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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좌클릭, 몸 말고 발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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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정치권 좌클릭, 몸 말고 발을 보라"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홍세화 "삼성으로 표상되는 재벌국가, 이젠 변해야"

암울한 시대에, 시대의 부름에 응하다 '남민전 사건'으로 귀국하지 못한 채 망명객의 신분으로 빠리에서 택시를 몰아야 했던, 그래서 우리에게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잘 알려진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를 만나고 왔다. 다름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 부족한 우리 사회에 '똘레랑스'를 전파하기 위해 부지런히 펜을 움직였던, 그래서 차이가 차별과 배제의 근거로 사용될라 치면 그게 보수든 진보든 할 것 없이 언제나 냉철하게 비판의 매를 가하고, 차별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 안던, 하지만 평생 글 쓰는 이로 우리 곁에 있을 것만 같던 그가 진보신당의 당 대표가 되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우리 사회 가장 치열한 현장의 한가운데인 '정치'로 발을 옮기게 하였을까.

"정치는 본디 고귀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연대를 실현하는 것이 정치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소유의 시대에서는 성장이 목표이지만 관계의 시대에서는 성숙이 목표이다. 이는 인간관계의 성숙,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의 성숙을 의미한다. 빼앗고 빼앗기는 제로섬 게임이 항상 일어나는 곳이 소유의 시대였다면 풍요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 관계의 시대인 것이다. 전환의 시기가 오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심장부에서 점령 운동이 일어나고 금융자본주의의 위기와 생태적 위협이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부름을 받고 난 후 이런저런 어려운 일들에 부딪혀 처음의 그 열정이 사그라지거나 도망가고 싶었을 때는 없었나라는 질문에 "20대 때의 상황에서 이념적 좌파에 앞서 실존주의를 접했다. 마르크스보다 사르트르, 카뮈와 같은 실존주의를 먼저 만났기 때문에 그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실존을 걸고 가기 때문에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될 게 있다. 한국의 진보정치의 역량은 앞으로도 계속 취약할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현실적 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몸을 움직인다면 언제 힘을 형성할 수 있겠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금 우리가 못하면 그 과제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준다는 안목이 필요하다. 진보의 미덕 중 하나는 기다림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기다림. 모두가 '지금, 여기'에서 열매를 얻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정치의 현장에서 기다림이란 낯선 단어를 들었다.

혹시 택시 타실 때 택시 운전사의 얼굴을 한번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아닌 '한국 진보정치의 택시운전사'로 부지런히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우리 사회 골목골목을 누비고 있을 그가 당신 앞에 와 설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진보적인 위치에 있었지만 자유로운 영혼으로써 진영을 초월한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진보신당의 대표가 되셔서 화제가 됐었다. 당 대표 출마 계기는 무엇이었나?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기에 정치적 지향이 있고, 시민의식의 기본으로 적극성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귀국한 뒤 바로,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나의 정치적 지향과 가장 가까운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당시 나는 <한겨레>에 있었는데 사규 위반이었다. 그럼에도 당에 가입했던 것은 한국에서 진보정당에 몸을 실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겨레>에 있으면서 노동조합 조합원으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으로 옮겨서도 세 사람밖에 안 됐지만 언론노조 직가입 분회를 결성하여 분회원으로 참여했다. 노동자로서의 정체성, 정치적 동물로서의 정체성에 맞게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살려고 애썼다. 그렇게 민주노동당에 입당했었고, 나중에 진보신당으로 분리되면서 나는 진보신당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서 진보신당에 몸을 담았다. 그리고 4년 동안 평당원으로서 당비 내고, 특별당비도 내고, 후원회장 해달라면 하는 등 그렇게 참여하며 글 쓰는 서생으로 살았다.

▲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 ⓒ프레시안(최형락)

그런데 당을 이끌었던 소위 유력 정치인들이 당의 결정이 자신들의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고 해서 이탈했다. 당시 상황에 비추어 출마 계기를 두 가지 측면에서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당 중심성이라는 진보정당의 정신이 훼손되고 있다고 보았다. 당이 중심이 되어야지, 당의 유력 정치인이 중심이 되면 그런 정당은 특히나 진보정당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며 '붕당'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한꺼번에 나가니 당원들이 동요했다. 수습이 필요했다. 정서나 깜냥으로 보면 부족한 사람이지만 이 상황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무척 고심했다. 다른 하나는 당원들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한편 당을 선택했던 나 자신의 자존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진보신당의 당원 각자가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져서 당원이 되었을까' 생각하면, 그 한 분 한 분은 매우 소중하다. 이런 요인들이 작용했다. 뒤늦게 이 나이에 정당에 들어와서 현실 정치의 일선에서 그것도 대표로 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다.

