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갈등만은 안 된다는 대답이 1대9 정도의 비율로 더 많이 나올 것이라는 데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두 그룹 사이의 거리는 아주 멀다. 다수파는 그동안 이념을 말하는 사람들을 사회분열을 조장하는 암적인 존재로 취급해왔다. 지긋지긋하고 골치아픈데다 사람들의 사이를 벌려놓는 것이 이념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념을 말하는 사람들은 빨갱이 취급을 당해왔다. 그런데 그 사람들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을 담은 책이 지난 7월말에 출간됐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 이진우의 "중간에 서야 좌우가 보인다"가 그 책이다. "대한민국 정치이념 지형도"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이 책을 열면 "이념이 살아야 정치가 부활한다"는 여는 글로 시작해서 기세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
"정치적 이념은 우리를 바람직한 미래사회로 안내하는 이정표입니다." (11쪽) "이념 없이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눈먼 장님이 길을 안내한다는 것과 같기 때문에"(12쪽) "우리가 정치적 판단의 척도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고민한다면, 우리는 좌우의 구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좌우는 정치적 지각과 판단의 좌표이기 때문입니다."(13쪽)
이데올로기의 나무는 언제나 푸르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이념을 중시하는 것일까. 이 책의 앞부분은 여기에 논점이 맞춰져 있다. 이미 1960년에 다니엘 벨의 저서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나왔으며 90년대에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이 출간됐다. 이 두 권 모두 미국인에 의해 쓰여졌으며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이 담겨있다.
저자는 미국학자들의 주장을 유럽학자의 말을 빌어 반론을 펼친다. 이탈리아 정치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는 이렇게 말했다. "이념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아있다. 과거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또는 새롭다고 주장되는 다른 이데올로기로 대체되고 있을 뿐이다. 이데올로기의 나무는 언제나 푸르다. 게다가 이데올로기의 소멸을 주장하는 것만큼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없다는 것도 거듭 증명돼 왔다."(36쪽)
이념의 시대의 종언은 사실은 좌파의 시대가 지나고 우파의 시대에 들어섰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이 점을 간파한 보비오는 이념의 종언이 또하나의 이념이라고 지적했다.
저자는 "정치적 이념의 좌우구별은 우리가 왼손과 오른손을 함께 사용하는 인류로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위대한 이원론"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좌우이념에 대한 이처럼 명료하고 탁월한 비유를 일찍이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이념을 증오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그 이유는 이념이 인간 존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왼손 오른손이라는 인간의 생래적 조건에 근거를 두지 않았다면 좌우이념의 생명력이 그처럼 강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면 육체와 정신의 이원론에 이른다. 그것은 물질이 본질이냐 정신이 본질이냐는 물음이다. 좌우이념은 18세기에 탄생했지만 그 시원은 그리스 로마시대의 유물론과 유심론이 아닌가. 인류 문명의 출발점부터 좌우이념이 같이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좌우이념의 기능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갈 것인가에 관한 좌우의 경쟁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해 나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의 생산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은 다름 아닌 좌파와 우파의 이념대결과 이념 경쟁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시대에는 이념에 대한 수많은 오해가 난무한다. 저자도 그중에 하나인 안철수의 발언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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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이념은 정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인가? 안철수는 이런 멋진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외국서 보수 진보 논의는 20년 전에 이미 끝났다. 보수와 진보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만 있을 뿐이다.'"(30쪽)
안철수의 말이 맞다면 이진우의 논리가 무력화되어서 그는 비상식적인 발언 또는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이런 멋진 말"이라니... 이념적 구분에 대한 우리사회의 반감이 얼마나 큰지, 이에 대한 인식이 절실하지 못한 것 아닐까. 그러나 이념 구분에 대한 경시가 2차적 혼란을 낳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가난으로부터 탈출하려고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베이비붐 세대를 기다리는 것은 성장의 열매가 아니라 노후의 가난입니다. (...) 우리의 삶과 현실에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52쪽)
저자는 정치를 멋있게 하려는 사람들은 좌파와 우파의 구별조차 진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념갈등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정치적 이념조차 폐기해버린 것 아닌가라고 묻는다. 왜 그런 것일까. 좌우는 새로운 참신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늘 단조롭다. 지루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곧 싫증을 낸다. 위에서 언급한 베이비붐 세대의 어려움의 해법을 말할 때도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전문가들은 대안을 말하면서 기존의 진보가 문제가 있다면서 새로운 진보, 진보의 재구성, 진보 이후 등의 현란한 담론을 제시한다. 여기에 가까이 가보면 아주 복잡한 언어체계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좌우이념은 누구나 알 수 있게 분명히 말해준다. 베이비붐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곧 복지이며 그것은 좌파의 가치라고.
극좌 극우에서 좌파적 우파 우파적 좌파로
저자는 책의 앞부분에서 좌우이념 구분의 효용과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지만 이 책의 최종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본격 주제를 말하기 위한 전제이다.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좌우의 사이에 있는 중간지대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따로 노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좌우와 중간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 통찰을 보여준다.
