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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대안이다! 조재 형아의 편지를 훔쳐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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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대안이다! 조재 형아의 편지를 훔쳐 읽고

[민들레 교육 칼럼] 길을 묻다 <2>

'교육 불가능' 시대라고 합니다.

과열된 입시경쟁,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학교폭력, 공교육을 대체하다시피 팽창해버린 사교육…등. 가르침과 배움은 사라지고 오로지 '등수 매기기'에만 골몰하는 교실 풍경은 이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식상할 지경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다들 이런 식상한 이야기를 하곤 하지요. 누구나 알고 있는 현실 진단을 기계적으로 읊조리는 정책 당국자, 학자들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풍경, 그 맞은 편에는 학교폭력, 입시 부담, 혹은 어른들이 짐작하지 못하는 그밖의 어떤 이유로 자살을 고민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떠나고 싶을 만치 심각한 문제 앞에서, 어른들은 왜 '뻔한 이야기'만 반복하는 걸까요. 어쩌면 이런 간극이야말로 우리 교육의 절망스런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진짜 필요한 미덕은 '솔직함'일 수 있겠다고 봅니다. 짧은 자기 경험으로 섣부르게 단정짓기보다 교육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아주 하찮은 수준이라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시작하는 태도 말입니다. 또 근대적인 학교 모델이 이젠 어떤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혔다는 점, 그리고 그 한계와 모순에 대한 우리의 인식 역시 한계가 있다는 점 역시 솔직히 인정하는 게 필요해 보입니다.

대안교육 격월간지 <민들레>에 주목한 건 그래서입니다. 지난 1999년 창간된 이 잡지의 시선은 '학교 너머'를 향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바뀌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만큼 우리는 학교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만들자"라는 <민들레>의 목소리가 교육에 관한 '뻔한 이야기'들에 갇혀 드러나지 않았던 '학교의 빈 곳'을 살피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편집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러니까,
니가 아직 어릴 적 어느 깊은 밤,
외로움에 사무쳐 옥상에 누워, 아니면
어느 산정이고, 들판이고, 광안리 백사장이고 누워 바라본
그 별들이, 그 뭇별들이
등수를 매기고 빛나고 있더냐,
순위를 따지고 빛나고 있더냐,
나 잘났다고 빛나고 있더냐.

그러니까, 그때,
바람이 니 귓불을 스쳐
멀리 남태평양으로 불어갔을 때,
물비린내를 풍기며 여우비가 내리고,

견우와 직녀가 무지갯빛 속으로 홀연히 합방했을 때,
니 삶이 오로지 별과 바람과 비와 빛 속에서 충만했을 때도
너는 그렇게 니가 모르는
목적지를 향해 뛰어 갔느냐.

니가 1등을 못한 이유가,
니가 바란 class에 들지 못한 까닭이,
뭇별같이 빛나던 니가 겪은 그 괴롭고 외롭던 불면의 밤이
꼭두각시 놀음판에 놓인 꼭두각시처럼 이미 정해져 있었다면,
그러니까,
지금 여기의 너는 누구냐
아직도 빛나는 저 뭇별들은 무어냐

와서 내게 대답해다오.
니가 그때 품었던 그 수많은 물음에 대해,
대가 없이 고뇌했던 그 시간에 대해.

-2012년 4월 카페 종업원('카페 헤세이티' 전단지 2호 중에서)


반복되는 기시감, 반복되는 악몽

사실 나는 대안교육 혹은 대안학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예전에 몇 차례 취재를 한 경험이 있긴 하지만, 그건 이미 다 지난 일이다. 그러니까 여기 이 글은 대안교육에 대해 뭣도 모르는 놈이 몰라서,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객소리쯤으로 치부해도 좋다.

문득 의아했다. 조재 형아의 글을 읽다가 데자뷔처럼 지금 이 상황을 분명 어디선가 겪은 것 같은, 분명 이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막연히 조금 슬펐다. 도대체 기억할 수가 없고,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이 상황'은 아마도 10년, 20년, 30년, 100년쯤 전에도 그랬을테니까 말이다. 이것은 소학교를 나왔든, 국민학교를 나왔든, 초등학교를 나왔든 누구나 다 겪는 그런 기시감일 테니 말이다.

