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라디오 방송의 시사토론프로에서 청취자의 의견이 소개됐다. 자신이 보수라고 밝힌 한 청취자는 박근혜의 경제민주화 정책을 비롯한 좌클릭을 비판한 뒤에 이번 선거에서 투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불현듯 우리 정치가 뭔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수정당이 보수 정체성을 포기하고 거침없이 좌클릭을 하고 있으니 이념지형상 가장 오른쪽에 빈자리가 생긴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보수 지지자들은 표심의 행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보수논객 조갑제씨가 월간조선 10월호 기고 기사에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대선의 변수 '반박 보수층'의 정체" 제하의 기사에서 새누리당이 산토끼를 잡다가 집토끼를 놓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새누리당이 보수적 정체성을 포기하고 젊은 표를 얻기 위한 좌경적 공약을 남발하다가는 50세 이상을 화나게 하여 이들의 투표율이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 '50세 이상 투표율 저하'는 박근혜 후보에겐 치명적 독이다."
그러면서 반박 보수층의 실체를 분석해서 보여준다. 반박 보수층이 종이호랑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9월9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대선관련 여론조사를 분석해 실체를 찾아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자신이 보수라고 밝힌 유권자들 중에 76.1%가 박근혜 지지, 17.7%가 문재인 지지였다. 그런데 안철수와 대결 시에는 보수 유권자중 66.5%가 박근혜 후보, 25%가 안철수 후보를 지지했다. 박근혜 지지율 9.6%가 줄어들었다. 조갑제는 이것이 보수지지자들이 이탈하고 있는 증거라고 말한다.
보수층을 화나게 만든 박근혜의 연설
보수 유권자가 투표 포기를 생각하거나 안철수 지지로 돌아선 이유가 무엇일까. 새누리당 경선이 끝난 뒤 있었던 박근혜의 후보 수락연설도 보수층을 화나게 만들었다. 이념을 넘어 국민통합으로 가겠다, 경제민주화를 추진하겠다고 했는데 보수층은 생각이 다르다. 보수이념까지 뛰어넘으면 안되며 경제 민주화는 좌파적 개념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이 연설문에선 한국의 보수층이 간절히 원하는 종북척결, 법치확립, 자유통일, 북한인권 등의 단어가 빠졌다고 조갑제가 지적했다.
입장은 다르지만 진보논객 진중권 씨도 최근 발표한 글에서 비슷한 지적을 했다. 새누리당의 보수 정체성 포기가 당내 혼란과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박근혜 캠프는 선거를 위해 보수당으로서 '정체성'을 포기했다. 거리에 나붙은 새누리당의 붉은색 플래카드는 색깔이나 구호가 진보신당의 그것과 똑같다. 얼마나 우스운가?"
표를 얻기 위해 정체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정당정치의 변칙이자 반칙이다. 정치선진국에서라면 이런 이유 한 가지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그러나 중도표를 잡겠다며 민주당도 우클릭을 하고 있으니 피장파장이다. 그런데 민주당의 우클릭보다 새누리당의 좌클릭이 위태롭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선거 전문가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중도표라고 해서 중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중도표는 뿌리가 없으므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부평초처럼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왼쪽으로 방향을 맞춰 흘러가고 있다. 복지 확대, 경제 민주화등 주요 이슈들이 모두 진보의 가치 아닌가.
노회찬 의원은 올해 대선을 87년 대선과 비교해 설명했다. 당시의 대선은 민주화를 가장 잘 수행할 사람을 뽑는 선거였다. 시대적 과제가 민주화였기 때문이다. 올해 선거는 진보시대를 열 사람을 뽑는 선거이다. 누구를 뽑을 것인가. 25년 전에는 민주화 시대를 군인출신 후보에게 맡겨 역사 발전의 스텝이 꼬였다. 올해 대선에서 보수후보가 선출된다면 그때와 마찬가지로 부자연스러운 시대가 열릴 것이다.
노무현은 그의 저서 '진보의 미래'에서 자신은 보수시대의 진보대통령이었다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런데 박근혜가 된다면 진보시대의 보수대통령이 된다. 보수세력이 진보연하며 통치를 해야 한다. 모두에서 소개한 전통적인 보수 지지자들의 소외감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러면 올해 12월 선거에서 보수 유권자들이 흔쾌히 투표장에 가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정통 보수를 표방하는 정당이 나오고 그 당의 대통령 후보가 출마해야 한다.
정통보수정당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지난해 연말 정통보수를 표방하는 정당이 나타는가 했다. "대한국당"이라는 이름의 정당이 종북킬러를 표방하며 창당준비를 했다. 서울시당 창당대회를 마쳤으며 정식 창당을 앞두고 있다는 기사가 당시 인터넷에 떠올랐다. 한 신문은 "조갑제의 보수진영에서의 위상을 볼 때 그가 대한국당의 멘토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었다. 그러나 정식 창당을 했다는 기사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창당이 불발된 이유가 무엇일까. 보수우파 진영의 여러 세력과 지도적 인사들 간에 합의가 되지 않은 것인가. 그래서 당을 세울 만큼의 역량을 갖추지 못했을 수 있다. 사실이라면 보수우파 진영에 리더십을 갖춘 걸출한 지도자 부재가 문제이다. 또 하나 짐작되는 것은 전략적인 이유이다.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꾀하면 결과적으로 좌파진영을 돕는 이적행위가 되지 않겠나 하는 우려다. 사실이라면 그들은 지지자들 앞에 떳떳하지 못하다. 좌파진영은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를 출마시키지 않았나.