"중도가 위험하고 어려운 까닭은 중도가 좌우의 양극단에 둘러싸여 있을뿐만 아니라 좌우의 지속적 대결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좌우가 있어야 중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중간은 끊임없이 좌우의 구별이 필요합니다. 사실 좌우 없는 중간이란 있을 수도 없지만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41쪽)
중도를 말하기 위해서 좌우를 먼저 언급한 이유가 이해된다. 좌우가 있어야 중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진전된 논리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좌파이지만 우파의 문제의식을 인정하는 '우파적 좌파'와 우파이지만 좌파의 대안을 포용하는 '좌파적 우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나는 좌파야' 혹은 '나는 우파야'라고 분명히 밝히면서도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건강한 '정치적 중도문화'를 꽃피울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희망과 바람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16쪽)
그의 메시지를 한 줄로 줄이면 이렇게 된다. 우리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극좌 극우의 대립구도에서 중도좌 중도우가 맞서는 구도로 가야한다. 어찌보면 당연해 보이는 이 메시지를 입증하고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정치철학적 사유활동을 계속한다.
그 성과로 우리 정치의 궁극적인 목표가 "중도를 위한 싸움"이라는 인식에 이른다. 양극단에서 가운데로 조금씩 나오는 행보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중도에 서야 상대방의 입장이 이해되고 유연한 태도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메시지이며 극단적 이념갈등의 해법이다. "중간에 서야 좌우가 보인다"는 책 제목도 이것을 가리킨다.
정치의 목표는 중도를 위한 싸움인가
여기서 논쟁적인 지점이 발견된다. 저자 논리의 보완 차원에서 문제제기를 해보겠다. 극좌 극우를 극복의 대상으로 본다면 그 이념 지지자들은 무언가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들인가. 극단파들이 힘이 세서 우리사회를 쥐락펴락하는 것이 문제이지 그들 존재 자체가 극복대상인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합당한 만큼의 몫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강준만 교수가 언젠가 안티조선운동의 핵심은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극단과 중간의 문제를 우리 현실 속의 사례로 설명해보자. 통합진보당 구당권파가 권위적이며 비민주주의적인 행태를 보인다고 해서 그들을 멸종 대상으로 보는 것이 옳은가. 그런 입장은 반공주의와 다르지 않다. 극좌파가 그런 행태를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들은 본래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극좌파라고 하지 않고 진보라고 부르는 데서 생긴 언어의 착시효과가 지금의 혼란을 만들어낸 것 아닐까. 그렇게 보면 지금의 떠들썩한 통합진보당 사태는 헛소동에 불과하다.
우리사회에는 소수 극좌의 반대쪽에 비대한 규모의 극우파가 있다. 이들도 역시 민주주의 원칙을 잘 따르지 않는다. 너무 큰 극우는 줄이고 너무 작은 극좌는 키워서 가장 교과서적인 모델 만들기를 최종적인 목표로 세워야 하지 않을까. "중도를 위한 싸움"은 그 도정에 이르기 위한 한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과서적인 모델의 실례는 서구나라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 정치의 경우 이념 스펙트럼 상 극좌 중도좌 중도우 극우 등 네가지의 포스트가 설정돼 있다.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가장 많은 지지를 받으며 서로 정권을 주고받는다. 극좌와 극우는 보완적인 역할에 머문다. 그러면서도 네 개의 포스트마다 하나씩의 정당과 신문이 서있어 이념 단위의 공동체가 만들어져있다.
또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우리사회가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볼모잡혀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극좌와 극우인가 하는 점이다. 여당과 야당은 전통적으로 극우와 중도우가 맞서는 구도였으며 좌파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의석을 얻은 것은 지난 17대국회가 처음이었다. 그러므로 격렬한 사회갈등은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아니라 미국식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립이었다. 그래서 이념의 차이로 인한 갈등보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 태도가 본질적인 문제라는 의견도 있다.
저자가 말하는 중도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사회에서 적지 않은 논의가 이뤄져왔다. 김진석 교수는 "우충좌돌" 중도론을 설파해 많은 관심을 끌었으며 백낙청 교수는 변혁적 중도주의를 내놓았다. 한국일보 이종재 전 편집국장은 몇 해 전 중도를 표방하는 편집방침을 내세운 바가 있었다. 그들의 중도와 이진우 교수의 "건강한 정치적 중도문화"는 어떻게 같고 무엇이 다른가. 여기에 대해서는 별도로 따져 볼 기회가 있기를 기대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변적인 이론만을 내놓은 것이 아니다. 이 책은 7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여기서는 첫 번째 장 "중간에 서야 좌우가 보인다"에 서술된 논리를 살펴봤다. 이 책의 본문은 "중도를 위한 싸움"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여섯 개의 생생한 현장은 다음과 같다. 제목만 붙이는 사정을 이해바란다. ▲자유인가, 평등인가? ▲성장인가, 분배인가 ▲'규모'의 경제인가, '균형'의 경제인가? ▲'자율적 복지' 인가, '보편적 복지'인가? ▲'중앙 집중'인가, '균형 발전' 인가? ▲통일, '민족 공동체'인가, '자유민주 체제'인가?
끝으로 이 책을 펴낸 관계자들께 한마디 붙인다. 지금 진보 보수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구분으로 충분하다는 안철수 교수의 발언이 우리사회에서 지배적 담론으로 서있다. 안철수는 세상을 진보와 보수로 보는 것은 "머리 나쁜 사람들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벌레"라는 비하적인 표현도 사용했다. 그런 마당에 좌우 구분의 유효함을 주장하는 이 책의 출간은 안철수에 대한 도전이고 도발이다. 그럼에도 시대의 흐름에 압도되어서 미미한 소리를 내고 잦아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이 책의 메시지가 우리사회에서 의미있는 목소리로 전달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출판사는 토론회나 북콘서트 같은 이벤트를 만들고 이진우 교수가 직접 대중을 만나는 것도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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