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전선 연천에는 태풍전망대가 있는데 주말에 가족 나들이 장소로 이용되곤 한다. 이 전망대가 위치한 GOP에서는 북한땅이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전쟁 때 격전지였던 백마고지도, 피의 능선도 내려다보인다. 전망대 언덕 아래에는 임진강이 굽이쳐 흐른다. 그리고 놀랍게도 DMZ 안에 견훤의 왕궁터가 보인다.
금강산 가는 길의 동부전선 부근은 지세가 아주 다르다. 휴전선을 관광버스로 넘어갈 때 차창밖에 보이는 풍광이 이국적이다. 황야의 무법자가 보안관과 총싸움 할 것 같은 황량한 분위기에 기암괴석들이 여기 저기 서있다.
철책선에서 근무했던 예비역 병사들이 복학해서 술을 마시면 자연히 군대 이야기가 나오고 자신의 경험담이 터져 나온다. 관광객의 시선과 달리 아주 구체적이다. 어떤 병사는 철책선 주변에 나무가 많고 안개가 많이 낀다고 말한다. 다른 병사는 바위산이 많고 나무는 관목숲밖에 없다고 말한다. 또 다른 병사는 강물이 보이고 계곡에 단풍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두해동안 병역의무를 하면서 GOP 근무를 했던 병사에게는 자기가 근무하며 보았던 지점이 휴전선의 전부일 것이다. 각초소마다 보이는 산과 언덕 등 지형 지세가 다르고 경관이 다르다. 1마일은 1.6 킬로미터이므로 언덕 위의 초소에서는 1마일이 하나의 풍경에 담겨지는 길이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어림잡아서 155개의 장면이 있는 셈이다.
좌우를 논하는 자리에서 왜 휴전선 이야기를 하는가. 좌우 충돌 시에 나타나는 격렬한 현상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필자의 오랜 꿈이었다. 그런 관심 끝에 충돌의 양상이 몇가지 패턴으로 반복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중의 하나가 155마일 휴전선에서 근무했던 병사처럼 저마다 자기가 본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남북이 대립하는 지점이 155개나 되듯이 좌우가 대립하는 지점을 꼼꼼히 세어보니 100개가 넘는다. 그런데도 좌우 충돌 시에 쌍방은 자신에게 유리한 근거 몇 가지를 선택해서 들이댄다. 서로 겨누는 창끝의 방향이 엇갈린다.
좌익은 친북이다 vs 좌익은 친노동자다
좌우가 엇갈리는 현장의 모습들을 찾아보니 "시대정신" 2010년 여름호 특집좌담 "한국의 보수와 민주주의"에 적당한 사례가 보인다. 대표적인 우익 이데올로그 양동안 교수는 좌익을 이렇게 정의한다. "좌익은 한마디로 말하면 사회주의자 및 사회주의에 동조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세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상은 명확하지 않지만 대한민국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북한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세력도 좌익세력이라고 말해왔습니다."
반대쪽 토론자로 나온 임혁백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좌익이라는 것은 국가적 시장경제, 국가개입을 주장하는 입장이 좌이고 진보에요. 그리고 우익은 시장주의로 모든 것을 시장경쟁에 맡기자는 것이고, 자본주의의 기본정신에 따라 사유재산을 철저하게 지키자는 것이죠. 이렇게 가면 친노동자냐 친자본가냐에 따라 이념라인이 갈리는 것이지요."
양동안은 친북이냐 친남이냐, 임혁백은 친노동자냐 친자본가냐에 따라 좌우가 갈린다고 말한다. 좌익은 친북이라는 양동안의 논거에서 출발하면 그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망해가는 나라 북한 왕조체제를 떠받드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임혁백은 다수 노동자들의 이익이 아니라 소수 자본가와 그들과 결탁한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욕심 많은 사람들을 우익이라고 본다. 그러니 좌익에 정당성이 돌아간다. 이처럼 다른 논거에서 출발하니 좌익이 그르다는 또는 좌익이 옳다는 상반된 결론에 이른다. 이런 식으로 주장을 펼쳐나가면 그들의 지지자들에게는 동의를 얻어낼 수 있지만 객관적인 판단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외에도 우리 주위에서 155마일 중 1마일에 해당하는 장면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를 보는 입장에 따라서 좌우가 갈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는 국가와 시장, 성장과 분배 그리고 사형제나 동성애, 낙태, 인종주의 등에 대한 입장에 따라 나뉘어지기도 한다. 요즘은 무상급식, 4대강 개발, 교육개혁에 대한 찬반 입장에 따라 좌우가 갈린다.
이외에도 중고교 과학교과서에 시조새를 삭제하라는 창조론자의 주장에 대한 입장의 차이에 따라서 또는 인간은 얼마나 악한가 즉 성악설과 이기주의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가에 따라, 타인과의 협력이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수용하는 정도에 따라, 주체와 이성중에 어느 쪽에 의존하는가에 따라 입장이 달라진다.
좌우의 분기점을 신자유주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럿이 보인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해 동의하는가 반대하는가에 따라 보수인지 진보인지 갈린다고 한다. 김규항 손석춘 등이 그런 말을 했다. 이들은 반신자유주의 연대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는 여러 이념의 복합체여서 폭이 2-3마일쯤 되는 큰 그림이다.
김어준, 레이코프도 1마일의 그림을 보여줘
김어준은 저서 "닥치고 정치"에서 좌우에 대한 그 나름의 통찰을 보여준다. 그는 불확실성이라는 공포에 대처하는 인간의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이 바로 좌우라고 말한다. 우는 공포에 지배당하는 자들이 보여주는 본능적 대응이며 그 공포에 압도되어 자기만이라도 살려고 반응하는 거라면, 좌는 그 공포를 잘게 나눠 각자가 담당해야 하는 공포의 몫을 줄여서 해결하려 하는 태도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조지 레이코프교수는 친근한 일상사로 설명한다. 그는 밤중에 건너방에서 자다가 깨어나 우는 아기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진보 보수가 나뉜다고 말한다. 보수적인 부모는 아기방에 찾아가지 않는다. 취침시간에는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가 알게 해주기 위해서다. 반면에 진보적인 부모는 아이를 찾아서 안고 달래준다. 레이코프는 보수를 엄격한 부모, 진보를 자애로운 어머니에 비교한다. 이것은 미국상황에서 나온 것이므로 우리에겐 적용하기 어렵다. 한국의 부모들은 열이면 열 모두 아이가 울면 달려갈 것이므로.
이처럼 좌우대립은 다양한 층위에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만 선택해서 고집하는 편향은 왜 나타나는 것일까. 제대군인의 고집은 무해하지만 이런 이념의 인간들은 우리 사회를 피곤하게 한다. 첫 번째 이유로 좌우이념에 대한 지식 정보의 부족을 꼽을 수 있다. 좌우중의 한쪽을 법으로 금지시킨 이 상황이 원인일 것이다. 민주화가 진전됨에 따라 국가보안법이 무력화되었다 해도 왜곡된 좌우 논의구도까지 똑바로 펴지는 못했다. 지나치게 격렬해진 좌우대립도 중요한 원인이다. 상대방에게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자파에게 유리한 근거만을 내세우려한다.
이념이나 좌우를 말하면 짜증부터 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념 자체도 복잡한데다 이념논의 구도까지 왜곡돼있으니 그럴 만하다. 이념이 남긴 혼돈상을 하나하나 따져보고 밝혀나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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