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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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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58>

내 사랑, 지니 (I dream of jennie)

내 사랑, 지니 (I dream of jennie)

아주 오래 전 이런 제목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있었다.

미국에서 제작된 것으로서 1960년대 후반에 국내에도 소개되어 인기가 많았었다. 필자는 어린 시절, 이 드라마를 너무나도 좋아했다.

대강의 스토리는 이렇다. 우주비행사가 어느 행성에 착륙했다가 거기서 호리병을 하나 주웠다. 지구로 돌아와서 보니 그 병 속에는 수 천 년 된 요정이 살고 있었다. 마력을 지닌 요정은 여자였고 게다가 대단히 아름다운 아라비아의 미녀였다. 스스로를 '지니'라 소개한 요정은 앞으로 주인님을 잘 모시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비행사와 럭비공 같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분방한 성격의 요정 지니는 사실상의 동거 관계에 들어갔고, 그 때부터 벌어지는 다양한 코미디가 주된 내용이다. 우리 전래동화에 나오는 '우렁각시' 이야기와 같은 설정이다. 지니가 주인을 돕는답시고 부리는 마술들이 매번 트러블을 만들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이 너무도 재미있었다.

나중에 그 추억을 더듬어 추적해보니 원제는 ' I dream of Jennie' 였고 1965-1970년 사이에 방영된 인기 코미디였다.

젊은 사람들은 원하는 이상형에 대한 물음을 잘 주고받는다. 필자 역시 젊은 시절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면 '이상형은 없다'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필자에게도 이상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지니'였던 것이다.

미모의 아내이고 심심하면 병에서 불러내어 함께 놀다가 혼자 있고 싶으면 병 속으로 들어가라고 주문만 외우면 된다. 마력을 지녔으니 생계 걱정은 물론 없다. 해외로 놀러갈 때 그냥 일순간에 공간이동을 하면 되니 그 불편한 비행기를 탈 필요도 없다. 이 이상의 아내가 세상 어디 있으랴. 물론 현실일 수 없지만 그래서 환타지는 더욱 소중한 법이다.

음양오행을 주제로 하는 칼럼인데 갑자기 무슨 환타지 타령이냐고?

수 백 회의 음양오행 칼럼을 쓰다보니 한번쯤 일탈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슬람 문명이 지닌 환상성과 그것이 왜 그런 성격을 지니는지에 대한 음양 오행적 해석을 위해 말의 머리가 좀 길었을 뿐이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대충 그 내용을 옮기면 이렇다.

"세계의 반은 낮으로 나머지 반은 밤으로 이루어져 있다. 낮의 시간은 용사들이 여러 왕국을 정복하고 상인들은 중국 비단을 거래하며 농민은 참깨와 옥수수를 기른다. 이처럼 낮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글로 기록한 것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밤이 되면 사람들은 모두 '진니(jennie)'와 굴, 괴물과 환상, 칼리프와 시인, 마술과 영약에 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인생에서 소중한 것은 모두 밤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점에 대해 어렴풋하게 알게 된다.

하나는 이슬람 문화가 낮보다는 밤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좀 전에 소개된 글 속에 나오는 '진니'가 바로 '내 사랑 지니'의 지니라는 점이다. 아랍의 발음을 영어로 옮긴 철자도 jennie이다. 다만 우리나라에 소개될 당시 진니가 지니로 잘못 바뀐 것이다. 흔한 일이다.

먼저 진니 이야기부터 한다.

진니는 이슬람의 성경인 코란에도 독립된 하나의 장(章)으로 들어있을 만큼 이슬람 세계에서는 보편적인 요정이다. 진니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세상에 존재해왔다고 한다.

진니는 불 속에서 탄생했기에 혈관에는 피가 아니라 불이 흘러 다니며 몸 또한 연기나 불로 만들어졌기에 허공 중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넓고 무연한 사막이지만 진니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구역을 나누고 있다.

결국 진니는 그리스 신화의 님프와 같은 요정이다. 다만 사막밖에 없는 이슬람 세계의 요정이며, 그 본질은 불이 의인화된 것이다. 그래서 진니는 불 속에서 탄생하여 죽으면 불로 돌아간다. 성나면 모든 것을 태워버릴 힘을 보여주지만, 잘 대하면 온화하고 상냥하며 인간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신드바드의 호리병 속에서 등장하는 요정 역시 진니인데, 앞서의 '내 사랑 지니'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진니 중에는 착하고 온순한 자도 많지만 성질이 못된 진니가 있어 특별히 샤이탄이라 한다. 이것이 나중에 기독교 세계의 사탄으로 소개되었다. 이로서 진니나 사탄은 중동 세계에서 오랜 연원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내친 김에 진니 외에 굴(ghoul)도 있는데 이는 달 없는 밤의 칠흑과 같은 어둠을 의인화 한 것이다. 이슬람 사람들은 뜨거운 낮 시간보다는 밤에 활동을 많이 하며 길을 가기도 하는데, 달빛이 있으면 서늘하고 좋은 밤이지만 달이 없으면 너무 어두워서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그리고 두려움도 생긴다.