상황의 부름을 받는 사람은 많지만, 그 부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선생님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 상황의 부름을 받으면 그 부름을 항상 취하셨던 것 같은데?

상황의 부름에 응하려고 애를 썼다.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께 들은 '개똥 세 개'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서당 선생이 삼 형제를 가르쳤는데 어느 날 삼 형제를 앉혀놓고 각자 장래희망을 말해보라고 했다. 첫째가 커서 정승이 되고 싶다고 하니까 서당선생이 흡족해했다. 둘째가 자기는 장군이 되고 싶다고 하니, 서당 선생은 또 만족스러워했다. 이번에는 막내에게 물어보았다. 막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장래희망은 그만두고 개똥 세 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서당선생이 이유를 물어보자, 자신보다 책 읽기를 싫어하는 맏형이 정승이 되고 싶다고 큰소리치니 그 입에 하나 넣어주고 자신보다 겁이 많은 둘째 형이 장군이 되고 싶다고 하니 저 입에 또 하나 넣어주고 싶다고 했다. 선생이 듣고는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면서 '마지막 하나는?'하고 채근했다. 막내가 우물쭈물하는 상황에서 외할아버지께서 '세화야, 막내가 뭐라고 했겠느냐?'하고 물어보셨다. 그래서 '그야, 서당선생에게 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왜냐고 물으시는 할아버지께 '맏형이나 둘째 형의 엉터리 같은 이야기를 듣고 흡족해했으니 서당선생이 먹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대답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께서는 "그래, 네 말이 맞다. 하지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네가 그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는 세 번째 개똥은 네가 먹어야 한다"고 하셨다. 이 이야기를 하도 여러 번 들어서 어린 나이에도 머릿속에 각인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살면서 세 번째 개똥을 먹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웃음)

가령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에 대학생활을 하면서 당시 박정희 독재의 국가폭력 앞에서 여기에 저항할 것이냐 순응할 것이냐를 두고 실존적 선택을 해야 했다. 그 상황에서 결국은 저항하는 쪽을 택했고, 그렇게 살아오려고 애를 썼다. 그때와 같이 지금 또한 상황의 부름에 응답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선택은 그때와 비교하면 그렇게까지 대단한 결단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부름을 받고 난 후 이런저런 어려운 일들에 부딪혀 처음의 그 열정이 사그라지거나 도망가고 싶었을 때도 있었을 것 같다.

20대 때의 상황에서 이념적 좌파에 앞서 실존주의를 접했다. 마르크스보다 사르트르, 카뮈와 같은 실존주의를 먼저 만났기 때문에 그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실존을 걸고 가기 때문에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끝까지 사병이자 평당원이고 싶어 했으나, '당의 보루라 믿어왔던 원칙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당 대표로 출마 결심을 했다'고 하셨다. 그 원칙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나?

ⓒ프레시안(최형락)
당의 중심성, 당의 결정에 대해 당연히 지켜야 하는 부분들이다. 아무리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몸을 움직이는 것은 할 일이 아니다. 진보신당의 가장 핵심이었던 몇몇 사람들의 선택과 행보는 그들이 의도적으로 원하던 원치 않았던 진보신당의 소멸을 바라는 행위였다. 그것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마음으로 무슨 말을 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발을 어디에 담그고 있는가'이다. '고개를 돌려 눈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런 측면에서 보면, 삶의 팍팍함과 이명박 정권에 대한 반사로 모든 정당들과 정치인들이 좌 클릭 하고 있다. 심지어 새누리당도 복지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모두가 말은 그렇게 하나, 발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발은 오히려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그 점을 잘 봐야 한다. 진보정치가 워낙 현실적인 영향력이 약하니까 그들은 몸을 움직인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도 진보 좌파와 한국사회가 각오해야 될 문제이다. 그래서 내가 못하면 내 후배 세대에게 넘겨주는 과제가 되어야 하는데, 먼저 발을 빼서 몸을 움직이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원칙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2011년 민주노동당과의 통합 논의에서 진보신당의 독자파의 입장이 순혈주의로 비판받기도 했었다. 정당이라면 자기 노선을 굳건히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대중적으로 구현해낼 정치력을 얻지 못하면 결국 동아리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닌가라는 비판도 많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가 놓치면 안 될 게 있다. 한국의 진보정치의 역량은 앞으로도 계속 취약할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현실적 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몸을 움직인다면 언제 힘을 형성할 수 있겠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금 우리가 못하면 그 과제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준다는 안목이 필요하다. 진보의 미덕 중 하나는 기다림이다.

