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제를 하려면 외교 국방 등을 연방정부가 담당하고 남북이 자치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가 상대방을 인정해야 하므로 남북 자유방문과 전면 교류도 이어질 것이다. 전파교류도 허용되어서 남한의 TV 화면을 북한사람이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불과 몇 달 내에 북한이 무너질 것이 분명하다. 고려연방제하면 흡수통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연방제가 평화통일의 길이 아닌가. 연방제를 지지하면 안 될 이유가 있나. 이 발언을 한 사람은 당시 동포신문 기자였던 필자였다.
이 말에 좌중이 술렁이자 대사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건너편에 앉아있던 정보담당 공사를 바라봤다. 당신이 이 문제의 답을 내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공사는 침착하게 혼란을 정리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그의 대답이 뚜렷이 기억난다. 연방제는 북한이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법이다. 두말이 필요 없는 명료한 대답이었다.
그 뒤에 언젠가 그 자리에 동석했던 한 동포가 필자에게 말했다. 그거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이상한 일이다. 북한은 자기들이 손해되는 일을 주장하고 남한은 자기편에 이익이 되는 일을 불법이라고 하지 않나. 이와 비슷한 모습이 지난주 TV조선의 화면에 비춰졌다.
9월7일 방송된 '장성민의 시사탱크'에서 반공단체로 알려진 한국자유연합의 대표 김성욱을 인터뷰하다가 방송사고가 났다. 김성욱이 방송 중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송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이 사고의 발단이 된 것이 연방제였다. 사회자 장성민은 남북문제 전문가로 자기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남한 주도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중심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북한의 주체사상에 의한 연방제 주장"이 다르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서 김성욱은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은 북한의 주체사상과 공산체제가 전제가 된 상태"의 연방제라고 대답한다. 즉 적화통일 전략으로 내놓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가 전제된 연방제는 문제될 게 없다고 말한다.
연방제는 서로 다른 체제를 묶어내는 제도이다. 체제가 같으면 연방제를 할 필요가 없고 통일하면 된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등한 조건이 갖춰져야 연방제라는 틀 안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주체사상이 전제된 연방제와 자유민주주의가 전제된 연방제라는 말에는 어느 한쪽의 우위가 전제돼 있다. 이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라는 장성민의 질문은 형식논리상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도 사회자의 주도권을 이용해 이런 질문을 던진 의도에는 복선이 깔려있다. 북한의 연방제를 반대하는 김성욱의 입장을 잘 알고 있으면서 남한 주도의 연방제에 기울어져있는 자신의 생각을 대비시키려 한 것 같다. 언뜻 보기에 두 사람의 생각이 달라 보이지 않지만 날카로운 차이가 숨겨져 있다. 그 차이는 곧 드러난다.
토론이 진행되면서 두 사람의 발언의 양이 대등해지더니 급기야 초청자가 사회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상한 장면이 연출된다. 질문 내용도 색깔론을 연상케 한다.
▲ 장성민의 시사탱크 방송 중 김성욱씨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장면 ⓒTV조선 캡쳐 |
김성욱: 한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그러면 연방제 통일을 지지하십니까?
장성민: 저는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연방제 통일을 한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게 남한 주도에 의해...
김성욱: 북한 정권이 그대로 유지되는 상태에서 연방제로 가도 문제가 안 된다고 보십니까?
장성민: 북한은 정신적으로 남한의 민주주의 이념과 가치를 받아들이겠죠.
김성욱: 북한정권이 왜 남한의 이념과 가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십니까?
장성민: 저는 충분히 받아들일 가치가 없어도 자기네들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렇게 보는 거죠.
(출처 : TV 조선 인터넷 사이트)
장성민은 연방제를 하면 북한이 남한의 이념과 가치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북한을 흡수통일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김성욱은 그런 방식으로는 북한이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두 사람의 생각이 갈라지는 분기점이 점차 분명해져간다.
