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라는 천재 물리학자가 있었다. 독일계 유태인이었는데 1904년 4월 22일, 새벽 4시에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장성해서는 2차 대전 중 미국의 맨해탄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서 이 세상에 핵폭탄을 선보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한때 소련의 스파이 조직과 관련이 있다는 혐의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훗날 복권되어 명예를 회복하는 바람에 인생의 굴곡도 맛보아야 했던 천재 물리학자였다.
먼저 이 사람의 사주를 보기로 하자.
년 갑진(甲辰)
월 무진(戊辰)
일 병술(丙戌)
시 신묘(辛卯))
오펜하이머는 천재 물리학자답게 엉뚱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버드 대학을 다닐 적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물리와 화학에 뛰어난 성적을 보였으며 시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또 한때는 인도 철학에 심취하여 인도의 철학적 서사시를 묶은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면서 산스크리트 어를 익히기도 했다. 그리고 1900년대 전반의 지식인답게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든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스탈린이 소련의 물리학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하는 것을 보고 공산주의와는 결별하게 된다.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천재이자 지적 보헤미안이었다. 집안도 부유했으니 보보스 족에 속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천재답게 그는 세상사에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학문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청년이었다.
사주를 보면, 병화(丙火)가 갑목(甲木)의 해에 태어났고 생시가 묘(卯)시이니 천재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명리학에서 편인(偏印)이라 부르는 기운이 년간(年干)에 있고 시에 정인(正印)이 있으면 천재라고 단정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일간이 불이니 언어에 관심이 있을 것이고, 그 불이 병화(丙火)이므로 화학 방면에 재간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신금(辛金)이므로 물리학에도 재능이 뛰어나다. 그리고 그가 인도 철학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인도라는 나라의 코드가 병오(丙午)이기에 그에게 강한 관심을 유발시켰던 것이다.
결국 그가 물리학의 길을 택한 것은 20대의 대운이 경오(庚午)운이라 물리학으로 마음이 갔던 탓이다. 그는 영국 캠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를 거쳐 독일의 괴팅겐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닐스 보어나 폴 디랙과 같은 천재 물리학자들로부터 배웠다. 그가 연구하던 1920년대는 양자물리와 상대성 이론이 등장한 시기라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했던 그는 마음껏 즐기고 연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펜하이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안은 그가 핵폭탄이라는 것과 강렬한 운명적 관계를 지녔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 하면 핵폭탄을 의미하는 음양오행의 코드는 병술(丙戌)인데 그가 태어난 날, 즉 일간(日干) 역시 병술일이기 때문이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대전이 시작되던 무렵, 물리학자들은 핵분열을 통해 엄청난 에너지를 방사하는 핵폭탄 제조의 이론적 토대를 완성하고 있었고, 결국 이 같은 가능성은 전쟁이라는 배경으로 인해 영국과 미국, 독일이 핵폭탄 개발 경쟁을 펼치게 만들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핵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탄 프로젝트의 진행에 대해 재가 사인을 한 것은 1942년 12월이었던 바, 이는 임오(壬午)년 임자(壬子)월의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저번에 북핵 위기를 언급한 글에서도 밝혔듯이, 불의 삼합(三合)으로 살펴볼 때, 커다란 불, 즉 핵폭탄이 이 세상에 등장하느냐 마느냐의 고비가 되는 시점이었다.
수기(水氣)가 가장 강한 시기, 임오(壬午)와 임자(壬子)는 세 개의 물이 하나의 불을 누르는 형국인데, 이 난관을 뚫고 핵폭탄 개발 사인이 났던 셈이니 이처럼 세상사는 무엇이든 결정적인 고비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맨해탄 프로젝트의 연구개발 총책임자가 바로 오펜하이머였던 것이다. 그는 연구소를 자신이 승마하며 즐기던 뉴멕시코 사막에 있는 로스 알라모에 차리고 미국내의 우수 물리학자들을 모조리 소집했다.
로스 알라모라 하면 어딘지 잘 모르지만, 산타페라고 하면 대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로스 알라모는 산타페 근처의 조그만 마을이다. 산타페는 국산 캔 커피의 이름이기도 하고, 자동차 이름이기도 하며, 최근에는 미국에서 기(氣)수련을 하는 사람들의 성지처럼 인식되고 있는 유명한 곳이기에 산타페는 대부분 들어본 적이 있는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이 곳에서 수천명의 물리학자들을 능수능란하게 지휘하면서 행정가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유명한 페르미나 컴퓨터를 만든 폰 노이먼과 같은 쟁쟁한 학자들이 그의 지휘 아래 일을 했다.
그런 미국 과학자들의 노력은 1945년 7월 16일에 가서 최초의 원폭 실험이 성공을 거두면서 개가를 거두었다. 그런데 이 날이 무슨 날인가를 알면 대단히 재미있다.
