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는 현대의 3대사상으로 사회주의, 자유주의, 보수주의를 꼽는다. 이글에서 언급한 레프트, 리버럴, 라이트가 여기에 대응한다. 이 사상들에 기반한 정파들은 각기 자신들이 진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삼색진보라 해야 함에도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의 어드밴스 진보를 별항으로 독립시켰다. 네 번째의 진보이며 한국 특산품이다. 새로운 진보가 나타난 과정을 찾아가보자.
서울대교수 하영선은 "중도를 넘어설 때 보이는 새 길"이라는 제목의 신문 칼럼(조선일보 2009년 6월26일)에서 이명박 정부가 좌우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중도를 제시하고 있지만 이것이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평면적인 좌우논쟁을 입체적인 전후논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좌우 아니고 전후가 중요하다
'좌우가 아니라 중도다'에 맞서 '좌우가 아니라 전후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이 담론들은 좌우논란에 지친 사람들의 동의를 쉽게 얻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연장선상에서 '좌우'도 '전후'도 아니고 '상하'가 중요하다는 견해도 있다. 상하는 민주주의 수준을 높이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는 '좌우가 아니라 전후다'는 의견에 집중하려고 한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을 가진 진보의 사전적 의미를 상기해보면 이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여기까지이다. 조금만 더 나가보면 이 말처럼 모호한 개념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에 봉착한다. 그 모호함은 다음과 같은 개념상의 함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이념은 진보였다. 명시적으로 퇴보를 지시하는 이념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이념의 숙명적 생래적 조건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서양의 사회과학사전에는 '진보주의' 항목이 없는 이유이다.
이때의 진보가 비록 콩글리시이고 한국 특산품이지만 우리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점이 중요하다. 국민들의 언어생활을 주제로 여론조사를 해보면 네 가지의 진보 중에서 이 용법이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을 것 같다.
레프트와 리버럴 그리고 라이트는 그 의미가 고정적인데 반해 우리가 사용하는 어드밴스는 가변적이다. 그러면 어드밴스의 방향은 어디인가? 하영선이 앞으로 나아간다 했을 때의 앞은 어디인가?
러시아의 진보는 우파이고 남미의 진보는 좌파라는 진술은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이것은 좌편향사회에서의 진보는 우파이고 우편향 사회에서의 진보는 좌파라는 뜻이다. 어드밴스 진보는 늘 좌우균형을 지향한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자유가 진보이고 남한에서는 여전히 평등이 진보이다. 하영선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라고 했지만 그 앞의 내용을 전방에서 찾으려 하면 보이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 왼쪽이나 오른쪽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나선형적으로 진전한다는 말을 여기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사회에서든 가장 필요한 가치를 찾아 그 자리에 서서 일하는 사람에게 진보라는 칭호가 주어진다. 노무현 시기의 진보는 지역주의의 폐해와 맞서 싸우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지역주의와 맞서 싸운 사람이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면서 그 문제는 상당히 해소됐다. 지금은 지나치게 많은 자유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자유가 특권과 반칙을 만든다. 이 시대의 과제는 신자유주의의 고삐를 잡는 일이다. 경제민주화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어드밴스 진보의 방향은 변화한다.
어드밴스와 리버럴은 노무현과 유시민의 이념
한국사회에서 어드밴스 진보를 가장 잘 구현한 사람은 노무현이다. 그는 한국적 제3의 길을 말하면서 한미FTA와 같은 우파정책도 과감하게 채용했다. 필요에 따라 좌파 우파 정책을 채용했다. 그래서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양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동안 어드밴스는 리버럴의 범위 안에 놓여있거나 개념 규정이 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었다. 또는 사전적 의미의 진보라는 용법에 업혀있었다. 필자가 어드밴스가 이념으로 실재함을 인식하게 된 계기는 유시민과 노무현의 차이를 구별하면서부터라는 점도 고백해야겠다.
두 사람은 협력하여 참여정부를 출범시켰고 그 뒤에도 유시민은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으로 불렸다. 이들은 멀리서 보면 한사람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두 사람이다. 이들은 어떻게 다른가.
참여정부 시기에 청와대 대변인을 역임했던 천호선은 지난해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필자에게 들려주었다. 노무현은 그가 남긴 글이나 말에서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자칭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의 저서나 남긴 글을 보면 늘 진보주의를 말했다. 그는 서거 직전 수개월동안 학자출신 참모들을 봉하로 불러들인 자리에서도 "진보주의 연구"에 매달렸다. 스스로를 리버럴이라고 밝히고 자유주의의 가치를 역설해온 유시민과 분명하게 갈라진다.
이 두 사람의 차이를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 사람은 노무현의 친구로 알려진 강금원 창신섬유 사장이다. 그는 얼마 전 암으로 타계하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국민참여당이 친노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시민은 친노 아니다. 어떻게 해서 유시민이 친노 핵심으로 분류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안)희정이도, (이)광재도 유시민을 친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 대통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유시민이 어떻게 친노가 된 거냐고 물으니까, 노 대통령이 "유시민은 우리 편 아니다"라고 딱 잘라 말하더라. 우리 편은 아니고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어서 인정한다고 했다. 재임 중에도,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유시민은 우리와 그 무엇도 상의한 적이 없고 자기 마음대로 갔다. 대통령도 그런 면을 싫어했다. 남을 위해 정치를 해야지 나를 위한 정치는 곤란하다." (시사인 2011년 2월 23일)
강금원이 이 말을 토로했을 때의 상황 때문이겠지만 이 발언은 유시민을 비판하기 위해 나온 것 같다. 여기서는 악담으로 들리는 말일지라도 단지 유시민과 노무현의 차이를 드러내주는 자료로 사용했음을 부언한다.
