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미국 영화들은 방향을 잃어버렸다. 미란다 줄라이 감독의 <미래는 고양이처럼(The Future)>(2011)에서 드러나듯이 근대적인 일상에 찌든 미국인들의 삶과 사유 속에서 미국의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의 미국 영화들은 미셸 아자나비슈스의 <아티스트(The Artist)>(2011)나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2011)처럼 1920년대의 헐리우드나 1920년대의 프랑스 파리라는 근대적 과거의 환상으로 도피하거나, 혹은 페르난도 트루에바 감독의 <치코와 리타>(2010)처럼 근대의 이국적인 취향에 함몰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영화들은 마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탈리아나 프랑스 혹은 독일이나 일본의 영화들처럼 하나의 과도기적인 현상들일 것이다.
▲ 영화 <케빈에 대하여> ⓒ티캐스트 |
케빈(에즈라 밀러 분)은 누구인가? 케빈은 지난 7월 19일 미국 콜로라도 주 한 극장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지난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주인공 한국계 미국인 조승희이기도 하며, 또한 2005년 미국 북부 미네소타 주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케빈과 같은 청소년이나 대학생들에 의해 미국에서 매년 일어나는 총기난사 사건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침범한 이래로 미국 사회가 여전히 지난 서구적 근대의 500년 동안 지속되었던 총기 소유를 합법화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지난 서구적 근대의 500년 동안 지속되었던 근대적 교육과 사회가 콜럼버스나 '로빈슨 크루소(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와 같은 근대인을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나 로빈슨 크루소, 그리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발견했다고 역사 교과서가 가르치고 있는 바스코 다가마(실제로는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그들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아프리카인들에게 무차별적인 총기난사를 감행하였다. 그러한 총기난사를 통하여 그들은 영웅이 되었다. 또한 미국 할리우드의 근대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영웅적인 총잡이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개척이라는 근대적 명제를 통하여 합법화되었다. 오늘날 그러한 미국 근대인들의 합법적인 총기난사는 인권수호라는 이름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케빈은 오늘날의 21세기에 살고 있는 콜롬버스이며, 로빈슨 크루소이며, 또한 바스코 다가마이거나 바르톨로뮤 디아스이다. 소위 지구촌 시대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21세기에 미국 사회에서 케빈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이유는 지난 근대적 과거에는 기독교나 문명, 혹은 고급문화나 자유주의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던 서구적 근대의 교육과 사회가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서구적 근대를 수호하고자 하는 교육과 사회로 연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00년 동안 이루어진 근대적 과거에는 기독교나 문명, 혹은 고급문화나 자유주의 인권이 서구적 근대의 자본과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후기 근대에는 오직 개인의 능력만이 근대적 자본과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고 교육하고 가르치는 신자유주의 교육과 사회만이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근대적인 가족과 학교, 그리고 대학의 학문과 사회를 지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케빈과 같은 근대적 의미의 무차별적인 살육, 영웅적이고 고상한 방식의 자살,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하루에도 수만, 혹은 수십만 건으로 발생하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의 폭력과 폭언 등등을 일삼는 영웅적인 근대인들을 재생산한다.
