 것은 소를 키우는 일 즉 유목이 농경 사회에서 더 이상 전대와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서 생기는 현상이었다.

계급과 위계로 첨예하게 구분된 사회는 긴장을 초래하였고 이는 브라만 독점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종교 변화로 이어졌다. 그것은 카스트로 첨예하게 구분된 사회 구조에 대한 반발로서 재가 중심의 물질적 삶의 추구에 대한 세상 포기 운동의 성장이었다. 그들은 제사 중심의 물질 세계를 부정하고 그 맥락에서 불살생·불쾌락·무소유 등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궁극적으로 영혼의 해탈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는 브라만 계급의 독점적 위치에 반발하고 브라만을 중심축으로 하는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였다. 그래서 베다후 시대가 되면 한편에서는 카스트 구조 안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세상 긍정의 삶을 사는 반면 또 다른 편에서는 세상을 버리고 밖으로 나가 카스트와 제사로부터 자유로운 세상 부정의 삶을 살았다.

이러한 세상 포기 현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불교 발생이다. 불교는 종교적으로 니르바나 즉 열반을 최고 목표로 추구하는 것이었다. 니르바나란 해탈 즉 윤회로부터 풀어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윤회란 이 세상에서의 행위가 인(因)이 되어 그것이 과(果)로써 응보(應報)를 받아 다음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끝없는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즉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윤회 행위의 뿌리가 되는 인을 없애야 한다. 이 인을 부처는 이 세상에서의 사회 행위로 인식했다. 따라서 최고 경지인 니르바나를 추구한다는 말은 이 사회를 부정하고 그로부터 철수해야 함을 기본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로서는 사회에 머물러 있고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었으니 그를 따른다는 불교도는 무조건적으로 세상을 버리고 떠난 출가자일 수밖에 없다.

불교의 출가 수행자들은 철저히 혼자였고 주로 깊은 숲 속이나 동굴 혹은 시체 유기장이나 화장터 혹은 큰 나무 밑에서 사회와는 완전히 격리된 생활을 하였다. 이들에게는 어떠한 종류의 경제 행위도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산을 위한 최소한의 노동도 허용되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바리때와 최소량의 옷 정도를 제외한 어떤 형태의 재산도 그 소유가 금지되었다. 그들은 주로 하루하루 보시에 의존하여 살아가야 했다.
▲ 세상을 버리고 무엇인가를 깨닫기 위해 바깥으로 나간 사람. 기원전 6세기 부처는 이런 비슷한 모습을 하였을 것이다. 그는 경제와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하였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대중 운동으로 이끌어냈다

이러한 급진적인 탈사회적 종교가 발생하게 된 것은 기원전 6세기 동북부 지역이 베다후 시대로 접어들면서 발생한 물질 체계 속에서였다. 베다 시대 말기부터 도입된 철기의 사용은 기원전 7세기경에 인도 북부의 갠지스 중상류 유역에서 널리 사용되면서 새로운 농업 경제를 일으켰다. 당시의 새로운 농업-도시 경제는 소의 사용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였다.

하지만 베다 시대의 소 살생 제사는 흔들리지 않는 전통으로 극심한 사회 변화가 일어난 이 시대까지 지속되었고 결국 그것은 새로운 농업-도시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래서 새로운 농업 경제를 일으키거나 그것을 후원하는 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제사에서의 소의 살생 금지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필요한 조치였다. 이러한 조치를 필요로 하였던 세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바이샤와 농업과 상업으로부터 나오는 세금과 토지로부터 나오는 여러 물질적 이익 위에서 세력을 형성하는 끄샤뜨리야 세력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을 후원해줄 새로운 종교를 찾았고 여기에 불교와 자이나교가 적극 호응하였다.

더불어 새로운 물질 문화는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 시켰고 많은 사람들에게 빈곤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리하여 많은 인민들이 이전 시대의 보다 단순하고 재화로부터 떨어져 있는 그런 금욕적 상태로 되돌아가기를 원하였다. 산업혁명 이후 세상이 물질 중심의 세계로 급격히 변화한 유럽에서 청빈한 삶을 강조하는 청교도 운동이 크게 일어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부처가 불살생과 무소유를 크게 강조하고 탈 사회를 요구하였던 것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였다.

