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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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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태규 명리학 <305>

음양관(陰陽觀)과 근대성(近代性)의 충돌

근대 서구를 특징지었고 오늘날에는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근대성이 음양으로 세계를 보는 것과는 날카롭게 충돌한다고 했다.
  
  왜 충돌하는가에 대해 알려면 근대성이란 무엇인지부터 얘기하는 것이 순서이리라.
  
  먼저 얘기할 것은 근대성의 배후에는 계몽(啓蒙)주의 또는 계몽사상이 놓여있다는 점이다.
  
  계몽이란 뭔가 근거 없이 비합리적인 것으로부터 대중을 깨우친다는 것인데, 서구의 계몽은 주로 기독교의 비이성적인,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세계관으로부터 인간을 깨우친다는 것이 주된 것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보게나. 세상 어디에 신이나 하나님이라고 하는 존재가 있는지. 그건 그저 어리석은 믿음일 뿐이지.'
  
  이 같은 생각이나 주장이 계몽사상의 핵심이었다. 간단히 말해 '신은 없다'는 것이었다.
  
  신이 부정되자 신성(神聖)과 근엄성이 부정되었다.
  
  정신보다는 물질이 강조되었고, 세속적인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감각적 경험이 더 우위를 차지했다. 쾌락과 즐거움이 선(善)이고 좋은 것임을 주장하는 공리주의(功利主義)는 선(善)의 근원적 힘이었던 신성(神聖)이 사라진 마당에 인간이 찾아낸 방편이었다.
  
  마치 엄한 부친으로부터 풀려난 젊은이의 모습이니 방탕도 자유, 노력도 자유였다.
  
  독립한 젊은이가 자신의 힘과 의지로 세상을 살아야하듯이 신(神)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의지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약동하고 있었다. 새롭게 등장한 과학기술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더욱 효율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만들었고, 나아가서 인간의 역사는 시간의 경과와 함께 무한한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리하여 이른바 '진보주의'란 것이 생겨났다. 이 또한 젊음의 뜨거운 혈기와 같은 것이었다.
  
  진보주의란 그냥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의 이성과 그것이 만들어낸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상이고 자신감이다.
  
  민주주의와 계약관계에 토대를 둔 새로운 경제, 기술이 가져다준 놀라운 생산력의 발전 등으로 계몽주의의 흐름을 잇는 진보주의가 그만한 자신감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도 그리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니 진보의 역사관은 당연히 무엇인가 다시 되풀이된다는 것, 즉 순환론적 반복을 거부한다. 바로 이 점에서 음양오행으로 바라보는 세계관과 날카로운 충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등장한 긍정적인 것들을 우리는 근대성(modernity)이라 부른다.
  
  반면 절대적 권좌로부터 내려온 기독교는 어쩔 수 없이 나름의 살 길을 찾아야 했으니 그 새로운 활로는 급격한 부의 생성과 사회 발전 과정에서 생겨나기 마련인 하층 서민들에게 위안을 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삶과 공동체의 근원적인 변혁이 가능하다고 믿은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계몽과 진보의 첨단에 서 있던 마르크스가 종교란 인민들에게 위안을 줌으로써 결과적으로 억압을 정당화하는 장치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의 사상적 입장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어쨌거나 지난 20세기 초는 그야말로 미래에 대한 인간의 자신감이 최고도로 부풀어진 상태에서 출발했었다. 모든 것이 장미빛 일색이었다. 적어도 서구인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서구의 상류 계급에 있어서는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시대는 서구인들의 정복 대상이고 계몽의 객체였던 아시아와 아프리카 세계에 있어 거대한 재앙이고 시련의 기간이었다.
  
  잠깐 말머리를 돌려보자.
  
  어떤 의심도 필요치 않을 정도로 명증(明證)한 이성적 판단이란 것이 있다고 하자. 하지만 실은 그 또한 그 문화 특유의 분위기에서 오는 맹점(盲點)을 지니기 마련이다.
  