년 을유(乙酉)
월 계미(癸未)
일 병술(丙戌)
바로 핵을 상징하는 코드이자 오펜하이머의 생일이 병술(丙戌)인데 바로 그 병술일에 실험을 한 것이다. 이 날의 의미를 따져보면, 핵폭탄은 아직 개발 중이며, 마지막 어려운 고비를 돌파하자마자-임오(壬午)월이 지났으므로- 바로 실험 날짜를 택하고 성공리에 실험을 마친 것이다.
당시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핵폭탄 폭발시 대기권에 강력한 영향을 주어 거대한 기상 이변을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원래 경험해보지 못한 일은 이처럼 두려운 법이다.
원래 핵폭탄은 독일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당시 독일은 이미 항복해버렸기에 대상이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그러자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 본토 상륙에 따른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당초 만들어진 3발의 핵폭탄- 이 모두 실전배치용이 아니라 일종의 프로토 타입이라 해야 할 것이다-중 실험에 쓰고 남은 두 발을 일본에 투하하게 한다.
따라서 일본에 투하된 핵폭탄은 사실상 실전 실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핵폭탄의 피해가 너무도 참혹하다는 것을 알게 된 미국이나 나중에 핵을 개발한 소련은 이 바람에 상호간에 으름장만을 놓았을 뿐, 정작 핵의 사용은 끝내 자제했다는 점이 결과적으로 큰 다행이었다.
인류가 만든 신무기 중에서 사용되지 않은 무기는 없었는데, 이번의 핵폭탄은 실험 단계에서만 사용되었을 뿐, 정식 배치된 후에는 사용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묘한 데가 있다 하겠다.
사실상의 핵폭탄 개발이 완성된 시점은 1946년 병술(丙戌)년이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이 해부터 우라늄을 농축하는 공정이 확립되고 대량 생산으로 들어가는 체제가 완비되었기 때문이며, 아울러 핵을 말해주는 코드가 병술(丙戌)이기에 그렇게 잡는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나중에 수소폭탄의 개발에 앞장 서 반대하는 바람에 미 정부의 미움을 샀고 그 바람에 과거 공산주의자 경력이 있다는 점과 기타 몇 가지 미심쩍은 데가 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고 핵개발과 관련된 모든 정보에 대한 접근을 금지 당했다.
하지만 나중에 1963년, 당시 존슨 대통령 시절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상하면서 공식 복권되었으며, 그 후 1967 년 목구멍에 생긴 종양으로 사망했다.
그의 부친이 돌아가신 해가 1937년 정축(丁丑)년이었고, 그가 죽은 것은 1967년 정미(丁未)년이니 모두 시에 있는 신금을 정화(丁火)가 극(剋)한 것이 그에게는 부친을 잃고 마침내 본인의 목숨마저 앗아가는 악운이 되었다고 하겠다.
오펜하이머는 원자력을 “삶과 죽음의 양면을 지닌 신(神)”이라고 즐겨 말하곤 했는데, 이런 생각은 그가 젊은 시절 공부한 인도 철학과 신화에 등장하는 비쉬누와 시바, 다시 말해 세상을 유지해가는 비쉬누와 세상을 파괴하는 시바를 통해 생성소멸을 거듭하는 영겁 윤회의 모습을 원자력에서 보았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돌아가서 이렇듯 핵무기가 완성되자 미ㆍ소는 전 냉전 기간을 통해 엄청난 핵 군비 경쟁에 돌입했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을 지불했다. 그러자 두 강대국은 핵무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점에 있어 이해가 일치했고 이로서 두 강대국의 핵군비가 절정에 달한 1970년 경술(庚戌)년에 가서 국제연합을 통해 핵확산금지조약(NPT)이 발효되었다.
이 조약은 그 근본취지가 핵을 가진 나라와 가지지 못한 나라를 영구적으로 고착화하자는 일종의 불평등 조약이지만 핵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점에서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첨단 기술이라도 60년, 한 갑자(甲子)가 흐르면 전 세계에 퍼지게 되어있는 법이며, 그 마지막에 와서 핵을 개발하겠다고 나선 나라가 바로 북한이고, 그로 인한 문제가 북핵 위기이다.
내후년이면 다시 병술(丙戌)년이다. 바로 핵무기를 상징하는 코드가 들어오는 해인 것이다. 그래서 내심 오는 2006년이 무척이나 걱정되고 두렵다.
지금의 허울뿐인 6자 회담은 미봉책에 불과할 뿐, 정작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은 물러설 기색이 전혀 없다.
그저 6자 회담을 통해 중국은 백년전 일본과의 전쟁으로 빼앗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는 엄청난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고, 일본 역시 언제든지 군비 확장에 나설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러시아 역시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듯 6자 회담은 주변국들만 재미를 보는 형국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이렇다 하고 내세울 것이 전혀 없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내년, 2005년 6월을 북한의 핵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마지막 시한으로 보고 있다. 그 시기가 지나면 정말 다양한 시나리오들이 성립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어느 시나리오도 정상적이고 평안한 해법은 없는 것 같다.
민족 대승의 차원에서 북한 지도부가 결단을 내릴 시기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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