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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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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86>

임칙서와 아편전쟁 (2)

아편이란 단어는 opium을 중국 발음으로 바꾼 외래어이다. 지금이야 아편이라 하면 법적 단속 대상이지만, 예전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아편을 규제한 것은 1914년의 일이었다.

아편을 중국에선 앵속(罌粟)이라 한다. 원래 치료용으로 일부 사용했던 모양이나, 상당히 보기 드문 물질이었다. 명나라 때에는 치료제로서 소량이나마 정식 수입이 되었으나, 기호품은 아니었다. 그런 것이 청대에 와서 대만으로부터 말라리아 진통제로서 들어온 것이 장사꾼들에 의해 장수의 비약으로 선전되면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아편은 수면제와 최음제로서 널리 퍼졌는데, 청 조정은 아편 수입을 금하고 있었기에 들어오려면 결국 밀수를 통하는 방법이었다. 다량의 밀수는 당연히 항구관리들과의 결탁과 비호 아래 성행한 것이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무역 적자를 타개하기 위해 인도의 벵갈 지방에서 생산된 아편을 중국에 밀수출하기 시작한 것이 지나친 성공을 거둔 바람에 문제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의 은화가 모조리 유출될 지경에 달하자, 청나라 조정은 이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진 것이다.

당시 유일한 대외 교역항은 남쪽의 광주였는데 얼마나 밀수가 성행했는지 광주로 벼슬길을 떠나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축하해주었다고 한다. 아편 밀수 묵인으로 큰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 이치가 그렇듯, 공무원이 뇌물을 받으면 일부를 상납함은 당연한 일, 황제는 아편밀수 엄금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조정 내에는 합리적인 선에서 풀어주자는 세력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었다.

임칙서는 임지에 부임하자 당시 광주 앞 바다에 떠 있던 아편밀수선에 실린 모든 아편들을 몰수해서 폐기처분해 버렸다. 1839년 5월의 일이었는데, 무려 1,425 톤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아편이었다. 오늘날 히로뽕 1 킬로그램이 수십억을 호가한다는 것을 참조하면 실감이 갈 것이다.

이에 영국은 시비를 걸어 사단을 일으켰다.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된 것은 1839년 11월 3일이었다. 역사에는 천비해전이라고 되어있는데, 영국 군함 두 척이 20척의 청 해군-주로 정크선-과 교전한 것이다. 사실 큰 전투는 아니었지만 역사가들은 아편전쟁의 시발점을 이 전투로 보고 있다. 기해(己亥)년 갑술(甲戌)월의 일이었다. 특히 11월 8일부터는 을해(乙亥)월이니 사정은 안 봐도 뻔하다.

즉 기해(己亥)년 을해(乙亥)월이다.
영국의 힘을 말해주는 을목(乙木)이 년과 월, 두 개의 해수(亥水)로부터 힘을 받아 기토(己土)를 공격하고 있다. 중국은 토의 나라이니 망가질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영국은 이에 중국을 확실히 손봐주기로 마음먹고 다음 해 2월에 파병을 결정했고, 4월 경진(庚辰)월에 원정군의 군비지출 건을 놓고 의회에서 찬반 투표가 있었는데 찬성 271, 반대 262로 간신히 승인이 났다.

자유당 내각이었는데 야당인 보수당의 글래드스턴은 이처럼 마약 밀무역을 보호하기 위한 수치스런 전쟁이라는 불명예를 영국이 지게 된다고 강렬히 반대했다.

전 세계의 바다를 지키던 16척의 막강 영국 함대는 싱가폴 항에 집결하여 1840년 6월에는 광주를 공격하지 않고 지나쳐서 중국의 주산열도로 들이닥쳤다. 처음부터 청 해군의 힘을 무시했던 영국 함대는 북상하여 오늘날 상해 앞 바다에 위치한 주산열도의 해군 기지인 정해(定海)포대를 공격했다.

참고로 중국의 지명 중에서 바다를 지키는 해군 기지나 포대가 있는 곳은 이처럼 정해(定海), 즉 바다를 안정시킨다는 뜻이나 위해(威海), 바다에서 위용을 떨친다는 식으로 되어있다. 나중에 보면 알게 되듯이 청일 전쟁에서 청 해군이 전멸한 곳이 바로 위해(威海), 앞 바다였다, 오늘에 와서는 인천-위해간 페리가 운항 중이다. 우리나라의 진해 군항 역시 바다를 진무(鎭撫)한다는 중국식 표기이다.

영국 해군이 포대를 점령한 후 포대에 놓인 대포를 보니 ‘Richard Philip 1601’이라는 명문(銘文)이 박혀있었다. 무려 24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니 최신예 장비와 함포로 무장한 영국군이 이를 보고 청 해군의 무력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비웃었으리라.

영국 원정대는 다시 해안을 따라 상승하여 8월 갑신(甲申)월에 가서는 급기야는 북경의 문턱인 천진 항에 그 위용을 들이대었다. 임수(壬水)의 나라인 영국이 갑목(甲木)을 보니 다시 한번 힘을 떨치고 있었던 것이다.

남쪽 저 먼 항구에서의 일이라 안이하게 대처했던 청 조정은 갑자기 당황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사는 바로 앞까지 쳐들어왔으니 그럴 법도 했겠다. 그만큼 영국 해군이 광주를 공격하지 않고 직상하여 천진을 노린 전략이 멋지게 먹혀든 셈이다.