흔히 변해버린 인간사에서 슬픔을 느낀다지만 실제 슬픔은 변하지 않는, 변하지 못한 인간사에 더 깊이 박혀 있다. 더군다나 분명 변해야 했고 변할 수 있었는데도 변하지 않은 그 무엇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그의 글을 읽으며 느낀 그것은 기실 기시감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곳에서 겪고 있는 실재가 아닌가? 매스게임 같은, 카드 섹션 같은 서바이벌 경쟁 사회의 당연한 현실이 아닌가? 이 땅에서 '교육'이라는 괴물은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변함없이 공고한 학교의 담벼락 같은 것이 아닌가 말이다.

'지금, 여기'를 질문하자

▲ 황경민 씨가 일하는 부산의 인문학 카페 '헤세이티'에서는 매일 손으로 입간판을 쓴다. ⓒ민들레
공부는 답을 찾는 행위가 아니라 질문을 찾아가는 행위다. 때때로 답을 찾긴 찾는다. 그러나 그 답이라는 것도 기실 더 나은 질문을 던지기 위한 예비 단계일 뿐이다. 질문하지 않으면, 질문을 멈추고 답을 찾는 순간, 그 사람은 그 정답에 따라 타성적으로 살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질문하고 답을 얻고, 좀 더 깊이 질문하고 답을 얻고, 좀 더 나은 질문하고 답을 얻고, 그러다가 죽기 전에 관을 짜면서, 어떤 나무가 좋은지, 수의는 뭐가 좋은지 질문하고 답을 얻고, 죽기 바로 직전에는 천국이오, 지옥이오? 윤회요, 해탈이요? 질문하고, 죽으면서는 결국 또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제 죽는다. 너는 잘살았나?"라고. 그러니 알고 죽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다만 지가 알고 죽었다고 착각했을 뿐이거나 죽은 사람과 신통방통 소통하는 영매의 구라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대안교육 이후가 아니라 대안교육 그 자체가 아닐까? 졸업 이후의 진로를 물음으로서 질문을 유예할 게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 대안교육 자체를 질문해야 되는 거 아닐까? 지금 여기를 제대로 묻는다면 진로 따위야 절로 그 질문 속에 용해되어 스스로 걸어 나오지 않을까?

'대안'은 죽을 때까지 추구해야 할 가치다. 대안이 지금과는 다른 삶, 다른 교육, 다른 사회, 다른 세상, 다른 관계, 다른 판을 꿈꾸는 것이라면 말이다.

3년, 6년 대안을 찾는다고, 대안적이었다고, 대안이 완성된다면 그것은 아마 대안이 아니라 대체거나 대리이거나 대충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본(시스템)은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다. 얄짤 없다. 대안교육을 주장한다고, 대안교육을 실시한다고, 대안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대안은 그 모든 대안의 실패를 딛고 어렵사리 고개를 내미는, 밀고 올라오는 어떤 싹 같은 것 아닐까?

그리고 그 싹은, 그 대안을 완수할 수 있는 가장 큰 책임은, 가장 큰 가능성은 어쩌면 참혹한 실패를 겪은 대안교육 1세대들이자 지금 대안교육 전선에 들어선 2세대들이리라. '어쩌면' 이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나는 거기에 한 표 던진다. 나는 도무지 그들이 아니면, 실패와 성취, 희망과 절망을 함께 겪은 그들이 아니면 누가 대안을 찾아낼지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겪은 곤란과 불우의 모든 책임을 단지 시스템으로 돌릴 수는 없다.

대안은 결국 끝까지 질문하는 것이다. 끝까지 질문을 놓치지 않고, 판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수많은 질문은 그 판에서 미리 짜놓은 것일지도 모르니까. 판 그 자체로 수렴되는 질문일지도 모르니까.

진로 문제는 살아가는 동안, 학교를 나오거나 말았거나, 젊었거나 늙었거나, 잘 살거나 못 살거나 간에 생길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조건이다. 죽을 때까지 나아갈 길 '진로'를 묻지 않고는, 누구라도 이미 만들어 놓은 길을 가게 될 뿐. 그러니까 진로는 다가올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늘 지금 여기의 문제다.

