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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 역사의 시원이 갖는 역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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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 역사의 시원이 갖는 역사성

[이광수의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 <5>

고대사 해석의 문제는 근대성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다. 그 둘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님에도 역사학계에서는 그 둘이 마치 별개의 것인 양 간주한다. 그래서 한국 대학의 사학과 대부분에서는 고대사와 근현대사를 하나로 강의하는 교과목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렇지만 그 둘 사이에 생각보다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인도사에서 역사의 시원성을 그 정체성으로 가지고 있는 베다에 관한 근대의 해석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로 하자.

현대 인도가 안고 있는 여러 비극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 가운데 하나는 종교 공동체주의로 인한 -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공동체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신념으로 이것이 투표를 비롯한 많은 정치 행위의 판단 기준이 되고 있다.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단이 이 종교 공동체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 사회의 지역주의와 유사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 충돌과 그로 인한 분단, 학살, 테러의 악순환의 문제다. 그런데 이 비극의 역사가 인도 고대사의 시원이라 하는 베다 시대와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베다(Veda)란 기원전 1500 년경부터 서아시아로부터 이주해 들어 온 아리야인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을 지나 인도아대륙 땅으로 들어와 북부를 중심으로 점차 동쪽으로 이동해 나가면서 제사장 브라만이 바라보는 신과 우주의 질서를 찬양한 찬송집이자 기도문집이다. 유목민인 그들의 주산업은 목축이었고, 말과 마차를 이용해 이동 생활을 하면서 청동제 무기로 토착민들을 정복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이주해 오기 전에 이미 그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과 싸우고 동화하면서 인도 민족을 형성하였다. 그 이동은 기원전 600 년경, 갠지스 강 중상류 유역에 정착을 하면서 그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이때까지의 약 1000 년경의 시기를 학계에서는 베다 시대라 하는데, 유목을 가장 주요한 생업으로 삼으면서, 정착하지 않고 이동을 했던 시기다. 그러다보니 가장 중요한 재산은 땅이 아닌 소와 말이고, 그래서 유목을 하면서 동시에 말을 타고 소를 빼앗는 일, 즉 전쟁을 하는 일이 가장 주요한 생업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전쟁에 큰 영향을 끼친 폭풍우, 바람, 비, 불, 물과 같은 자연물을 숭배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였고, 그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 종교 행위의 중심 자리에 서게 되었다.

제사가 종교에서 막중해지고 거기에 공물을 바치고 그것을 제사장이 수확하는 일이 점점 커지면서 제사장인 브라만의 사회 문화적 지위가 날로 비대해지고 결국 독점적 최고 위치에 자리 잡게 된 시기가 바로 이 시기다. 그러다 보니 후대 힌두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는 카스트에 따른 불평등법, 브라만 독점 체계, 제사 즉 의례 중심 사회, 업과 윤회 사상, 이상적 관념론 등이 모두 이 시기 말에 형성되었다.

그러다 보니 베다 시대는 인더스 문명이 발굴되어 그 연도가 현재 알려진 것과 같이 기원전 2500 년경부터 기원전 1500 년경까지의 약 1000 년경이라고 밝혀지기 이전인 1930 년경까지만 해도 실제 인도 역사의 시원이었다. 인더스 문명은 베다 시대보다 약 1000년 정도가 더 오래된 것이지만, 그 문명이 땅에 묻히고 사라져버려 1930년대에야 그 정체가 밝혀졌기 때문에 전체 역사의 흐름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인도 사람들은 베다 시대 이후부터 자신들의 문명의 원천을 항상 베다에 두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베다에 나오는 말씀과 그 세계관의 이행을 업으로 삼는 브라만은 힌두 문명의 원천을 베다에 두었고 그 영향력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오다 보니까 실로 고대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도 문화의 모든 정통성은 베다에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인도에서 어떤 문화나 체계가 베다에 기원을 두거나 연계되면 정통성을 부여받게 되지만, 베다에 기원을 두지 않거나 베다를 부인하면 그것은 이단이나 사회적 불구로 낙인 찍히면서 사회에서 처참한 취급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처참한 취급을 당한 사람들조차 자신들을 그렇게 취급하는 논리의 원전이 되는 그 베다의 위압에 눌려 말 한마디, 시비 하나 걸지 못하고 오로지 베다를 우주 질서를 관장하는 유일한 법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베다의 그러한 절대 권력의 위치는 중세는 물론이고, 가치관과 사회 구조의 변동이 심하게 전개되는 근대 이후 지금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 인도에서 베다는 모든 권력의 시원이다. 처음 편찬될 때는 성스러운 언어인 산스끄리뜨로 구전되어 오다가 1000년 정도가 지난 기원전 2세기 경부터 필사본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필사본은 기원 후 11세기의 것이다