불교는 브라만을 정점으로 하고 불평등과 차별을 근간으로 하는 카스트 체계를 반대하고, 브라만에게 바치는 제사를 업으로 삼아 선업을 많이 축적하여야 다음 세계에 좋은 곳으로 가는 윤회의 체계를 부인하고 그 윤회의 거대한 고리를 풀어 탈출하는 해탈을 주창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브라만 세력이 극대화 된 베다후 시대의 역사적 맥락에서였다. 불교가 세상을 버리고 바깥으로 나갈 것을 요구한 것은 바로 이러한 구태의연한 전통과 체계가 새로운 사회에 맞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이자 항거였다. 이것이 곧 역사에서 다음 사회로의 변화 즉 '포스트'의 의미다.

베다후 시대에서 평등이 쇠락하고 불평등이 고착된 것은 무엇보다도 생산량의 증가 때문이었다. 역사상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그 증가한 양의 혜택이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간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생산이 증가하면서 불평등을 해소하고 모두가 다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론 속에서만 가능하다. 마르크스 같이 인간을 선한 존재로 생각하는 이상주의자의 머릿속에서는 가능할 수 있겠지만, 실제 인간의 역사에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기원전 6세기. 인도 역사에서 처음으로 부의 성장과 그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이 폭발하였다. 부처는 그 시대가 낳은 아들이었다. 부처는 재물이란 골고루 분배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가난이 모든 죄의 뿌리라고 하였고, 가난해지지 않기 위해 재산을 부자에게 빼앗기지 말고, 현명하게 부를 쌓으라고 했다. 물론 재물이라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바의 최종이 아님은 두말 할 필요도 없지만. 부처가 불살생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으니 그가 의미한 불살생이란 육식을 하지 않고 채식을 하라는 의미가 아닌 농사 짓은 소를 죽이지 말라는 말이었다. 가난한 인민들이 소를 브라만 제사에 바쳐버리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브라만 주도의 착취 구조에 빠져 들 수밖에 없음을 설파한 것이다. 부처가 지금 한국 사회에 산다면 그는 영락없이 부자에 대한 증오가 있는 사람으로 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조중동에 의해서.

기원 전 6세기 인도에서 발생한 생산량의 증가가 사회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현상은 그로부터 2500 년이 지난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똑같이 발생하고 있다. 부에 대한 끝없는 탐욕으로 인한 사회 불평등과 양극화의 모습 그리고 그로 인해 계급이 첨예하게 나뉘는 현상이 너무나도 닮아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경제 불평등과 양극화의 문제는 경제 고유의 문제가 아닌 정치 논리의 희생양 꼴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면서 저소득층의 소득은 정체되고 소득 분배가 악화되었다. 사실 거시경제적으로 4~5% 성장률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지만 정치적 냄새가 다소 짙은 체감 경기 악화라는 경제 위기론이 저소득층 중심으로 민심을 악화시켜 버렸다. 그래서 노무현 정권 내내 경제적 근거나 논리 혹은 사회적 정당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고, 서울 강남으로 대변되는 반분배주의자들의 논리에 저소득층과 중산층이 감정적으로 동조를 하는 우스운 꼴이 나버렸다. 여기에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이기주의가 부동산 문제와 결합하였고, 저소득층과 중산층이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세금 폭탄'이니 하는 따위의 정치적 술어에 포섭되고 말았다.
▲ '세금폭탄', 현대 한국 사회에서 부자가 만들어 내고 서민이 그 안에 포섭되어 버린 대표적인 정치적 술어.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왔다. 기원전 6세기 고대 인도에서는 유목 시대가 끝나고, 농경 시대가 왔고, 서기 2000년대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시대가 왔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카스트의 첨예한 대립 구조가 형성되었고, 한국에서는 비정규직 88만원 세대의 구조가 형성되었다. 비슷한 상황이지만 부처가 제사를 반대하면서 사회 바깥으로 나가 버린 가히 혁명이라 할 수 있는 그런 거사가 한국 땅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부처의 혁명적 실천을 믿고 따르면서 고대 인도 사회의 구조를 뿌리 채 흔든 인민들의 거대한 움직임도 이 땅에서는 전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챙기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현란한 정치적 술어를 믿고 따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허다할 뿐이다. 경제의 문제를 넘어 사회 구조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역사적 시각이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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