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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있어야 문화생활 할 수 있다는 착각을 깨자

[민들레 교육 칼럼] 예술교육과 교육예술

'교육 불가능' 시대라고 합니다.

과열된 입시경쟁,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학교폭력, 공교육을 대체하다시피 팽창해버린 사교육…등. 가르침과 배움은 사라지고 오로지 '등수 매기기'에만 골몰하는 교실 풍경은 이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식상할 지경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다들 이런 식상한 이야기를 하곤 하지요. 누구나 알고 있는 현실 진단을 기계적으로 읊조리는 정책 당국자, 학자들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풍경, 그 맞은 편에는 학교폭력, 입시 부담, 혹은 어른들이 짐작하지 못하는 그밖의 어떤 이유로 자살을 고민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떠나고 싶을 만치 심각한 문제 앞에서, 어른들은 왜 '뻔한 이야기'만 반복하는 걸까요. 어쩌면 이런 간극이야말로 우리 교육의 절망스런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진짜 필요한 미덕은 '솔직함'일 수 있겠다고 봅니다. 짧은 자기 경험으로 섣부르게 단정짓기보다 교육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아주 하찮은 수준이라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시작하는 태도 말입니다. 또 근대적인 학교 모델이 이젠 어떤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혔다는 점, 그리고 그 한계와 모순에 대한 우리의 인식 역시 한계가 있다는 점 역시 솔직히 인정하는 게 필요해 보입니다.

대안교육 격월간지 <민들레>에 주목한 건 그래서입니다. 지난 1999년 창간된 이 잡지의 시선은 '학교 너머'를 향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바뀌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만큼 우리는 학교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만들자"라는 <민들레>의 목소리가 교육에 관한 '뻔한 이야기'들에 갇혀 드러나지 않았던 '학교의 빈 곳'을 살피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편집자>


예술적 감수성

아이들 점심밥을 둘러싸고 어른들끼리 치고박는 사회에서 예술교육을 논한다는 것이 사치스런 일인 듯하지만 그럴수록 더 예술적 감수성이 절실함을 느끼게 된다. 구성원들의 감수성이 전반적으로 발달한 사회라면 아이들의 자존감을 배려하는 정책을 시행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감수성이 메마른 징표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예술적 감수성은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것이다. 예술성이 살아 숨쉬는 건축물을 보면서 자란 사람이라면 창고 하나를 짓더라도 허접하게 짓지 않게 된다.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슬라브 지붕 형태의 조악한 건물들이 들어선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다. 날마다 콘크리트 상자 같은 학교 건물을 보면서 자란 사람들이 보고 배운 대로 지었을 뿐이니. 안목이 있으려면 본때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공간이 곧 교사인 셈이다. 물론 그 공간을 만들고 아름답게 가꾸는 어른들의 작업 과정을 보면서 자란다면 더욱 훌륭한 교육이 될 것이다.

자기를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면서 공감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한다면, 이는 예술가로 불리는 특정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일상에서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표현과 소통, 공감의 능력은 감수성을 토대로 자란다. 감수성을 기르는 데는 거창한 프로그램이 필요하지 않다. 브랜드니 명품에 혹하지 않고 자신에게 어울리게 옷을 입을 줄 아는 것, 아이들에게 필요한 예술교육은 거기서 시작될 수도 있다. 어울리는 머리 모양을 스스로 결정하고 옷을 분위기에 맞춰 조화롭게 입을 줄 아는 것. 자기만의 멋을 낼 줄 아는 어른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면 그들을 보면서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그런 감수성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자기다움의 가치를 아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기본 토대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명품에 혹하고 성형수술이 만연하는 것도 자기다움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탓일 게다. 어린아이처럼 있는 그대로 당당하면 못생긴 얼굴도 아름다울 수 있건만, 아름다움에 눈먼 이들이 애써서 망쳐 놓는 것이 이 시대의 풍조인 듯하다. 이제는 강조차 제 모습대로 두지 못한다. 험난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감수성을 기르지 못한 때문일까. 먹고살 만해지면서 더 천박해지는 이 흐름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창의성이란 것도 감수성에서 비롯된다. 문화예술교육사 자격증 제도를 만들고 예술인 강사풀제 같은 정책으로 아이들의 창의성을 북돋울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면 어리석다. 음악, 미술 같은 교과목들이 오히려 아이들을 예술에서 더 멀어지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과 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가 잘 짜여진 예술교육의 결과물이 아니듯이, 문화와 예술은 기실 '교육'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교사는 가르치지 않는다'는 비노바 바베의 말은 문화예술 영역에서는 더욱 진실일 것이다. 교육만능주의의 함정을 조심할 일이다.