II. 모성애와 근대성
영화 <케빈에 대하여>여 등장하는 케빈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와 같은 대한민국의 어떤 청소년을 포함한 오늘날의 세계에서 근대인의 모범이 되고 있는 콜럼버스와 바르톨로뮤 디아스, 혹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전형적인 근대인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마치 하멜이 제주도를 발견한 것이 아닌 것처럼 콜럼버스는 아메리카의 끝자락을 여행한 것이고,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아프리카의 끝자락인 희망봉을 여행한 것이다. 하멜이 우연히 제주도에 표류한 이후로 당시의 수많은 제주도 사람들이 하멜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처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혹은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를 여행한 이후로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에 대하여 이야기했을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모를 뿐이다. 따라서 <하멜 표류기>에 등장하는 하멜과 같은 '로빈슨 크루소'가 소설가 다니엘 디포의 발명품인 것처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나 "바스코 다가마의 아프리카 희망봉 발견"은 서구적 근대의 발명품이다. 마치 뉴턴의 "만유인력의 발견"이 그 시대의 과학을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패러다임 속으로 가두어 놓았듯이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가마의 '발명'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포함한 지구촌 세계의 삶과 지식을 근대적 서구 유럽의 세계관 속에 가두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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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나 "바스코 다가마의 아프리카 희망봉 별견"이 서구적 근대의 지리적이거나 역사적인 발명품인 것처럼 천부적인 '모성애라는 관념은 동아시아의 유교적 가부장주의와 마찬가지로 근대의 가부장적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의의 발명품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모성애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케빈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에바(틸다 스윈튼 분)의 삶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에바의 직업은 과거의 콜럼버스나 바르톨로뮤 디아스처럼 여행가이다. 과거 남성의 몫이 오늘날 여성의 몫으로 확대되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과거 남성의 몫이 오늘날 여성의 몫으로, 과거 서구 백인의 몫이 오늘날 동아시아 한국인을 포함한 비서구 유색인의 몫으로 확대된 것과 더불어 새롭게 형성되어야 할 사회와 국가 그리고 교육과 인식은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전히 근대적인 제도와 사회체제 속에서 여성적 삶의 확장은 여성의 삶이 남성의 삶으로 강요받는 것이고, 비서구 유색인들의 삶의 확장은 그들의 삶이 서구 백인들의 삶으로 강요받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을 잃어버리고 남성이 되며, 지리적인 동아시아와 한반도를 잃어버리고 서구 유럽인이나 미국인이 되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의 미국인이 지리적으로 서구 유럽과 다른 아메리카 대륙의 아메리카인이 아니라 서구 유럽의 백인이라고 착각하듯이 말이다.
<케빈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에바는 마치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걸리버가 여행에서 돌아와 여성의 삶을 경멸하듯이 현실의 삶에서 드러나는 근대적 여성의 삶을 경멸한다. 그녀의 주위에서 근대적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삶을 살고 있는 이웃들은 모두 그녀가 책임져야만 하는 삶의 적이다. 돈을 벌어야만 하고 자신의 삶도 책임지기가 벅찬데 새로 태어난 아이의 삶도 책임져야만 한다. 그녀의 아이, 케빈은 마치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가마처럼 여행을 하며 오늘날 미국이 책임지고 있는 근대적인 서구적 질서 속에서 지역적 특이성으로만 존재하는 지구촌의 다양성을 즐기는 그녀의 자유로운 삶을 뉴욕으로만 한정되도록 만든 원인이다. 마치 오늘날의 서울처럼 뉴욕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뉴욕은 최소한 근대적인 미국의 서구적 질서 속에서 서구인이 되고 백인이 된 수많은 비서구 유색인 여성들이 그들의 인종적이고 지역적인 특이성으로만 존재하는 지구촌의 다양성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케빈의 공격적인 성격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선택한 교외의 전원주택은 더더욱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미국 중산층 가족의 삶과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기의 꿈이었던 여행가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지도를 자신만의 방에 도배하지만 아름답지 않다고 주장하는 케빈에 의하여 무참하게 뭉개진다.
