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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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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37>

흐르지 않는 삶은 없다

이번 글은 사실 지난 글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난번의 얘기를 좀 더 자세하게 듣고 싶다는 요청이 제법 있었기에 쓰게 되었다.

필자가 잘 알고 지내는 어느 인생 후배는 자신의 삶을 한없이 지루해한다. 겉은 아주 멀쩡하다. 최고의 대학을 나왔고 행정고시에 붙어 모 정부 부처에서 사무관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수시로 필자를 찾아와서 뭐 좋은 길이 없겠느냐고 묻곤 한다.

필자 역시 그 후배의 말이 진심임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후배의 길이 이미 정해져 있음도 짐작하고 있다. 그저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서 이런 말 저런 말로 달래기도 하고 사주팔자를 풀이해주면서 위로하곤 한다.

파랑새를 찾겠다는 그 마음을 뉘라서 막겠는가. 누군가 말했다. 먼 길을 헤매다 못 찾고 돌아왔더니 안마당의 나뭇가지 위에서 파랑새가 울고 있더라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먼 길의 방황이 있었기에 파랑새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삶이란 것이 세 끼 밥을 먹고 산다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지만 젊은이, 다시 말해 열정이 있는 자에게 끼니 밥의 진리를 강요해봐야 헛일일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 후배가 머지않아 자신의 길을 나설 것이고, 그 길에서 많은 풍상과 고초를 겪을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만류할 생각이 없다. 그 후배는 창조적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기에 말이다.

살다보면 때로는 정말 스스로가 흐르지 않는 물줄기와도 같은 느낌으로 지낼 때도 있다. 흐르지 않으니 시간은 정체되어 있고,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 역시 오늘 같으리라는 상념으로 괴로워하기도 한다. 결국 그 무의미한 시간들을 견디지 못하고 인생의 커다란 변화를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사주 상담을 하면서 가장 많이 겪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살다보니 어느 한 해, 갑자기 사업을 하겠다고 직장을 그만 둔다. 대개의 경우 이럴 때는 그 사람에게 재운(財運)이 들었을 때가 된다. 하지만 재운에 사업을 한다는 것은 마치 가을 추수기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얼마 가지 않아 엄동설한이 찾아와 뿌린 씨앗들은 모두 얼어 죽게 된다. 그 결과 사업은 실패로 끝이 난다. 종자돈은 물론 대출받은 돈도 없애는 바람에 어렵게 마련했던 집까지 넘기게 된다. 여기까지 대개 3년이 걸린다.

그 이후 전세를 전전하면서 생활은 피폐해지고 직장을 다시 구하기도 하지만 예전과는 대우가 다르고 그나마 안정적이지 않다. 삶이 피폐해져가는 가운데서도 아이들은 자란다. 학자금 마련을 위해 고리의 대출도 받게 된다. 아내도 일하러 나서게 되고 어느 날엔가는 아이들이 늦은 밤에 귀가하면서 닭튀김 같은 것으로 저녁을 때우게 되는 일이 일상화된다. 온 식구가 패스트푸드로 각자 저녁을 해결하는 일도 다반사가 된다.

대개 이런 지경에 이르면 직장을 나섰던 날로부터 정확하게 6년이 흘러있다. 모험을 시작한 지 6년이 지나 충(衝)운, 즉 전기(轉機)를 맞이한 것이다. 이 때쯤이면 애초에 파랑새를 찾아 나섰던 마음은 간 곳이 없고 하루하루의 삶이 숨 가쁘고 고단할 뿐이다.

그 사이에 예전에 같이 일했던 직장 동료들을 살펴보면 부동산 가격 앙등으로 자신과는 이제 비교가 아예 불가능해져있다. 남들은 앞으로 나아갔는데 자신은 뒷걸음질을 했다는 박탈감에 더욱이 스스로의 어리석은 결정이었는지라 누굴 탓할 수도 없다.

한 없이 외롭고 괴로워, '가시나무 새'의 노랫말처럼 그저 슬픈 노래를 부르는 날만 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저 어둡기만 한 이 때가 전환점이 된다. 막다른 골목이라 싶었는데 정작 그 길의 끝에 다다르고 나니 거기에도 샛길이 나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샛길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믿어도 좋다.

그 샛길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 속에 원래부터 내재해오던 힘이 작동되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좋다. 이제 드디어 그 사람은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하는 문턱에 들어선 것이라 생각해도 좋다.