진짜 예술교육은 교육 자체가 예술이 될 때 가능하지 않을까. 예술교육을 넘어서 교육예술이 이루어져야 한다.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 가운데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최고의 교육예술일 것이다. 발도르프 교육은 그런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학교 공간은 물론 교사의 말투나 몸가짐에까지 아름다움이 배어 있을 때 예술교육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문화예술교육사가 따로 있기보다 모든 교사가 교육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잘살아 보세?'

몇 년 전부터 정부가 추진하는 문화예술교육 활성화 정책의 기본 패러다임은 '인적자원 개발'이다.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창의성을 개발하는 전략으로 문화예술교육을 바라보고 있다. 과거의 인적자원이 '말 잘 듣는' 국민이었다면 21세기의 인적자원은 '창의성 있는' 국민인 까닭이다. 결국 경제를 위한 것이다. '잘살아 보세'의 21세기판 리메이크인 셈이다.

그러나 문화예술 영역은 5개년 경제개발 하듯이 국가가 앞장서서 될 일이 아니다. 문화는 국민, 아니 국민이기 이전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신명이 살아날 때 저절로 꽃피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할 일은 사람들이 그렇게 펄펄 살아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생명력을 억압하지 않고, 타고난 신바람을 억누르지 않으면 된다. 창의성도 그럴 때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지, 목표로 삼고 쫓아가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명나게 배우고, 신명나게 놀고, 신명나게 일할 때 창의력도 터져 나오고 진짜 경쟁력도 생겨난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선착순 달리기를 시켜서 키우는 경쟁력은 별 볼일 없는 경쟁력이다. 중고등학교 학력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앞서는 아이들이 대학 가서 헤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아이들의 신명을 죽이는 교육환경을 그대로 둔 채 문화예술교육 활성화 운운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창의성을 원한다면 무엇보다 아이들 스스로 자기 삶을 기획하고 창조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 아이들의 시간을 다 빼앗아서는 촘촘한 시간표를 짜서 던져주고, 귀밑머리 3센티와 5센티의 차이가 교육의 질을 좌우한다고 믿는 한, 문화예술교육은 공염불이다.

문화예술교육에 예산을 쏟아부으면서 한편으로는 표현의 자유를 노골적으로 억압하는 자가당착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 정부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 않는 데는 돈도 들지 않건만. 포스터 한 장도 그냥 봐 넘기지 못하는 이 쫀쫀한 정부가 국민들의 신명을 살릴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다급한 기업들이 저마다 알아서 직원들의 창의성을 북돋우거나 인재를 수입해 올 테고 국가는 기업 경쟁력에 빌붙어 체면을 유지하려 들 것이다. 문제는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경쟁력이 높아진다 해서 우리 삶의 질이 높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화와 예술은 경제나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때문에 문화나 예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부는 문화예술 진흥도 고속도로 놓듯이 후다닥 해치우고 싶겠지만, 사람이나 과일이나 제대로 익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다행히 우리는 유달리 신명이 많은 피를 타고 났으니, 신명이 살아나는 사회환경, 교육환경을 만들면 문화예술은 저절로 살아날 것이다. 단기에 효과를 보는 일시적인 요법에 유혹되지 말고, 멀리 보고 땅심을 기르는 데 주력할 때다.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사회구성원 모두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한다면 문화예술은 밥만큼이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양식이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복지사회는 국가의 힘을 빌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국가에 기대하기보다 우리 스스로 그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 더 확실한 길일지도 모른다. 전세계적인 국가부도가 우려되는 오늘날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이 그렇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사회는 국가나 국제 차원의 사회가 아니라 지역 차원의 사회다. 지역보다 더 좁은 직장이나 교회, 마을 차원일 수도 있다. 최근 부도 위기에 처해 있는 그리스에서는 지역화폐가 국가화폐 못지않게 곳곳에서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고 한다. 밥과 예술은 국가화폐 없이도 서로 나눌 수 있다. 품을 나누면 국가보조금으로 사는 것보다 더 떳떳할 수 있다. 떳떳함은 살아가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다.