  낮은 산을 오르던 등산객에게 공기가 별 변수가 될 수 없지만, 히말라야를 가면 공기가 얼마나 중요한 변수인가를 절감하듯이 말이다. 그런 어리석음과 맹점을 문화도 지니는 법이다.
  
  그렇기에 또 다른 분위기와 공기를 마시면서 생겨난 다른 문화권의 사상이나 이성 또는 논리와 만나면 그것을 틀렸다고 부정(否定)부터 하는 것이 인간이 지닌 오랜 오류의 하나이다.
  
  서구가 전 세계로 팽창하면서도 마찬가지의 잘못을 범했다. 그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타 문화의 것들을 이해하고 존중하기는커녕 그저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겼다.
  
  어느 서양인이 한국 사람의 안방으로 늘 하던 습관대로 구두를 신은 채 들어오기에 그 것이 결례(缺禮)라고 얘기하면 이런 집안 구조는 틀렸으니 서양식으로 변경하라는 오만함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서구가 지닌 너무나도 압도적인 힘에 질려버린 나머지 세계는 그것의 결례와 무례함을 지적할 입장도 아니었다.
  
  그 결과 아프리카는 그저 자원쟁탈 내지는 인신매매의 대상이었고, 조금 버티던 동아시아 세계는 분노의 감정을 억누르고 그저 받아들여야 했다. 일종의 유린이고 강탈이었다.
  
  나아가서 우리가 이렇게 망해버린 것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는 신분질서에 집착한 공자(孔子) 탓이고, 음양오행이라는 미신에 빠져 운명론을 믿으면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지 않은 못난 우리 조상들 탓이었다는 생각에 지난 백년간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단호히 선을 그어버렸다.
  
  망한 집 후손들이 조상을 원망하면서 살 길 찾아 새로운 세계로 나가듯이.
  
  그러나 다시 보라. 가장 개명(開明)하고 근대화의 화신이라고 스스로 믿었던 그들은 지난 세기 초반에 두 차례에 걸친 엄청난 전쟁을 통해 인간이 지닌 극도의 야만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또 다시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이 수 십 년에 걸쳐 지루하고도 처절한 싸움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이윽고 회의가 생겨났다.
  
  무지한 믿음이던 기독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또 오늘날의 최강자인 미국은 어디까지나 청교도의 나라이다.
  
  그런가 하면 횡포한 자본을 타파하고 더 진보하고 평등한 사회로 갈 수 있다는 진보의 이상을 내세웠던 공산주의는 권력과 관료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냥 무너지고 말았다.
  
  잘못된 역사와 문화를 청산하겠다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무엇이었으며, 한 때 자상한 역사 선생님이었던 폴 포트의 저 엄청난 광기(狂氣)는 또 무엇이었는가?
  
  19세기 후반을 통해 생겨난 진보에 대한 인간의 극단적인 자신감은 결국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로 만들어놓았을 뿐이다. 그 전체로서 또 하나의 미망(迷妄)이자, 젊은 혈기가 부른 사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현 시점에서 지나간 200년을 되돌아보면 엄청나게 번성한 시기이자 지극히 폭력적인 시기였다. 이에 우리는 이윽고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그 교훈은 극단(極端)을 피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이상이고 사상일지라도 극단적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면 틀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극단을 피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 이는 누구였던가?
  
  중용(中庸)을 말한 공자(孔子)였고, 중도(中道)를 가라고 일깨워준 싯다르타였으며, 상대적 세계관을 전하고 있는 음양관이었다.
  
  그리고 왜 예수님은 오른 뺨을 때린 자에게 왼 뺨을 내어주라고 하셨으며 상대의 잘못을 일곱 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는가?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며, 어떤 명분에서든 사람이 사람을 절대(絶對)의 견지에서 벌할 수 없음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겨울의 기운이 선다는 입동(立冬)이 지났다. 이번 대선은 어느 후보도 생산적이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정치 과잉'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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