바로 그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무서운 적대적 정령이 바로 굴인 것이다.

따라서 진니는 밤에 등장하지만 불의 의인화이고, 굴은 암흑 그 자체의 의인화인 것이다. 진니는 불이고 빛이기에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지만 암흑을 틈탄 굴은 적대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 무하마드도 진니는 인정했지만 무조건 공포를 유발하는 굴은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앞서 이슬람 사람들은 역사를 낮의 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더 소중한 것은 밤의 일이라고 여긴다 했다. 이처럼 낮보다 밤을 더 중하게 여기는 정신과 의식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한 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사막은 불모의 공간이다. 그러나 지긋지긋한 해가 지고 달이 뜨면 세상은 살기에 좋고 놀기에 좋은 공간으로 변한다.

중동 지역, 달리 서남아시아라 불리는 이 지역은 건조하고 뜨거운 지대이다. 조열(燥熱)이 주된 기(氣)를 이루고 있는 곳이라 낮에 일어나는 일은 재미도 흥미도 없다. 이슬람 문화에서 낮의 일을 기록한 역사 역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달빛으로 교교한 사막은 실로 낭만적인 무대, 서늘한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사람들은 모여 노래하고 춤추고 시를 읊조리게 된다. 낮 시간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은 진니도 밤에는 친근해지고 인간과 교류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조열한 땅인 이슬람은 그래서 서늘한 달의 음기(陰氣)가 더 반가운 곳이다. 달빛 아래에서 사물은 명징하지 않고 은은히 윤곽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 곳에서는 역사보다 전설과 신화가 더 실감 있게 다가온다.

반면 온화한 지중해의 햇빛 아래 탄생한 그리스 철학과 그 법통을 이은 서구 철학과 문화는 명징성을 기반으로 한다. 모든 것이 사물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그를 논리로써 풀어나가고자 한다.

특히 빛이 적고 비가 많은 북유럽은 바탕이 한습한 곳이다. 환경이 음(陰)하니 명징한 양(陽)을 추구하는 것이다. 뜨겁고 건조한 양(陽)의 환경 아래에서 음기(陰氣)를 갈구하는 이슬람 문화와는 전혀 이질적이다.

음(陰)의 문화인 이슬람은 역사보다는 신화나 전설을, 산문보다는 시가(詩歌)를 더 중시한다. 전쟁을 할 때도 시인이 나서서 상대를 비방하는 시를 먼저 읊조린다. 시는 칼보다 더 날카로운 것이라 믿기에.

오늘날의 인도 역시 전반적으로 뜨겁고 건조한 지대가 많고 비 내리는 몬순 지역은 적다. 당연히 양(陽)보다는 음(陰)을 갈구하게 된다. 그래서 인도 역시 뚜렷한 역사서가 없다.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 주로 2행시로 이루어진 신화집이고 시가(詩歌)집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전 세계 어디든 비행기 타고 금방 갈 수 있다 보니 하나의 세상인 줄 착각한다.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 역시 동일한 문화의식과 가치관을 지닌 줄로 알고 착각하는 것이다.

19세기 이후 서구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서구의 정신과 문화가 인류 보편의 가치인 것으로 여기고 모든 것을 그에 맞춰가고자 하는 무리가 일반화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이슬람 하면 무슨 근본주의나 테러를 밥 먹기보다 좋아하는 사람들, 인도 하면 계급 제도 아래 무지몽매한 사람들로 여기는 이상한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현대의 비극은 이처럼 모든 것이 서구에서 출발한 사상이나 주의(主義), 가치(價値)가 전부인 양 알고 그것간의 우열이 전부인 양 씨름한다는 데 있다.

예수나 아리스토텔레스, 맑스, 아담 스미스, 케인즈, 레닌이 전부가 아니건만 글깨나 읽고 공부 좀 했다는 이들은 그것이 인류 전체의 지혜인 양 얘기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답을 찾지 못하리라.

세상은 그것 말고도 다양한 가치와 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이 점을 이해하지 않고는 인류의 미래 역시 오해와 무지에 바탕을 둔 적대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동아시아를 알려면 사서삼경과 유교 철학, 그리고 그 근저에 깔린 음양오행을 알아야 한다. 인도를 알려면 불경이 아니라, 마하바라타나 라마야나를 읽어야 할 것이다. 이슬람을 알려면 오마르 카얌의 루바이야트나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는 것이 훨씬 중요한 것이다. 사실 아프리카를 알려면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필자는 모르겠다.

아무튼 타 문화에 대한 이해와 공감은 인류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느리지만 가장 빠른 길임을 필자는 믿는다.

최근 불면증이 생겼다. 잠들려고 애쓰느니 차라리 긴 이야기책을 읽자 싶어 오래 전에 서가에 던져놓았던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를 다시 그리고 천천히 읽게 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인도와 이슬람의 근저에 깔린 음기(陰氣)의 문화란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이 글을 올린다.

(전화:02-534-7250, E-mail :1tgkim@hanmail.net)
- 김태규의 명리학 카페 : cafe.daum.net/8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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