심상정, 노회찬, 조승수와 같은 정치인들이 진보신당을 나가서 통합진보당을 만든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진보신당이 추구하고자 하는 비전들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볼 수는 없나?

사람은 합리적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진보정당이 추구하는 비전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현실을 추구한다? 오히려 현실의 힘에 굴복하면서 스스로 합리화하는 경향을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

3월 4일 사회당과 통합을 했다. 그런데 "요즘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통합'이 초조함과 약함의 증거이며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갈 자신감과 용기의 결여"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진보신당과 사회당 간의 통합은 여기에서 제외되는 건가? 진보신당과 사회당의 통합은 타당들 간의 통합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사회당과의 통합은 이념과 가치, 전망이 같으니까 총선 전이든 후든 관계없이 자연스레 이루어질 것이었다. 한 지붕 아래 세 가족이 들어 있는 그야말로 선거를 위한 몸집 불리기의 통합과는 다르다. '가치와 이념에 기초하지 않은 통합에 과연 얼마나 지속성이 있을까'하는 내 질문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비례대표제 확대 및 독일식 정당명부제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 도입은 진보신당에도 매우 중요한 아젠다일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이 있나?

독일처럼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이루어졌다면 지금과 다른 상황일 수도 있겠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소선거구제의 한계로 40퍼센트의 지지만 받아도 60퍼센트에 해당하는 의석을 얻는 구도이다. 한국 사회에 올바른 진보좌파정당을 건설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기에 장기적으로 보려고 한다. 총선은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만약 총선 결과가 좋지 않고, 2퍼센트가 되지 않아서 당이 해산된다 하더라도 다시 추스를 수 있는 힘이 없지 않다. 하방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각오가 필요하다.

ⓒ프레시안(최형락)
뉴질랜드 같은 경우, 1994년에 소선거구제에서 독일식 정당명부식 비례대표로 바꾸니 전혀 다른 상황이 되었다. 장애인, 여성, 지역의 활동가들이 국회에 들어가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의 경우는 국회의원을 선출하기보다 지역 후보를 선출하는 지역주의, 혼탁한 돈 선거의 문제점, 문벌과 학벌이 작용하는 등 올바른 대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소선거구제의 문제점이다. 문제는 거대 정당이 40퍼센트의 지지로 60퍼센트의 의석을 얻을 수 있는 이 제도를 쉽게 양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간이 필요한 문제이다. 지금 야권연대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우리가 제기하는 것 중 하나는 '정책에 기초해 연대를 하자'는 것이다. 연대를 하려면 목적이 있어야 한다. 한미FTA 폐기, 비정규직 철폐, 원전 단계적 폐기, 소선거구제를 비례대표제로 바꾸기, 재벌개혁, 부자증세와 복지증대 등이 논의되고 그다음에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처럼 '지역구를 몇 개 주고 몇 개 받을까'하는 식의 연합은 아니다.

2월 29일 '탈(脫)삼성 독립만세' 행사를 진행했다. 출마의 변에서 자본주의에 신음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얘기했었는데 선거철을 앞두고 그렇게 대놓고 탈삼성을 외치기가 솔직히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깔을 분명히 내셨는데?

진보신당이 처음부터 해야 할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통합을 하느냐, 마느냐'로 시간을 보낸 것이 안타깝다. 지금 한국은 삼성으로 표상되는 재벌국가이다. 총선을 통해 여야가 바뀌든 아니든 삼성으로 대표되는 재벌국가 체제를 그대로 둔 채로 과연 어떤 변화가 가능할까. 노동자들에게 약간의 변화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하는, 인간의 몸이 거하는 모든 곳에서 모두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가정을 예로 들면, 가정 내에서 각자가 다 주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여성도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성평등, 여권신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가정 이외에 직장을 포함한 그 어느 곳이든 마찬가지다. 우리가 여성의 노동권, 사회권을 주장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특히 노동자들은 일터에서의 주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한국의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은 생존문제 때문에 '자발적 복종' 혹은 '강요된 굴종' 중 하나를 겪고 있다. 이것을 그대로 노출하는 사례이자 공공성을 담보해야 하는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삼성이다. 엄청난 비리와 탈세, 세습은 그 어떠한 것도 제대로 처리된 것이 없고 검찰, 언론, 사법 할 것 없이 다 한통속이다.