▲ '카페 헤세이티'의 인문 강연회 ⓒ민들레

승자독식 도박사회

인터넷 도박 사이트나 파친코는 덤비면 돈을 잃을 수밖에 없도록 프로그래밍 돼 있다. 이것은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라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중독된 사람들은 도박 사이트를 들락거리고, 파친코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보통의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거나 이상하게 여기거나 인간쓰레기, 낙오자, 도박중독증 환자로 치부해버린다. 그 판을 만든 사람, 그 판을 조종하는 사람, 그 판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 혹은 시스템을 탓하지 않는다. 그 판을 만든 사람들의 목적이 더 큰 도박판을 은폐한다는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 서울대로 가는 도박판에 왜 몇십만 명이 뛰어들고 있나?
• 과연 서울대로 가는 도박판이 인터넷 도박이나 파친코보다 승률이 좋을까?
• 투기와 도박과 서바이벌과 오디션을 관장하는 세력이 누구인가?
• 왜 늘 1등을 뽑아야 하고 승부를 가려야 하는가?
• 왜 1등에게는 인간승리의 내러티브를, 왜 승리자에게는 휴머니티의 아우라를 덧씌우는 걸까?
• 왜 경쟁에 참가한 자들만이 티브이에 나오고, 왜 경쟁을 통과한 자들만 이 신문과 잡지에 게재되는가?
• 왜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면서도 승자독식 룰은 그대로 따르는가? 오로지 질문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비록 그 답을 무덤 속에서나 찾을 수 있을지라도.


깡다구는 어떻게 생기는가

유리온실이나 화원에서 자란 화초를 들판에 심어 놓는다고 야생화로 자라지 않는다. 학생들이 세상에 나갔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면역력을 키워야 세상에 맞설 수 있다. 대안교육은 자본주의의 무서움을, 해악을, 그 완강함을, 불가사리 같은 힘을 낱낱이, 속속들이, 끈질기게, 징글징글하도록, 무섬증이 일도록, 그리하여 절망에 가 닿도록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일이어야 한다.

시장논리를 옹호하며 경쟁을 부추기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떠드는 처세, 경영, 마케팅, 자기계발서들이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가? 그렇다면 대안교육 진영에서는 그들의 전략에 맞서 자본을 얼마나 파악하고 탐구했는지 자문해야 한다. 물론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평등하게, 평화적으로, 조화롭게 성장시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자본의 그물망이 뻗어 있지 않은 곳이 없는데, 학생들이 스스로를 보호할 전략과 전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스스로 맞서 싸워갈 '깡다구'를 키워주지 않는다면, 싸움닭 같은, 질경이 같은 끈끈한 정신력을 배양시키지 않고서 어찌 자본을 극복할 대안이 마련되겠는가? 학교에서 대안을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그들이 스스로 대안이 되고, 대안을 만들어갈 수 있는 체력을 길러줘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와 학부모를 비롯한 대안교육 관계자들이 공부를 쉬지 말아야 한다. 늘 지금 여기의 사태와 상황을 주시하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궁리해야 한다. 공부하지 않는 선생님 밑에서 교육받은 학생들이 '지금, 여기'를 질문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교육, 의료, 주거, 교통, 수도, 전기, 원자력, 식량, 생태, 정치, 경제 등등 이 모든 것은 연동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함께 해결하지 않으면 어떤 것 하나도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삶과 살림의 문제만이 아니라 죽음과 죽임의 문제를 학생들과 대면시키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암세포를 처리하는 다양한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비록 무수한 수단과 방법으로 카멜레온같이 변신하고 위장하는 적일지라도, 그 적을 찾아내고 대적하는 방법을 교육 이후에 맡겨서는 안 된다.

결국 공동체의 문제다. 어떤 개인도 자본과 대항해서 자본을 넘을 수 없다. 자본의 카르텔이 강고하게 작동한다면, '노동'의 카르텔, '약자'의 카르텔 없이 어떻게 대항, 대적할 수 있겠나? 비록 자본 속에서, 체계의 톱니바퀴 속에서 싸워야 하지만 자본을 거스르는, 시장의 틈새를 벌리고 강고한 체계에 균열을 내는 새로운 공동체 모델을 사유하지 않고서는 '대안'을 내올 수 없다.

ⓒ민들레

빈손이 대안을 움켜쥔다

아울러 자녀들에게 기성세대의 꿈을 전가시키지 말아야 한다. 자기의 삶을 대신할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다만 환상이고 이룰 수 없는 욕망일 따름이다. 누구나 그들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대안'을 모색하는 행동을 시작한 사람들은 경쟁 시스템을 통해 승자독식을 유도하는 세계를 바꾸려고 모인 것 아닌가. 그러나 현재 분명 인식하고 있겠지만, 한국의 대안교육은 또 다른 입시, 또 다른 차별, 또 다른 경쟁의 폐해를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강남을 대체하고자 마련한 교육이 또 다른 색깔의 강남, 좀 더 나은 강남을 만들어나간다면 그것에 '대안'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일이다.