사실상 전쟁은 여기서 끝난 것이나 진배없었다. 청 조정은 일단 임칙서가 일을 키웠다고 덮어씌워서 좌천시킨 후, 협상에 나섰다. 당초부터 아편 엄금론에 반대했던 직예총독 기선(琦善)이 협상 대표로 나서 영국 측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임칙서가 애써 구축해 놓았던 각종 군대와 방어시설들을 모두 없애버렸다.

하지만 양이(洋夷)들은 한술 더 뜨는 것이었다. 이번 기회에 영국은 아예 중국 통상을 가로막는 각종 제약 사항들을 모조리 없앨 심산이었다. 영국 측은 압력을 가하기 위해 다시 전투를 재개했고 마침내 더 견디지 못한 청 조정은 1842년 8월, 임인(壬寅)년 무신(戊申)월에 가서 이른바 남경조약이 영국 군함 콘월즈 호에서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홍콩이 할양되었고, 몇 개의 항구가 전면 개방되었으며, 아편몰수에 대한 배상으로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했다.

이 때 있었던 기가 막힌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겠다.

기선(琦善)의 협상이 실패하자, 청 조정은 세 사람의 장군을 파견했는데 그 중에서 양방(楊芳)이라는 역전의 맹장이 있었다. 그는 영국군의 포격술이 귀신같이 정확하다는 말을 듣고 점술사와 상의를 했다.

그랬더니 점술사는 적군 진중에 주술사가 있어서 그런 것인데, 그 요술을 타파하려면 부인네의 오줌이 해답이라고 말하면서 부인네의 요강을 대거 수집하여 적진 쪽으로 아가리를 향하게 하면 적의 요술이 통하지 않는다는 비책(秘策)을 제시했다. 그 말에 양방 장군은 수 천 개의 부인네들 요강을 일러준 대로 진 앞에 설치했다고 한다. 효과가 있었겠는가!

아무튼 이런 웃기는 일이 벌어질 당시 우리는 이른바 세도정치가 한창이었다. 일본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막부 나름으로 천보개혁을 단행하는 등 어려운 노력을 경주했지만 결국 별무성과였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아편전쟁을 전해 듣고 그 대비책으로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아편전쟁 후 약 10년이 지나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에 일본 앞 바다에 나타나자 그것이 시발이 되어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으니 일본 내부의 대응 탄력이 그만큼 강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반면 우리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 이로부터 한일간에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임칙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신강(新彊)이라는 서녘 멀리 후미진 시골로 좌천 길을 나선 것은 1841년 신축(辛丑)년 을미(乙未)월의 일이었다. 신금(辛金)이 그의 활동력인 식신(食神) 을목(乙木)을 누르니 의지가 좌절된 것이다. 그리고 대운 역시 경인(庚寅)운이라 더 이상 뜻을 펼칠 기회가 없어져 버렸으니 사실상 여기서 그의 운은 끝이었다.

좌천 길에 임칙서는 선남시사의 멤버인 위원(魏源)을 만나게 된다. 보통 중국의 지식인처럼 그 역시 당초에는 서양 사정에 어두웠으나 광주에 부임하여 일을 하면서부터 그는 빠른 속도로 서양의 힘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낡은 영국 군함을 한 척 사서 그 얼개를 뜯어보기도 하고, 부하 중에 영어를 아는 이가 있어 그를 통해 서양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아편 밀수를 막는 것은 실패했지만, 그는 서양을 배워야 한다고 자각했고, 번역된 자료와 정보들을 문장에 능한 위원을 만났을 때 모조리 건네주면서 책을 펴도록 독려하고 비용도 대주었다.

위원은 임칙서의 우국충정을 깊이 이해하고 열심히 책을 편찬하여 1년 반 만에 ‘해국도지(海國圖誌)’ 50권을 탈고했다.

앞의 글에서 말한 바 있지만, 이 책은 청나라를 드나들던 역관 오경석을 통해 조선으로 유입되어 일부 뜻있는 인사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읽히다가 결국 조선 개화사상의 발단이 된다. 그러나 일본은 조금 달랐다. 일본에서는 이 책이 입수된 다음 몇 년이 안 가서 아예 판각본으로 대량 출판한 덕분에 여러 식자층에 널리 읽혔으니 일본은 나름대로 세상일에 눈을 뜨고 있었다고 하겠다. 역사를 보면서 늘 필자를 열 받게 하는 대목이다.

임칙서의 역사적 소명은 이로써 끝이 났지만, 워낙 신임이 두터웠던 사람이라 다시 1847년에 운남과 귀주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도광제의 서거에 따라 제위를 이은 함풍제-그 유명한 서태후의 남편-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소동이 일어나자 과거 강직했던 임칙서를 기억해내고 다시 그를 흠차대신으로 등용했다.

하지만 임칙서는 명을 받고 임지로 가던 중 그만 급사하고 말았다. 1850년 11월 22일의 일이었다. 경술(庚戌)년의 일인데 그의 사주와 운세로 볼 때 사인(死因)은 뇌일혈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흠차대신(欽差大臣)이란 타이틀은 어떤 특정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황제가 전권(全權)을 위임한 특명대신으로서 늘 있는 일이 아닌데, 이를 두 번씩이나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임칙서의 인물됨과 역량을 말해주고 있다.

영국은 아편전쟁 이후 중국을 만만하게 보았고 다시 시비를 걸어 애로우호 전쟁(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유럽 열강들 역시 행여나 뒤질세라 중국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망가져버린 중화 시스템 속에서 안주하려는 구태를 보인 조선(朝鮮)은 이로써 풍전등화의 위치에 놓인 것은 당연한 흐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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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9일, 토요일 오후 4시부터 시작할 예정이며, 장소는 양재역 근처의 강의실입니다. 주 1회 4시간, 3개월 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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