지난 3월 6일이 황은미 씨 5주기였고 반도체에서 암이나 백혈병으로 죽은 사람이 알려진 것만 해도 44명이 넘는데 산재로도 인정되지 않고 있다. 이게 나라인가? 정치인이든 지식인이든 문화∙예술인이든, 솔직히 말하면 삼성 앞에서는 지극히 비겁하다. 이 문제를 제대로 짚지 않는다면 진보정당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본다. 총선에서 여야가 바뀐다 한들 얼마나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 그 변화의 가늠자이자 리트머스 시험지가 바로 삼성이다.

탈삼성을 이야기하면 바로 탈기업, 탈자본주의로 이해되기 쉽다. 탈삼성과는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생산체계나 지속가능한 성장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현 자본주의에 대한 진보신당 나름의 대안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생산방식과 소유방식, 성장주의에 기초한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을 전인적 존재가 아닌 경제의 동물로 축소시킨다. 그 아래서 오로지 매매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고, 인간 자체가 시장 활동의 대상으로서의 가치와 구매력으로 평가되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갔다. 우리는 우리 자손들에게 이런 사회를 물려줄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런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물음이 우리 사회에서는 삼성과 연결된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좌파들은 끊임없이 자본주의 체제가 옳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이제는 성장주의에서 벗어나서 녹색의 가치와 결합해야 한다. 본래 좌파들이 옳지 않다고 하던 것이 이제는 가능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것이 내적 일치를 이루게 될 때 자본주의 극복에 대한 전망이 보일 수도 있을 거라 본다.

소유의 시대에서 관계의 시대로 가야 한다. 소유의 시대는 물적 토대를 통하여 누구나 해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싸우면서도 성장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해방의 조건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성장주의가 가능하지도 않게 되었다면 목표가 성숙해져야 한다. 소유의 시대에서는 성장이 목표이지만 관계의 시대에서는 성숙이 목표이다. 이는 인간관계의 성숙,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의 성숙을 의미한다. 빼앗고 빼앗기는 제로섬 게임이 항상 일어나는 곳이 소유의 시대였다면, 풍요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 관계의 시대인 것이다. 전환의 시기가 오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심장부에서 점령 운동이 일어나고, 금융자본주의의 위기와 생태적 위협이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프레시안(최형락)

이번 총선에서 어느 정도의 지지율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나? 그 지지율을 얻기 위한 전략은 무엇인가?

미지수이다.(웃음) 워낙 구도 자체가 좋지 않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그 자리 그대로 가장 왼쪽에 있는데 버스가 급정거하면서 당들이 다 왼쪽으로 쏠린 상태이다.(웃음) 새누리당 또한 그렇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몸만 왼쪽으로 쏠려 있을 뿐, 발은 그 자리 그대로라는 것이다. 총선이 지나면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처음부터 왼쪽에 있던 우리는 위축되어 있는 상황인데다가 녹색당도 창당했고, 당을 알려온 유력 정치인이 다 빠져나간 상태라 아주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의 원칙을 지켜가면서 최선을 다하겠다. 나오미 울프가 '우리가 싸우고 저항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가 싸움과 저항을 통하여 획득하는 사회와 닮아야 한다'는 과정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것처럼 말이다.

홍세화가 꿈꾸는 정치란 무엇인가?

프랑스의 어느 신부가 한 말인데 "정치는 본디 고귀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연대를 실현하는 것이 정치의 소명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런 고귀한 정치를 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특히 한국의 정치인들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정치적 이념이나 철학이 탄탄하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점에서 정치인들도 인터뷰만 하지 말고 글 좀 쓰라고 말하고 싶다. 유럽에서는 정치인들이 글도 쓰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 글로 남긴 것이 있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반면 한국 정치인 중에는 글 쓰는 사람이 거의 없고 심지어는 토론도 잘 하지 않는다. 인터뷰는 즉흥적으로 답변하는 경우가 많기에 '그때는 그랬다'며 합리화한다. 한국 정치인들은 이것에 훨씬 더 익숙해져 있다. 일관성 없고 자신의 말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이라기보다 정상배들이 많다. 그들이 그럼에도 정치인으로 남아 있는 걸 보면 정치의 수준도, 국민의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국민의 수준을 넘어서는 정부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국민의 수준을 뛰어넘는 정치는 없다.