그런데 토론의 방향이 갑자기 연방제에서 북한의 변화로 바뀐다. 장성민은 교류협력을 통해서 북이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남의 실정을 알게 되면서 탈북자가 발생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김성욱은 교류협력이 북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탈북자에 대한 생각도 다르다. 300만명의 아사사태에 몰린 북한주민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근 100만명이 탈북했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토론이 폭발하고 만다. 기폭제가 된 것은 100만명이라는 숫자이다. 장성민은 전혀 근거가 없다며 데이터를 가져와보라고 호통치듯 말하고 김성욱은 정확한 팩트라고 맞선다. 토론이 닭싸움의 양상으로 치닫더니 급기야 김성욱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탈북자 100만명 논란에 필자는 끼어들고 싶지 않다. 누구 말이 옳은지는 팩트를 확인해보면 될 일이다. 100만명이 탈북했다면 북중국경이 무너졌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과연 90년대 중반 상황이 그러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필자의 여전한 관심사는 두 사람의 연방제에 대한 관점이다. 연방제가 되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일까. 김성욱은 북한 주도의 연방제로 가면 남한이 적화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에 반해 장성민은 북한이 남한의 민주주의 이념과 가치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본다. 출발점은 비슷했는데 이 부분에서 극단적으로 의견이 갈린다. 누구 말이 옳은가 제대로 따져보자. 골치아픈 문제이지만 필자에게는 흥미로운 주제이다. 10여년 전에 있었던 사건과 같은 성격의 문제여서 오래된 숙제를 다시 마주하는 것같다. 당시 대사관에서 맞섰던 공사와 필자의 입장이 김성욱과 장성민의 싸움으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연방제가 적화전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연방제의 조건 중에 주한미군 철수, 공산당 합법화,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거론한다. 이 조건들만 실현되면 북의 전략에 남한이 먹힐 것 같다. 그러나 그뿐인가. 왜 늘 그것만 언급하나. 이런 부분이 억지스럽다. 연방제는 대등한 조건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북한이 받아야 할 것도 있다. 북한은 남한에 적대적인 규정을 담은 노동당규약을 폐지해야하고 남북 자유왕래, 남한의 TV 전파 등을 허용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남과 북 중에 어느 쪽에 더 큰 변화가 찾아올까. 북한은 폐쇄사회여서 외부 충격에 취약하지만 남한은 주사파 예방주사도 맞아서 견디어내는 체질이 강해졌다. 그렇다면 북한에 큰 변화가 올 것이다. 그것도 감당할 수 없는 변화여서 급속히 무너지게 돼있다. 다른 것 몰라도 TV 전파만 들어가면 된다. 사이의 강남스타일이나 소녀시대의 Gee와 같은 노래가 북한주민의 안방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독일통일과정에서도 서독의 TV 방송이 큰 역할을 했었다.
연방제는 겉으로는 중립적이고 공평하며 평화적인 것 같지만 내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철저한 힘의 논리, 강자의 논리이다. 연방제는 양쪽 체제의 장단점이 가감없이 민족 앞에 드러나므로 비교우위에서 약한 쪽이 먼저 무너지게 돼있다. 달리 말해 약한 쪽이 강한 쪽에 먹히는 게임이다. 연방제를 처음 제기했던 60년대에는 북한이 우위에 있었다. 북한의 경제사정이 월등히 좋았다. 이 당시 연방제를 했다면 그들의 목적대로 적화통일을 이뤘을 것이다. 그래서 남한정부는 국민들이 고려연방제를 입에 올리지도 못하게 틀어막았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가. 지금은 반대의 상황이다. 남한의 연간 총생산 규모는 3000억불로 60억불 수준인 북한의 50배에 이른다. 지금 연방제를 하면 북한이 먹히게 돼있다. 그래서 북한은 더 이상 고려연방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말도 들린다. 그런데도 김성욱 같은 남한의 극우반공주의자들은 여전히 겁을 먹고 있다. 그게 아니면 사정이 달라졌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반공 반북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복잡해 보이는 이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남한은 자기에게 유리한 연방제를 배척하고 북한은 자기들에게 불리한데도 그것을 주장한다. 장성민은 북한전문가답게 이런 점을 넘겨짚고 질문을 던져서 반북논리의 허구성을 드러내려 한 것 같다.
분단 체제가 두세대를 지나면서 바뀐 현실 때문에 과거의 논리가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황장엽이나 김영환이 전향을 선언했음에도 주체철학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그런 사례 중 하나이다. 반공 논리도 이제는 시대상황에 맞게 정비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젊은 반공주의자인 김성욱은 선배들의 케케묵은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김성욱과 장성민의 충돌은 과거의 반공논리와 새로운 반공논리 간의 대립이다. 반공이념도 변화된 상황에 맞게 진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니 지금 2030세대들의 지지를 잃고 있는 것 아닌가. 천안함 사건 등 북한관련 사건들에 대한 그들의 불신감을 보면 알 수 있다.
연방제를 둘러싼 모순은 한민족 공동체 구성원들을 모두 바보로 만들고 있다. 상황이 바뀌었는데 과거의 구도는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만일 "나는 연방제를 지지한다"라고 말하면 지금도 불법이다. 대법원 판결이 그렇다고 한다. 어이없어 보이지만 이 싸움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라는 긴 이름을 갖고 있는 단체가 있다. 줄여서 "연방통추"로 불린다. 주로 백발의 할아버지들이 회원인데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연방제통일을 주장한다. 그들의 주요활동으로 꼽히는 것이 맥아더 동상 철거시위였다. 그들은 지난해 9월22일 북한 지령에 따라 연방제 통일운동을 한 혐의(국가보안법 상 이적단체의 구성)등으로 기소됐다. 전 의장 김 모 씨는 이날 항소심에서 원심과 같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이 재판의 피고인을 담당하는 변호사가 필자의 지인이어서 언젠가 그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연방제 통일이 되면 북한이 남한에 흡수될 가능성이 높으니 이 주장이 결코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판사에게 말해봐라. 그러나 나중에 확인을 해봤더니 법정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무엇보다 피고인들이 원하는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연방제 논란에는 허위의 대립이 숨겨져 있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에 반대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지지하는 어처구니없는 싸움이다. 남한 뿐 아니라 북한주민까지 모두를 바보로 만드는 루저들의 게임이다. 이런 것이 바로 분단구도를 청산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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