극우적인 성향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프랑스의 국민전선 같은 극우민족주의정당이 없다는 것은 언뜻 보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번에 극우정당의 대선 후보가 나오면 단숨에 10%를 넘는 지지율을 얻을 것 같다. 총선에 출마했다면 20석은 거뜬히 얻지 않았을까. 그러면 새누리당이나 박근혜로부터 존중받는 대등한 협상대상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분화는 새누리당에게도 좋은 일이다. 극우적인 색깔을 덜어내고 명실상부한 중도우파 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정당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이 말을 우파진영의 분열을 조장해서 진보진영이 어부지리를 꾀하려는 얕은 수작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이적행위가 될 것 같으면 막판에 박근혜와 단일화하면 된다.
이정희 심상정 등이 최근 좌파 후보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보수우파 후보도 이번 대선에 출마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를 위해서는 조갑제 전원책 등 보수진영의 신망 높은 지도자들이 나서야 한다. 이들은 각종 매체를 통해 중도를 지향했던 이명박 정부를 좌경이라고 비판했다. 새누리당과 박근혜의 좌클릭을 가장 큰 목소리로 공격해왔다. 그들의 보수진영내의 위상에 비춰보면 행동으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지금 같은 때에 말로만 보수운동을 하겠다면 비겁한 "입보수"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누군가 내세울 사람이 없다면 직접 대선후보로 나서라.
극좌 중도좌 중도우 극우로 나뉘는 정치가 가장 이상적
극우보수 정당의 대선후보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필자가 어떻게 보일까 적이 걱정이 된다. 더구나 당사자들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아웃사이더의 주장이 어떤 곡해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을까. 이 기회에 극좌 극우에 대한 필자의 소신을 설명해야겠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그런데 왼쪽 오른쪽 날개의 빛깔이 한결같지가 않다. 우파 안에도 '더 우'와 '덜 우' 같이 빛깔이 다르고 결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있다. 날개의 줄기와 끝부분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날개끝의 극좌도 극우도 역시 인간성의 자연스런 발로이다. 그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로 전화되는 것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부당하게 억압할 때이다. 극좌와 극우도 바로서야 한다. 그것은 인간 존재와 의식의 두가지 원형이다. 유물론과 유심론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의 원점이다.
이념의 시대라고 불렸던 지난 한 세기동안 극좌 극우는 문명사적인 도전과 응전을 거치며 상대쪽과 타협을 하고 상대방의 장점을 취하면서 중도좌와 중도우로 변용해왔다. 현대화의 격랑에 실려 각각 가운데로 수렴돼왔다. 극좌와 극우는 결코 거짓의 가공품이 아니며 본질이 왜곡된 형태인 것도 아니다. 정신과 육체라는 배반적인 요인으로 구성된 인간존재의 생래적 조건의 산물이다. 소수일지라도 그 정당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제도의 틀 안에서 유지 존속시키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에도 맞다.
이념문제에 관심을 가진 이래 필자는 이런 꿈을 키워왔다. 우리 사회가 극좌 중도좌 중도우 극우등 네가지 이념으로 구분되는 정치틀을 갖는 것이다. 이런 교과서적인 틀에서 비로소 인간의 속성이 전방위적으로 반영될 수 있다. 그러나 이념에 의해 분단된 나라에서 국가보안법이 살아있는 조건에서 이런 일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그래서 꿈으로 남았다. 그 꿈의 실현은 요원한 듯이 보인다.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 민주당과 새누리당은 중도좌와 중도우의 위치에 서있지 못하다. 민주당이 좀 더 왼쪽으로 가서 사민주의를 수용하는 수준에 이르러야 큰 틀의 모양이 잡힐 것이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진출하면서 희망이 생겼다. 불완전하지만 왼쪽 날개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니 이제는 오른쪽 날개의 분화가 과제이다. 공룡정당 새누리당의 이념적 자산은 중도우파에서 극우까지 풍부하게 펼쳐져 있다. 이 세력이 분화하면 비로소 네가지 이념 정파의 황금분할이 가능해진다. 그 시기도 오른쪽 끝이 공백으로 남아있는 지금이 적기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국민행동본부 부본부장을 지낸 우파진영의 지도급 인사 한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피력했다. 일방적인 새누리당 지지가 우파시민사회에도 독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는 "새누리당 비판하니 우파분열이라고 하는데, 우파분화가 맞다. 분화는 많이 될수록 좋은 것이고, 그 분화된 힘으로 좌클릭하는 새누리를 깨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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