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교수가 지시한 쪽을 찾아가 봤더니 이중개념주의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안 교수가 읽어보라고 지시했음직한 구절이 눈에 띈다. "권위주의적인 진보주의가 있을 수 있는가? 한마디로 그럴 수 있다. 한 가지 이유를 대자면 수단과 목적이 상이한 경험영역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18쪽)
진보적인 목적을 지녔지만 권위적 보수적 수단을 사용하는 진보주의가 있다는 것이다. 레이코프는 이를 "권위적인 반권위주의자"라고 표현한다. 구체적으로 이런 예를 든다. 노조지도자 중에는 위계적이고 징벌적인 수단을 사용하지만 진보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전투적인 활동가'들도 바로 그렇다고 말한다. 권위적인 수단으로 진보적인 목표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통합진보당의 구당권파가 이 규정에 잘 들어맞는다. 레이코프는 자신의 이론인 이중개념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든 이야기인데 지금의 한국 상황을 해설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닌가 할 정도로 상황이 일치한다.
이중개념주의라는 생소한 개념은 이미 레이코프의 다른 책 "프레임전쟁"에서 상세하게 소개돼 있다. 그래서 "폴리티컬 마인드"가 마치 이 책의 개정증보판인 듯하다. 레이코프가 이처럼 강조하는 이중개념주의는 무엇인가. 그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자칭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국내정치에서는 진보적이지만 외교정책에서는 보수적이거나, 경제정책에서는 보수적이지만 다른 모든 문제에서는 진보적일 수 있다." (113쪽)
안철수 교수가 지난해부터 역설해온 발언과 한 치의 다름도 없어 놀라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이중적 현상에 대한 해석은 정반대다. 안 교수는 상반된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므로 진보 보수 구분이 무용해졌다고 단언했지만 레이코프는 상반된 두 가지를 동시에 갖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고 말한다. 레이코프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이중개념주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토요일 밤 가치체계와 일요일 아침 가치체계의 사례를 떠올려 보자. 동일한 사람이 토요일 밤에는 양심의 가책 없이 행복하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도박을 하고 술에 흠뻑 젖고 매춘을 할 수 있지만, 일요일 아침에는 정반대의 가치를 진정으로 신봉할 수 있다. 뇌 덕분에 인간은 이렇게 할 수 있다." (115쪽)
레이코프의 일련의 저작이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정치학이 아닌 인지언어학을 전공한 학자이다. 인문학자로서 정치를 바라보기 때문에 갖게 되는 한계와 장점이 있는데 그 장점중 하나가 사람들의 이야기로 말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언급한 토요일 밤 체계와 일요일 아침 체계는 이 책에서 더 생생한 이야기로 발전한다. 토요일 밤에 정부(情婦)와 즐기는 사람이 일요일 아침에는 부인과 교회를 나간다. 어떻게 인간은 이처럼 상반된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레이코프는 이렇게 묻는다. "토요일 밤 가치와 일요일 아침 가치를 갖고 있는 사람은 위선자 아닌가? 그의 일요일 아침 가치가 토요일 밤에도 적용되어야 하지 않는가?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에 일관성을 유지한다면 고결한 인간이고 그렇지 않으면 위선자인가?" 이미 그의 물음에 답이 들어있다. 인간의 뇌는 두 가지 다른 가치체계가 가능하도록 뒷받침해준다. 그는 이중개념주의를 이렇게 입증한다.
레이코프는 또 진보와 보수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많은가에 따라서 "부분적 보수주의자" "부분적 진보주의자"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한다. 진보주의자가 부분적으로 보수를 갖고 있으면 부분적 보수주의자이고 보수주의자가 부분적으로 진보를 갖고 있으면 부분적 진보주의자이다. 레이코프는 이 책에서 미국정치인들 중에 이중개념주의자들을 소개한다.
"'미스터 보수'인 베리 골드워터는 외교 군사 경제정책에서는 일반적인 보수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지만, 미국 원주민의 권리나 종교, 군대 내 동성애자, 통치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진보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114쪽)
미국의 유명한 보수주의자가 진보적인 견해를 표했다. 골드워터는 1964년 대선에서 공화당내 진보파를 누르고 대통령 후보에 지명됐다가 초보수적 정견을 내세움으로써 민주당 후보인 린든 존슨에 큰 표차로 패한 사람이다. 그는 동성애자도 군대생활을 잘할 수 있다면서 "명사수가 되기 위해 이성애자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중개념주의자이며 부분적 진보주의자이다.
그러면 위에서 소개한 이중개념주의로 우리의 이야기를 설명해보자. 통합진보당 구당권파는 진보이면서도 권위적이며 비민주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더 이상 진보가 아니라고 말한다. 진보는 권위적인 것을 배격하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이코프는 이 같은 한국사회의 통념을 뒤집는다. 그의 이중개념주의 이론에서는 그런 상반된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경제문제는 진보 안보문제에 대한 입장은 보수라고 발언했던 안철수 교수나 통합진보당 구당권파 이석기 의원이 모두 이중개념주의로 설명된다. 전혀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레이코프의 이론에서는 동격으로 취급된다.
이석기가 왜 이중개념주의자인가는 앞서 설명한 '전투적인 활동가'의 행동양식으로 설명된다. 그는 오랫동안 진보진영에서 사회변혁을 위해 활동해왔다. 그런데 부정의혹을 받고 있는 비례대표 당내경선을 통해 당선됐으나 의원직 사퇴를 거부한다. 심지어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라는 말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그가 진보와 보수 두 가지 상반된 가치체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안병진 교수는 바로 이같은 점에 착안해 통합진보당 구당권파의 행태가 이중개념으로 설명된다고 본 것이다.
▲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
레이코프의 시각과 비교되는 보비오의 관점을 살펴보자.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에 따르면 극좌나 극우와 같은 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민주주의적이기보다 권위주의적이다. 보비오에 따르면 통합진보당 구당권파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는 좌파적인 성향이 강해서 생긴 일이다. 진보의 부족 때문에 생긴 일로 보는 레이코프의 관점과 대조적이다.
레이코프와 보비오의 관점이 통합진보당 사태의 해석을 두고 엇갈린다. 그러나 어느 쪽이 맞고 다른 쪽이 틀린 관계는 아니다. 두 가지 모두 통합진보당 구당권파를 이석기를 이해하는 방법론들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관점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진보는 좋은 것인데 진보가 왜 그런 나쁜 짓을 하나? 그러니 그들은 진보가 아니다. 이런 단순하고도 강력한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박상훈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는 통합진보당 새로나기 위원회가 지난달 주최한 토론회에서 "좌파가 민주주의에 적응하는데 100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통합진보당 구당권파를 이해하는 또 다른 관점이다. 그의 말은 극좌파가 중도좌파로 이동하는데 100년이 걸렸다는 의미로 들린다. 레닌과 스탈린 모택동이 활동하던 시대에서 지금 독일의 사민당이나 영국의 노동당과 같은 중도좌파가 지배하는 시대로 이동하기까지 걸린 시간의 길이를 100년이라는 메타퍼로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요즘 한국에서는 통합진보당 구당권파를 이석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이것은 좌파 또는 극좌파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또는 배척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발언과 논의가 충분치 않은 것같다. 레이코프나 보비오와 같은 외국학자들 이론까지 빌어서 설명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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