가끔 다시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돌아가고 싶은 때는 없는가?

물론 때때로 파리의 정경과 작은 골목길들이 떠오른다. 파리는 우리나라에서처럼 신문을 직접 배달해주는 게 아니라 가판대에서 사야 한다. 커피값은 의자에 앉지 않고 서서 마시면 반값이다. 그렇게 아침에 가판대에서 신문 하나 사고 카페 가서 서서 들춰보며 크루아상 빵 한 개와 에스프레소를 먹고 마시고 담배도 한 대 피던 생각이 자주 난다.(웃음)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지금은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낯선 타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서 삶을 산 거다. 대의를 위해 살았지만 결국 몸을 써서 생활하는 택시운전사 생활을 했는데 거기서 오는 괴리감은 없었는지?

먹물근성이 있어서 택시운전사를 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머리를 굴려서 어떻게 무엇을 해볼 수 없을까, 어떻게 생활해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꽤 많은 시간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당시 처의 역할이 컸다. 현실적인 면에 있어서 여성이 더 실천력과 적극성, 생활력이 있는 것 같다. 이런 경험을 통과한 것이 내적으로 큰 힘이 되었다. 앞으로 내 생존 조건 때문에 체제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겠다하는 것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체제보다 나 자신과의 싸움이 더 중요했다. 시시포스 신화에서 시시포스는 신의 형벌을 받아서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굴려 올리는데 그렇게 올리면 다시 밑으로 떨어진다. 결국, 자기와의 끝없는 싸움이다.

인생에 있어 가장 뜨겁게 눈물을 흘렸던 적은 언제인가?

ⓒ프레시안(최형락)
책<빠리의 택시운전사> 마지막 부분에도 있는데 해방감을 느꼈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토요일 오후 늦게부터 일요일 새벽까지 일하는 날이었다. 토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새벽 3시까지는 젊은이들로 바글바글하던 거리가 동이 터오고 밝아오는 5~6시쯤 되니 거의 사람이 없어졌다. 그 시간이 되니 갑자기 뭔가 가슴부터 올라오면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파리 시내를 달리면서 엄청 울었는데 그건 해방감이었다. 나는 항상 아이들을 데리고 남의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있었는데, 어쨌든 택시 운전을 하면서 이제 나는 생존문제와 관련해서 굴종하지 않을 수 있다는 해방감. 그렇게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 후로는 울지 않는다.(웃음) 그땐 그야말로 주먹으로 눈물을 막 훔쳤었다. 마흔셋일 때였다. 그런데 본디 심약하기 때문에 요즘도 영화 보다가 공감이 되거나 감정이입을 하면 살짝 울긴 한다.(웃음)

가장 행복했던 적은 언제인가?

그 시간과 마찬가지일 것 같다. 물론 사랑의 시간이 행복했다. 나는 암울한 시대 속에 살았기 때문에 연애도 사치인 양 의도적으로 기피한 적도 있었지만, 사랑이 행복의 원천이라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실연이 불행과 고통의 원천일 것이고.(웃음) 열악한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물적 토대로부터 오는 그것보다 잊히고 버림받는 것이 더 불행이라 생각한다.

가장 깊은 절망을 느꼈던 적은 언제인가?

요즘 세대는 이해가 잘 안 될 텐데, 프랑스로 가기 전에 학생운동을 하다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고 시경 대공분실, 보안사에도 갔다. 그때가 20대 중반이었는데 김근태 씨가 받은 정도는 아니라도 기를 완전히 꺾어버리고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게끔 자존감을 죽여버리는 과정을 겪었다. 한쪽은 옷을 입고 있는데, 한쪽은 발가벗고, 책상에 턱을 올려놓고 꿇어앉아 있는 상황이 황당했다. 매타작 없이 아무렇지 않게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존감을 바닥으로 끌어 내릴 수 있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 인간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체제에 대해 절망한 것이 그때였다. 그렇다고 스스로에게 절망하지는 않았다. 시시포스처럼 절망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반(反)나치 활동을 하다가 수용소에 갇혔지만 여러 우연히 겹쳐 살아남은 유대인인 프리모레비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인간 괴물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수가 많지 않아서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보통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위험한 것은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기계적으로 따르고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나치나 파쇼가 몇몇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 괴물에 의해 그런 게 아니라, 당시 독일 사람들이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을 알고 싶지 않으니 바라보지 않은 것이다. 그에 대해 알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에 그대로 따라간 것이다. 사회에 대해서는 분노도 하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그러기 힘들다. 다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정치인 홍세화가 아닌 개인 홍세화가 꾸는 꿈이 있다면?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반추하고 확인하고 이어나가는 것이 꿈이다. 지금이야 당 대표를 맡아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삶 전체로 보면 글 쓰는 서생으로서 나중에 읽어보아도 '내가 썼지만 괜찮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글을 많이 쓰는 것이 소박한 꿈이다. 따지자면 '소박한 자유인'이 내 꿈이다.