'대안'은 수사가 아니다. '대안'은 자기중심적 욕망의 배출구가 아니다. '대안'은 내 자식만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결국 대안교육은 공교육을 바꿀 큰 틀에서 사유하고 전망을 만들어가야 한다. 대안학교에 보낼만한 형편이 되지 않는 그 수많은 가정과 학생들을 외면한다면, 만약 '대안'이 못 가진 자와 수많은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외면한 채 진행되고 추구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또 다른 '특별', 또 다른 '특권'을 생산하는 이중의 자기기만에 빠질 것이다.

자본 속에 포위되고, 입시 경쟁 교육에 포위된 대안교육만의 '대안'은 사막에서 우물을 찾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그 포위의 장막에 구멍을 내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구멍들을 잇는, 베트남의 구찌터널 같은 대항 요새를 만들어가지 않는다면, 대안은 그저 입으로의, 관념만의, 대안을 위한 대안만을 생산할 수밖에 없다. 공교육을 바로 잡는, 공교육을 뒤집어엎는 반자본적, 가치전도적, 자기비판적 사유 없이는 결국 대안은 다시 체제의 품속으로 귀환할 것이다.

다른 부모보다 생각이 좀, 더, 낫다는 생각 따위를 하고 있다면 바로 그 지점이 대안교육을 망치는 지점일지 모른다. 당신이 버리지(바꾸지) 못한 교육, 당신이 버리지(바꾸지) 못한 의료체계, 당신이 포기하지 않은 아파트, 당신이 포기하지 않은 자가용이 당신을 속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아무것도 버리지 않은 자는 어떤 것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민들레

변해가는 너희가 대안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학생이 있다면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너희들은 엄밀하게 말해서 그냥 거기 내던져진 것이다. 자본은 모든 대안마저 집어삼키는, 모든 것을 씹어 삼키는 불가사리 같은 괴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혹 너희가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거기 들어갔다고 할지라도 그 선택은 아직은 자본에 예속된 선택이다.

그리고 친구들아! 대안은 대안학교에서만 찾는 게 아니란다. 거기는 아주 잠깐 달콤함을 맛보는 맛뵈기 엿 같은 임시거처일 뿐이다. 그곳은 너희가 다른 생각, 다른 몸, 다른 관계를 꿈꾸기 위한 훈련소와 같을 뿐, 아직 너희는 실전에 임해서는 한낱 병아리와 같이 허약한 존재일 뿐이다. 바깥세상의 거대한 시스템은 너희를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너희를 노리고 있다. 밖으로 내던져지는 순간, 너희는 도저히 얼굴을 알 수 없는, 그 실체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괴물과 맞닥뜨려야 한단다.

그러나 두려워 마라. 또 한편에서 저 거대한 시스템에 구멍을 내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너희는 아직 실전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무방비의 상태로 세상에 내던져진 너희의 선배들이 참담한 실패와 뼈아픈 굴욕을 견디면서 다른 길을 내려고 나아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경쟁을 거부하고 삼삼오오 모여든 너희의 수많은 친구들이 있으니까. 저 보이지 않는 괴물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퍼즐을 맞춰가고 있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끝으로 아주 개인적인 생각일지 모르나, 나중에 어떤 실용을 발휘할지 모르는 팁을 제안하면서 이 글을 맺을까 한다. 기술을 가르치고 기술을 배우자.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이면 어떤 기술이든 꼭 하나만은 가르치고 배우자. 그게 목수일이든, 농사일이든, 미용일이든, 옷감 짜는 일이든, 기타를 만드는 일이든, 도자기를 만드는 일이든 간에, 너희들이 세상에 나가서 그것과 상관없는 그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삶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자.

어떤 절망과 어떤 좌절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그 기술들이 모이면 어떤 공동체라도 어렵사리 유지해갈 수 있는, 관념이 아니라 지식이 아니라 어떤 기술을 배우고 익히자. 비록 너희들의 꿈이 의사, 학자, 예술가, 시인이라 하더라도 제 삶의 토대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술, 그것이 모이면 삶의 기반이 되는 기술을 일단은 하나씩 익히자. 어쩌면 그런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삶의 기술, 그 자체가 우리의 '대안'일지도 모르니까.

* 위의 글은 <민들레>82호에 "동무야, 달 따러 가자!"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황경민 씨의 글입니다. (☞<민들레> 바로가기)

황경민

부산의 인문학 카페 '카페 헤세이티'의 종업원. 세상을 어찌 바꿔볼까 노상 궁리 중이며, 현재 입간판 장르·노천칠판 장르·전단지 장르 등의 매체 개발에 푹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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