산에서 놀아서 산에 익은 이는 먹을 것과 잘 곳을 걱정하지 않는다. 사방천지가 먹을 것이고 잘 곳인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에서 처음 놀아본 이는 침낭도 필요하고 텐트도 필요하며, 쌀을 비롯한 온갖 것이 다 필요하다.

그러나 그 산길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이고 어쨌든 앞으로밖에는 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서서히 산 여기저기서 먹을 것과 잘 곳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 인식과 통찰의 시간을 통해서 그 사람 역시 산에 익은 이가 된다. 이 역시 전체해서 6년의 세월을 필요로 한다. 이를 법칙이라 여겨도 좋다.

결국 출발점에서 12년이 지난 어느 지점에 다다르고 나면 그때서야 12 년 전, 모험의 길을 떠난 것이 전혀 허사가 아니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이 지점에 이르게 되면 그는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재생산해낸 것이다.

따라서 그 이후로부터 맞이하는 시간들은 철저하게 그 사람만의 재능과 활력에서 주어지는 일들이기에 더 강하고 신선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이로부터 다시 6년의 세월, 즉 전체해서 18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당초 모험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월등한 내적 힘으로 인해 나름대로 보람찬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18년의 기간은 사실 인간이 활기차게 살 수 있는 전체 기간인 72년의 1/4에 해당된다. 일생을 한 해로 비기면 한 계절 동안이 된다. 운명적으로 사람의 일생은 춘하추동의 사 계절 중에서 하나의 계절만큼은 시련과 극복의 세월이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아울러 그것이 어느 계절이냐 하는 것은 팔자 나름인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무수한 사람들의 사주팔자를 놓고 상담을 하는 가운데 알게 된 삶의 요체다. 상담을 하는 가운데 필자 역시 삶에 대해 통찰을 키울 수 있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런데 필자의 말에 대해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그것이 무모한 결정이라 하더라도 일단 길을 떠나면 끝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영위할 수 있는 것이냐 하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파랑새를 찾는 정열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그 결과는 실로 그렇다"이다. 다만 안일하게 살다가 어느 날 예기치 않게 닥쳐온 역경이라면 그 결과는 확률의 공간 속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 그것이 다소 허황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로 그 길을 선택한 것이라면 결과는 철저하게 해피 엔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어떤 이는 사업하다 망한 뒤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냐 하고 물어보실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사업을 한 것이 아니라, 사업으로 내몰린 경우이기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직장을 잘 다니다가 어느 날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으로 사직하고, 그냥 놀 수 없으니 사업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결국 이는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찾아온 역경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 역시 길로 내동댕이쳐졌다 하더라도 대략 6년 정도 경과한 시점에서 스스로의 껍질을 버리면 되는데 그만 그러지 못하고 좌절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애초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였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길을 가다보면 먼 훗날에 가서 이처럼 결정적인 비중을 갖는다.

결국 사람은 필자의 오랜 운명상담을 통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승부를 보아야 한다는 점, 그리고 도중에 실패했다 여겨지더라도 진정한 원인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또 다시 모든 삶을 걸고 대응해낼 수 있는 힘을 지녔느냐가 관건인 것 같다는 소감이다.

필자가 얻은 이 소회(所懷)를 달리 표현하면 생명이란 꿈틀거리는 것이고 때로는 튕겨나가는 탄력과도 같은 것인데 그 탄력을 주체적 의지로 사용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흐르지 않는 것 같은 순간에도 면면히 흘러가고 있으며, 모르는 가운데 자신만의 길을 가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길을 가면서 나의 운명 또한 나의 것이기에 어디까지나 나에게 호의(好意)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공연히 자신의 운명에 대해 회의적 또는 의심의 눈초리를 주지 말라는 얘기이다. 우리는 한 길이 끝나면 또 새로운 길을 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길의 도중에서 삶을 마감하게 되지만 실은 어느 순간에 숨을 놓아도 그것으로서 훌륭한 완결(完結)인 것이다.

길을 주제로 얘기하다보니 필자가 좋아하는 한 편의 짧은 시가 생각나서 옮긴다.

"방랑에 병들어, 꿈은 겨울벌판을 헤매이누나"

일본 하이쿠(俳句)의 명인 바쇼(芭蕉)가 길을 가다 병을 얻어 50세의 나이로 죽으면서 남긴 노래이다. 길에서 삶을 마친 시인이 말하는 그 꿈은 또 어떤 것이었을까?.

(전화:02-534-7250, E-mail :1tgkim@hanmail.net)
- 김태규의 명리학 카페 : cafe.daum.net/8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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