보통 책은 얼마나 자주 읽는지?

요즘은 지키지 못하는데 원칙으로 세운 것이 일주일에 두 권이다. 그래 봤자, 일 년에 백 권이다.(웃음)

평소 사색하는 시간을 얼마나 갖는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는 최소한의 시간은?

주로 담배 피우는 시간이다. 담배는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하니 끊어보려고 했는데, 글을 쓰려고 하니까 포기했다. 그것도 습관이 되니까 잘 안 된다. 술은 몸이 잘 받지 않아 조금밖에 못 마신다. 만약 술을 잘 마셨더라면 지금은 여기가 아니라 아마 센 강 근처에서 이미 소멸했거나 지금도 배회하고 있을 것이다. 손에 포도주병 하나 들고.(웃음)

인터뷰 코너 제목이 자유인이다. 홍세화에게 자유란?

우선 자기 형성의 자유 즉, '나'라는 존재를 어떤 존재로 만들 것인가의 자유가 가장 중요하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를 거치며 신체의 자유,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학문∙예술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 등 엄청나게 많은 자유들이 생겨났는데, 궁극적으로 그 자유들이 왜 요구되었을까. 그것들은 바로 '나'라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만들 것인가와 관련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요구되었던 것이다. 어떠한 사회 환경에 규정되고 구속된다 해도 나라는 존재를 어떤 존재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더 나아가서 사회∙경제적 조건 측면에서 자유란 사회적 존재인 내가, 내가 속한 사회에 나를 작용시켜서 긍정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실천하면서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데, 그 행위가 나의 생존 조건을 담보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삶의 자유도 그러할 것이다. 결국 내 적성과 능력에 따라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것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은데, 또 그게 나의 생존 조건을 충족시켜 준다면 그것이 자유인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자유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젊은 시절부터 갖게 된 문제가 바로 그 점이었고 그가 꿈꾸었던 것이 그런 자유인들의 자발적 연대 공동체였다.

동시대의 청년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소유의 시대에서 관계의 시대로 가야 한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인데, 한국사회는 물신주의의 팽배로 소유에 대한 강박이 너무 강하다. 내가 속한 사회에 나를 작용시켜서 삶의 의미를 느끼는 것을 자아실현이라고 하지 않는가. 젊은 세대들은 자아실현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좀 밀려난 것 같고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생존 조건을 가질 수 있는가에만 관심 있어 보여서 안타깝다. 인간이 삶의 의미를 느끼는 게 중요한데 단순히 소비하고, 소유하고, 순간적인 욕망에 매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삶이 매우 각박하고 미래가 불안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생존 조건의 추구가 너무 지나쳐서 젊은이로서 가져야 하는 패기와 열정이 실종되어 있다. 참된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모습이 부족하다. 다들 가슴 속에는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것이 있을 수 있는데 이 사회가 자유를 그리 만만하게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자아실현의 열정이 생존 조건을 무시할 수 없다. 생존 조건 때문에 자아실현의 목표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사회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너무 일찍부터 포기해버렸다. 젊은이들에게 두 손 모아 간곡하게 얘기하고 싶은 건 '자아실현에 관해 설령, 유보는 하더라도 포기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지만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시점에 모든 사람이 자아실현을 포기해버린다. 시간의 과정 속에서 긴장을 유지하고 있으면 결국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도 있는데, 아예 그걸 닫아버린다. 포기하지 말고 유보하라. 유보만 하라. 그것도 되도록 짧게. 내 꿈이 소박한 자유인이라고 한 것처럼 자아실현의 내용뿐만 아니라, 특히 생존 조건을 소박한 수준에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생존 조건도 아주 풍요롭게 하면서 자아실현도 하겠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웃음)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장지선)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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