두 사람의 차이를 찾고 있던 즈음에 또 다른 사례가 포착됐다. 진보통합 논의가 한창이었던 지난해 여름,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는 기독교방송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와 인터뷰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색깔이 비슷한 민주당이 아니라 좌파정당과 통합을 추진하는 이유를 묻자, "마음이 가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민주당에 들어가서 참여당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권하는 사람에게는 '군대를 두 번 가느냐'라고 대답한다"고 말했다. 이미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 실험을 했고 실패를 확인했다는 뜻이다.
노무현은 서울 종로구를 버리고 민주당 깃발을 들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국회의원선거 낙선, 부산시장 선거 낙선을 거듭했다. 그는 지역주의의 벽을 향해 돈키호테처럼 돌진했다. "바보 노무현"이라는 말이 이때 생겨났다. 지지자들이 생겼고 이때 정치적 성공을 예약했다.
노무현이 우직하고 대의를 중시하며 다수를 위한 판단에 의존한다면 유시민은 자유롭고 영리하며 개인적 판단에 기우는 듯하다. 한 사람은 시대적 소명을, 다른 한사람은 개인의 주체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차이를 좌파학자 손호철은 신랄하고 가혹하게 표현했다. "노무현의 이미지가 '바보 노무현'과 '진정성'이라면 유 대표의 이미지는 이와는 거리가 먼 '재승박덕'입니다."
진정성은 없다는 유시민과 힘의 원천이 진정성인 노무현
유시민은 자신의 약점을 무마하기 위해서였을까, 진정성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여러차례 남겼다. "행동에 대해서 평가하고 진정성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말라"고 몇 해 전 서울대 강연에서 말했다. 그 뒤에도 여러 강연에서 "진정성은 없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다분히 위악적으로 들린다. 도대체 어떤 뜻일까. 어떤 악인이라도 그 사람의 처지에서 살펴보면 절실한 사연이 있게 마련이다. 도둑놈이라해도 아픈 딸의 약값을 벌기 위해 남의 집 담을 넘은 것일 수 있다. 그러니 진정성 없는 사람은 없다는 거다. 진정성은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 노무현의 힘은 진정성에서 나온다. 그는 자신의 손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정면 돌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잔꾀하고는 거리가 멀다. 우직하고 정직하고 충직하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욕먹을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감독 이창동이 소설가 시절부터 일관되게 만들어낸 캐릭터가 "순진한 또라이" 즉 진정성 있는 바보이다. 노무현은 바로 이런 캐릭터와 일치하는 사람이다.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에게서 흔히 보게 되는 특성은 싫어하는 일 내키지 않는 일은 여간해서 하지 않으려 하는 태도이다. 심지어 현실적인 손해가 뻔히 예상됨에도 그것을 피하지 않는다. 앞의 글에서 리버럴의 특성중 하나를 '오기'라 규정하고 국민참여당에서 500일 넘게 일인시위를 한 당원의 경우를 들었다. 그 당시 당대표가 유시민이었는데 그도 역시 오기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뒤지지 않는다. 그는 호남 정치인들과 척을 져서 선거 때마다 큰 손해를 보고 있음에도 유권자들이 납득할 만큼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노무현과 유시민의 이념적 차이는 곧 정치의 마당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한미FTA에 관한 입장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노무현이 지지자들의 반대가 예상됨에도 이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 정책도 선택했다. 그 결과 그가 선택한 정책에는 좌파 우파가 섞여 나왔다. 이같이 앞으로 나가는 것을 중시하며 좌우를 가리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진보가 어드밴스이다.
유시민은 지난해 연말 한미FTA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노무현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어떻게 그의 고뇌의 작품인 한미 FTA를 반대할 수 있었을까. 유시민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또는 개인적 선호에 따라 판단이 변한다. 이에 비해 노무현의 선택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왼쪽 오른쪽을 선택했다. 그래서 좌파신자유주의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중도좌파와 중도우파의 어간에 놓여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하지만 일관된 좌파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 그런데 같은 이념좌표에 서있는 줄로 알았던 두 사람에게서 보이는 다른 점을 여기서 지적했다. 이에 대해 반박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동지들 사이의 약간의 차이를 찾아내서 굳이 그 차이를 벌려내고 규정해야 하나?
이념은 세계관이면서 동시에 잣대의 기능을 한다. 비슷해 보이는 것들 사이에 있는 다름을 구별해준다. 차이를 구별하는 기능을 비판적으로 보면 분열 조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다른지를 구별하지 못해서 혼란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때는 유용한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보자. 지난해 국민참여당이 진보통합에 참여할 때 당내 논란이 뜨거웠다. 찬성파 반대파를 들여다보니 유시민 지지자와 노무현 지지자로 나뉘었다. 두사람의 세계관이 달랐으므로 지지자들도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이런 현상을 설명할 때는 이념적 구분이 도움이 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