에바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된 것처럼 케빈은 이미 아이나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 남성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사회와 교육 속에서 에바처럼 똑똑한 여성이 이미 남성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케빈처럼 똑똑한 아이가 이미 어른이 되는 것과 같다. 미국의 신자유주의 교육과 사회를 모방하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똑똑한 아이는 벌써부터 어른이 되고, 똑똑한 여성은 벌써부터 남성이 되며, 똑똑한 지식인들은 벌써부터 서구 유럽인이 되거나 미국인이 되지 않는가? 이미 어른이 된 케빈은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가마 혹은 로빈슨 크루소처럼 영국의 전설적인 영웅 '로빈 후드'가 되고자 한다. 그의 엄마나 아빠, 혹은 그가 다니는 학교나 미국 사회가 그가 '로빈 후드'가 되는 것을 장려하고 고무시킨다. 삶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개인적인 발명의 영웅만을 강조하고 가르치는 근대적인 가족과 근대적인 교육과 근대적인 사회는 케빈이 로빈 후드가 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총기류 따위는 너무 일상적이다. 그래서 케빈은 로빈 후드처럼 전통적인 활을 선택한다. 뛰어난 개인이 이 시대의 의적, 로빈 후드가 되는 길은 자신의 삶을 위협하고 자신의 삶을 빼앗으려고 하는 적대적인 사회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것밖에 없다. 콜럼버스와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기독교를 위하여 그랬고, 19∼20세기에는 서구 문명을 위하여 그랬던 것이 이제는 오직 개인의 삶만을 위하여 근대적 영웅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III. 탈근대적 케빈을 위하여
미국 사회의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이미 그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감옥에서 케빈을 면회하면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있는 에바는 케빈을 낳고 현실의 미국적 삶을 시작하면서 "프랑스에서 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프랑스는 여성이 남성이 되어야만 하고, 비서구 유색인이 서구 프랑스인이 되어야만 하는 탈근대의 사회 속에서 그들이 여성적 삶과 비서구적 삶과 유색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즉 남성이 여성이 되고, 서구 백인이 비서구 유색인이 될 수 있는 탈근대적 사회제도와 교육제도를 갖추고 있다. 에바의 소망과는 달리 미국의 현실 속에서 에바는 미국적 삶에 충실했다. 에바는 열심히 살았고, 자신의 아들인 케빈을 사랑했다. 그러나 케빈은 그녀가 또한 사랑하는 그녀의 남편과 그녀의 딸을 살해하고, 그녀가 사랑하는 미국 사회마저도 난장판을 만들어놓았다. 누구의 죄인가?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에바를 단죄할 것인가? 아니다. 모성애가 사회적 산물인 것처럼 영웅이거나 악인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콜럼부스와 바르톨로뮤 디아스,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를 지난 과거의 인물로 돌려놓아야만 한다. 그리고 미국은 프랑스처럼 이제 더 이상 세계 경찰국가의 근대 제국주의 국가의 역할을 포기하고 지구촌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구성원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그것이 오늘날에도 수없이 자라고 있는 근대적인 케빈을 탈근대적인 케빈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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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해서 이야기해야만 하는" 미국의 미래는 미국인들의 몫이다. 문제는 스스로 무너져가고 있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사회와 교육을 모방하여 여성이 여성이 될 수 없게 만들거나 수없이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신자유주의의 무조건적인 경쟁과 개인의 능력만을 강조하는 이 나라, 대한민국의 사회와 교육이다. 이 대한민국의 근대적 에바는 미국의 근대적 에바처럼 서구 유럽과 아프리카와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 등등의 여행을 꿈꾸면서 신자유주의의 경쟁이 강요하는 돈의 노예가 되어 있고, 대한민국의 케빈은 미국의 근대적 케빈이 로빈 후드를 꿈꾸는 것처럼 임꺽정이나 돈키호테를 꿈꾸면서 그 증오의 화살을 자신이 사랑하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이 사회와 학교에 조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 케빈에 대해서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것은 근대적인 과거나 유교주의의 도덕 교육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프랑스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베네수엘라 등등과 같은 나라들처럼 남성이 여성이 되고, 어른이 어린이가 되고, 지식인이 노동자가 되고, 남한이 북조선이 되고, 서구 유럽이 아랍이나 아프리카가 될 수 있는 모든 개체가 지니는 생명의 동질성 속에서 관계의 다양성을 살 수 있게 만드는 탈근대적 교육과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대학개혁과 교육개혁 그리고 사회개혁은 그러한 개체의 풍요로운 삶 속에서 어떻게 대환민국이 탈근대적 사회와 국가를 만드느냐에 관한 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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