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태규 명리학 <236>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태규 명리학 <236>

삶의 비밀을 찾아 떠나는 여행

어떤 젊은이가 와서 물었다. 다니는 직장을 그만 두고 다른 일을 해 볼까 싶은데 어떨는지 하는 물음이었다.

필자는 빙긋 웃는다. 하지만 속으로는 정신을 바짝 차린다.

빙긋이 웃는 이유는 이렇다. 지금 물어보는 당신 앞의 수많은 선배들이 물었던 질문이고 필자로서는 무수히 답해주었던 것이기에 그렇다.

정신을 바짝 차리는 이유는 이렇다. 정말 이 사람이 자신의 길을 나서서 끝내 자신의 땅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길에서 방황하다가 스러져버릴 사람인지를 질문을 받는 그 순간에 판단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살 떨리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긴장할밖에.

직장을 다니다가 30 대 후반이나 40 대 초반에 직장을 떠나 자신의 일을 하러 나서는 그들은 근본적으로 구도자(求道者)들이다. 인생의 참된 비밀을 알기 위해 절로 들어가는 사람만이 구도자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사람들 역시 구도자라 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화엄경의 선재동자가 여러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길을 나서듯이 그들 또한 참된 인생의 길을 찾아 나선 구도자들인 것이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든, 부귀영화를 쟁취하기 위해서든, 또는 그냥 직장 생활이 갑갑해서든 동기의 차이야 있겠지만 마음을 일으켜 모험의 길로 나선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아울러 결국 그들 모두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며 노상에서 방황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구도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구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 역시 그 사람의 팔자이고 운명이다. 길을 떠날 때의 동기가 허영이든 분수를 몰라서이건 간에 그것은 관계없다. 그 모두 결국에 가서 그들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것은 삶의 진실이고 비밀이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판타지인 '구운몽'에서 생의 온갖 부귀영화를 체험한 후에 도를 깨치게 되는 성진 스님의 길과 직장을 떠나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선 모든 이들이 가는 길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더러는 순조롭게 일이 풀려서 영화를 누리는 이도 있어 구운몽의 성진 스님과 흡사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또 대부분은 길 떠난 후 부귀영화는커녕 찬 바람과 밤이슬을 맞으면서 팍팍해진 무릎을 달래며 끝날 것 같지 않은 길을 가게 된다. 길을 간다는 것 자체가 신고(辛苦)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사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길을 떠나면 어떻겠냐고 물어보러 온 인생 후배들을 대할 때, 빙긋이 웃어주는 것은 사실 길 떠나고자 하는 이에 대한 동정과 존경의 마음이고,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은 물어보는 이가 굳센 의지와 튼튼한 다리를 가졌는지를 판단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한 인생을 걸고 질문해오는데 그가 지불할 상담료 몇 푼은 전혀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질문을 받고 그에 대답을 해준 날이면 전신에서 기력이 빠져나감을 느끼게 된다.

직장에서의 삶과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 이의 삶은 그 근원에서부터 다르다. 길을 나섰다는 것 자체가 정도의 차야 있겠지만 결국 고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 천 년 전 인도의 어느 작은 왕국에서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젊은이가 집을 나서 삶의 해탈을 찾았다는 얘기를 알고 있다. 또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에서 젊은 예수라는 사내가 길을 떠나 오랜 기간 동안 구도의 길을 걸었던 사실도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엄청난 성인으로서 추앙받고 있지만, 사실 30 대 후반에서 40 대 초반에 길을 떠나는 모든 이들 역시 석가나 예수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다. 심지어 탐욕에 눈이 멀어 길을 나섰다 해도 성인들과 그다지 다른 사람이 아니다.

해탈과 삶의 평화를 얻고자 하는 정열이나 돈이나 권력의 비밀을 얻고자 하는 정열이나 근원에 있어서 같은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길에서 길을 찾다보면 결국 얻게 되고 만나게 되는 것도 같은 깨침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에 목이 마른 구법승(구법(求法僧))이나 돈에 갈증을 지닌 벤처사업가, 그냥 직장 다니기가 갑갑해서 무작정 길을 떠나는 한심한 젊은이나 그들이 더 나은 삶의 상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동기가 다른 것은 사실 별 상관이 없다. 길에서 고생할 것이며 때로는 길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돌 것이며 처음에 떠나올 때의 의욕과 목표도 길이 주는 고단함과 가르침으로 인해 어느덧 색이 바래다보면 나중에 얻는 것은 동일한 깨침, 즉 한 장소로 인도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삶의 비의(秘義)이다.