베다라는 어휘는 '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다시 말해 세상을 보는 지혜에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여느 종교의 시원적 말씀이 다 그렇듯 그 지혜를 진리로 삼은 후대 사람들이 그 진리를 부인하거나 따르지 못한 사람들을 배제하면서 부여된 사회적 권력이 막강해졌다. 결국 누구든 그 시원에서 멀어질수록 사회적으로 배제에 배제를 당하고 그러다 보면 사회적으로 더욱 가혹한 폭력을 받을 수 없게 됨을 알게 된다. 특히 그로부터 1차적으로 배제된 사람일수록 그 시원에 의존하고 자신을 그 시원의 정당성을 보유하고 있는 집단과 그 집단이 만들어 놓은 체계와 가치에 순응하고 일체화해야 안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배제와 폭력의 변주곡은 학벌에 의해 연주된다. 2007년 가을 한국 사회를 분노와 대리 배설의 가학의 난장판으로 만든 신정아 씨. 그가 세상을 그렇게나 뒤흔들었던 것은 절대적으로 한국인의 변태적 가학주의에 발 빠르게 편승한 황색 저널리즘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학벌을 매개로 하는 배제와 독식 그리고 폭력의 메커니즘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이 공유한 예일대의 가을 낙엽과 맨하탄의 커피향은 선민 의식을 갖게 하였고 이는 다시 집단주의의 탐욕으로 연계되었다. 그리고 그 학벌 집단주의의 폭력에 힘에 도전할 만한 사람은 웬만해서는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근대 인도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식민주의에 관한 것이다. 인도는 동인도회사를 앞세운 영국 식민주의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약 100년 가까이 걸렸으니,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반식민 민족 운동이 일어났다. 민족 운동이 일어나게 되기에는, 동인도회사의 착취도 했지만 인도 사회 문화에 대한 자괴감 또한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영국 세력은 인도 사회를 근대 사회로 바꾸기 위해 인도의 사회 문화의 많은 부분을 악습으로 보고 타파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는 와중에 일부에서는 그러한 취지에 동조하여 인도의 사회 문화를 과감히 버리고 근대화로 나아가자고 주장을 했고, 그 과정에서 인도 사회 문화의 중심이 되는 카스트와 남성 중심의 전통 질서가 심하게 공격당했다. 이렇게 되자 브라만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 사회의 기득권자들이 심한 위기 의식을 느꼈고 결국 그들은 "베다로 돌아가자"라는 주장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자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극심한 핍박을 당할 때도 꿈쩍하지 않던 민심이 서서히 끓어오르면서 민족 운동이 들불같이 번졌다.

이후 인도의 민족 운동은 전체적으로 베다에 그려진 힌두 고대 사회를 이상향으로 설정하고 전개해 나간 보수 진영이 근대화를 주장한 진영에 비해 훨씬 큰 힘을 확보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인도 민족을 '힌두'와 동일하게 간주하는 것은 결국 무슬림에 대한 배제의 논리였고, 이로 인해 무슬림은 크게 반발하였다. 그 반발은 점차 적대적인 감정으로 치달으면서 결국 인도아대륙이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단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비극은 지금까지도 유효해 종교공동체 끼리의 갈등과 폭력, 학살과 테러의 문제로 비화되고, 그 정도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결국 모든 문제는 베다가 갖는 그 권위의 절대성 때문이었다. 베다의 권위가 이렇게까지 절대적 권위를 갖게 된 것은 결국 유럽 식민주의자들의 역사 해석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도사의 시원이자 근대 유럽사의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인 인종과 민족의 문제로 연결된다. 결국 이 문제는 아리야인의 기원 문제와 관련을 갖게 된다. 아리야인의 기원 문제는 18세기말 윌리암 존스, 막스 뮐러와 같은 초기 동양학자들은 산스끄리뜨, 그리스어, 라틴 그리고 다른 유럽의 여러 언어들 사이에 존재하는 친연성을 발견하면서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 조어인 '아리야어'가 존재하였다고 주장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후 아리야인은 카스피해 부근 중앙아시아 어디쯤에 살고 있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한 것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분명한 어족을 하나의 동일한 형질을 공유하는 같은 인종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인종으로서의 아리야인 개념은 다윈의 진화론과 함께 그 동안 유지해 온 기독교의 성서에 의한 인류 연대기의 권위를 흔들면서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생물학적 인종 우월주의로 발전하였다. 그 인종 우월주의에 의하면 유럽의 인종은 아리야인과 셈족으로 나뉘는데 아리야인이 노아의 후손이며 백인종이고 더 우월한 인종인데 그들의 순수 혈통이 훼손되고 있다는 주장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인도의 브라만은 아리야인 중에 아리야인이고 그들이야말로 선진 문화를 가진 유럽인들과 같은 혈통의 후손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베다는 인도의 오랜 역사 동안 주춧돌 중의 주춧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인류 최고의 보고로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니 그 권위에 대해 아무도 시비를 걸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식민 지배에 신음하던 인도의 민족 운동가들은 자기들이 선진 유럽인과 같은 족속에 속한다고 하는 주장으로부터 자기 정당성을 찾았다.