소박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는 구성원들의 감수성이 살아 있을 때 가능하다. 부탄왕국 같이 행복지수를 국민소득에 우선하는 지혜로운 정부를 둔 나라를 만드는 것도 결국 우리들 몫이다. MB정부를 선택한 우리 국민 수준을 생각할 때 요원한 감도 들지만 먼저 깨어난 사람들이 지역 차원에서 자구책을 만들어가야 할 때다.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는' 효율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의 가치에 눈을 떠야 한다. 아름다움 속에는 참됨, 조화로움, 선함 같이 세상을 지탱하는 좋은 가치들이 모두 녹아 있다.

예술성, 아름다움은 도시의 전시회장에나 있는 것이 아니다. 산비탈 다랑이논들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신명을 바친 농부들의 예술작품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모가 심긴 다랑이논들의 조화로움은 어떤 설치미술 작품보다 아름답다. 효율이라는 가치를 위해 포크레인으로 산을 깎아 네모반듯한 논을 만들면서 우리는 그 선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산 아래 강들의 선조차 망가뜨리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예술성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싶기도 하지만, 어른들의 감수성이 무딘 까닭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라면 이제부터 아이들의 감수성이라도 잘 기르고 볼 일이다.

도시든 농촌이든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돈이 있어야만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문화생활을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시골 빈집을 얻어 사는 박계해 선생처럼 "승용차를 타고 연주회에 가는 대신 마늘을 까면서 라디오를 듣겠다는 각오" 정도만 있어도 우리는 돈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술은 어디 멀리 연주회장이나 전시회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머리에 붙어 있는 눈과 귀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자. 감수성이 살아 있는 눈과 귀를 어떻게 기를 수 있을지 가까이에서 찾아보자.

▲ 시험공부에 지친 학생들의 모습을 학생 스스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런 활동을 통해 학생들은 자신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정보은
다른 존재를 애정을 갖고 관찰하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감수성이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풀 한 포기를 애정을 갖고 관찰하면서 그림을 그려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호철 선생이 아이들과 함께 작업한 '살아 있는 그림 그리기' 결과물들을 보면 관찰력이 자라면서 아이들의 그림이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툰 선 그림도 대상에 몰입해서 애정을 갖고 그렸다면 그 나름으로 아름답다. 풀 한 포기를 세심하게 관찰한 경험은 아이들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생기가 없어 보이면 지금 햇빛이 부족한지 물이 부족한지를 단번에 알게 된다.

잘 보고 잘 듣는 능력은 교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자질이다. 교육예술의 토대는 바로 이 감수성이다. 아이들의 상태를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과 포용력을 갖춘 교사를 길러내는 것이 대안교육의 우선 과제일 것이다. 이러한 교육예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안적인 예술교육이 필요하다. 구태의연한 예술교육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감수성을 기르는 예술교육이. 그리하여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신명나고, 그 신명이 아이들에게 전염되고, 그 속에서 아름다운 어른으로 함께 자라는 교육예술이 펼쳐진다면, 그 어떤 예술보다 인생을 걸어볼 만한 예술이 아닐까.

* 위의 글은 <민들레> 77호에 "예술교육과 교육예술"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현병호 발행인의 글입니다.(☞ <민들레>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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