이 말은 사실 필자의 철학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무수한 스승들이 가르쳐 온 말이며, 하인리히 짐머가 "인도의 신화와 예술"이라는 저서를 통해 파헤친 삶의 비의와 정확하게 같은 말이다. (국내에도 대원사에서 이 책을 출간하고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께 일독을 권한다. 필자가 평생 읽은 책 중에서 열권만을 뽑으라면 그 속에 이 책을 넣는다.)

다만 필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상담해주면서 이 비밀을 느끼게 되었고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좀 더 보탤 말도 있다.

사람이 길을 떠나면 기본적으로 12 년간의 정해진 기간을 채워야 그 방황이 일단락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처음의 6년간은 상당히 어렵고 고단한 길을 걸어야 하며, 다음의 6년은 길을 걷는 내공이 생겨서 어느덧 길 가는 것 자체가 즐거워져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처음의 6년을 견뎌내지 못하면 길에서 좌절하여 그것으로 자신의 인생이 실패였다고 판단할 수도 있고 더러는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

처음의 6년간이 시련인 것은 처음에 지녔던 것들이 쓸데없음을 확인시켜주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막연한 자신감이나 긍지, 몇 푼의 노자(路資) 같은 것들이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서 그것들을 다 버려야 제대로 길을 갈 수 있다는 체득할 때까지 6 년의 세월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길을 가는 이는 결국 길에서 무언가를 얻게 되는 것이지 출발할 때의 준비물이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받침이 되지는 않는다. 짧은 여행길이라면 돈으로 숙소와 식사를 얻을 수 있겠지만, 긴 여행 그리고 자신의 근원으로 떠나는 긴 여행에서는 결국 길에서 만나는 것들과의 인연 속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이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진실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필자를 찾아온 젊은이와 나누는 문답은 다음과 같다.

"한 6년간은 고생해야 할 껄. 그럴 자신이 있는지."

"6 년씩이나요? 만만한 기간이 아닌데요."

"그럼, 길을 떠나지 말든가."

처음 6년간 어떤 고생을 하는지 겁도 주고 그냥 편하게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회유도 하지만, 그래도 그 친구의 결심이 굳다면, 동시에 그 친구의 사주를 보아 근기가 튼튼해 보인다면 머리를 끄덕여준다.

그리고 그 친구가 맞이할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 말해주고 특히 6년이 지났을 때 아무런 자신과 용기도 남아있지 않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전환점이니 그 순간에 좌절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이 말은 진실이다. 본인이 아무 것도 아니고 지극히 무능해서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도 존재가치도 없다고 자인하는 그 순간이 바로 그가 일어서는 순간이고 자신의 속에 무궁무진한 생의 활력이 들끓고 있음을 느끼는 시점이다.

반지의 제왕, 참으로 재미난 모험소설이다. 그리고 그런 얘기들은 실로 많다. 수많은 신화와 영웅담 속에 들어있는 모든 얘기들이 다 같은 것들이다. 당신이 그런 얘기들을 통해 삶의 비밀을 간접 체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당신이 길을 나선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만의 영웅담, 모험담, 판타지 소설의 첫 페이지를 써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직접 체험은 엿보는 것보다 수 천 배 아슬아슬하고 재미있을 것임은 당연한 얘기이다.

필자는 세상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 영움담을 간접 체험하는 자와 자신의 모험담을 직접 써나가는 사람들로 말이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 그것은 스스로의 마음에 달린 것이고 또한 그것이 팔자(八字)인 것이다.

간단한 얘기 하나 더.

드디어 유라시아 대륙의 임맥(任脈)이 타통되기 시작하나 보다.

대륙의 독맥(督脈)이 일본에서 싱가포르를 거쳐 인도양, 케이프타운을 지나 영국과 네델란드의 안트워프로 이어지는 기맥(氣脈)이라면, 부산에서 출발하여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멀리 유럽으로 이어지는 임맥이 막혀있는 바람에 유라시아 대륙은 실로 답답했었다.

그런데 오는 5월 25일에 비무장 지대의 남북을 관통하는 기차 길이 시험운행에 들어간다니 실로 반가운 소식이고, 드디어 유라시아 대륙의 임맥이 타통(打通)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통하면 인정(人情)이 오가고 소식이 오갈 것이며 물자도 오갈 것이다.

5월 25일은 병술(丙戌)년, 계사(癸巳)월, 갑인(甲寅)일이다. 기차는 갑목(甲木)이고 목생화하는 병술년이니 기차가 달리는 데 달이 계사이므로 계수(癸水)가 갑목을 생해서 시험운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전화:02-534-7250, E-mail :1tgkim@hanmail.net)
- 김태규의 명리학 카페 : cafe.daum.net/8code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