베다를 가운데 두고 벌어진 인종주의. 그 노력은 특히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권력의 경우에 잘 나타나는데, 최근 들어서는 과학을 동원한 즉 고고학적 발굴을 적극 활용한다. 앞 장에서 이야기 한 바 있는 사라져 버린 사라스와띠 강이 인도 역사의 시원인 베다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규명하려고 한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 정권의 권력 차원의 노력과 1970년대 이후 조선 사람이 인종적으로 한 갈래에서 유래한 단일한 주민 집단이라는 주장과 그 위에서 이루어진 권력 차원의 단군릉 발굴과 성역화는 결국 역사의 시원과 인종주의가 만나 낳은 일란성 쌍둥이인 셈이다.
▲ 북한 권력은 1993년의 단군 유골의 '발굴'과 단군릉 건립을 통해 남한보다 북한이 역사적으로 - 즉 민족적으로 - 정통성을 지님을 천명하게 되었다.

베다를 통해 표출된 지배자를 닮고 싶은 욕망과 그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대중 다수의 집단주의. 그것을 한국 현대사에서 목격한다. 5공화국이 끝장나고 있을 때, 김대중과 김영삼은 후보 단일화를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김대중은 오랫동안 핍박받은 야당의 대표격인 자신으로 단일화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반면 김영삼은 군부가 김대중을 추인해주지 않기 때문에, 즉 만일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또 다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이 단일화 후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군정 종식을 군부의 추인에서 찾는 그 천박함에 끌려간 상당수 시민의 역사 의식의 부재로 인해 결국 야권 통합은 실패하고 - 역사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다. 양 김씨의 욕심에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시민의 역사 의식에 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 정권은 군사 쿠데타의 주역이자 학살의 손인 노태우에게로 갔다. 쿠데타와 학살의 주역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12.12 쿠데타와 5·18 학살이 정치적으로 국민의 뜻에 따라 이미 면죄부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후보는 군정종식을 외치고 나왔다. 그리고 낙선한 후 쿠데타와 학살의 품으로 들어갔다.

상대 (특히 가해자)에 의해 자기 존재가 결정된다고 의식하는 태도, 나아가 그 존재로부터 내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태도, 그것을 우리는 흔히 노예 근성이라 한다. 그러한 노예 근성은 역사 인식을 제대로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흔히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역사 속에서 한 경험을 버리고 언제나 집단이 규정해 놓은 규칙이나 의미에 자신을 끼워 맞춘다. 그 노예 근성에 함몰되어 있는 사람은 그 집단으로부터 분리되기를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면서 공범의 위치에 들어선다. 주인님의 노예든, 하나님의 노예든, 조폭 보스의 노예든, 국가의 노예든, 민족의 노예든 ... 그것이 좋든 싫든, 자랑스럽든 그렇지 않든, 노예는 노예다.

그 노예 근성이 한국 사회의 중요한 지점에서마다 유령처럼 출몰하였다. 50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루고 난 후 10년에 걸친 나름의 개혁 정권 시절. 상고 출신 대통령이 둘씩이나 나오니 나라가 이 모양 아니냐는 말에 적극 동의하는 그 '상고' 출신의 아줌마,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들. 대통령이 그래도 서울대나 연·고대 정도는 나와야 취업 문제가 풀리지 않겠느냐는 말에 적극 동의하는 그 공부 못한다고 무시당하는 지방대생들. 국회의원이 우리같이 노동자 출신이면 되겠냐면서 그래도 하버드 대학 출신 정도는 돼야지라고 말하는 서울 상계동 사람들 ... 2008년 한국 사회의 슬픈 노예들의 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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