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김대중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선생의 남은 뜻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날 만납시다."
2010년 8월10일 초판본을 사서 2011년 4월까지 모든 독서를 일시 중지하고 자서전에 매달린 지 7개월만이었다. 일터와 집으로 동시에 나와 같이 다니며 손때 묻은 시간이었다. 감동과 눈물과 지식과 흥분과 사색의 시간이었고 읽는 곳곳에서 가슴이 먹먹해 책의 진도를 중지해야만 했다. 그것은 그가 측은했기 때문이었다.
2009년 그의 마지막 신년사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그리고 친구 여러분"으로 시작하였다. 그분은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 2009년 8월18일 오후 1시43분 자서전만 남기고 그토록 그리운 가족과 벗들을 남긴 채로.
김대중 자서전의 이름은 '행동하는 양심'이다. 1부는 '용기와 헌신'이고 2부는 '위대한 승리'다. 내 나름대로 정한 이 소제목 1부는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의 인권과 평등의 수호자라는 글에서 따 왔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일생을 통해 보여 주셨던 바로 그 용기와 헌신을 가지고 우리가 이 세상을 이끌어 나가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2부의 소제목은 2권을 다 읽을 즈음 진정한 승리란 과연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감동에서 위대한 승리로 지어 보았다. 생의 끄트머리에서란 제목으로 당신의 자서전에 남긴 마지막 글에서 다음과 같이 남기셨다.
"...그래서 내 삶은 윤택하거나 고상하지 않다...역사의 뒤편에는 정의와 진실이 주관하는 신이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정치란 구조적인 악을 제거해야 한다... 나는 수없이 분노하고 좌절했고, 다시 수없이 인내하고 일어섰다...백성들이 주인인 세상에서 모두 평화롭기를 빈다."
위대한 승리는 이곳에서 탄생했고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김대중 자서전은 김대중 일생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정직하고 겸허하다. 그는 정치가이면서도 철학을 지닌 사상가다. 따라서 그의 글은 진실하며 깊다. 그의 글 속에 담긴 길은 당대의 길이면서도 미래의 길이기도 하다. 자서전은 정치가의 책이면서도 온 국민이 읽을 인문학적 교양서다. 문학은 역사를 포괄한다. 역사를 포괄하지 않고 대작을 탄생시킬 수 없다. 그의 글은 이미 노벨문학상을 능가하는 진실과 힘을 담고 있다. 김대중은 자신이 밝힌 바대로 "지구인(2권 599)"이기에 지구인 모두가 책을 통하여 그를 스승으로 친구로 만나게 될 것이다.
어머니
▲ 김대중 전 대통령. ⓒ프레시안(손문상) |
"나의 어머니는 둘째부인이었다(1권 27)"
"나는 평생을 작은댁으로 사신 어머니의 명예를 지켜 드리고 싶었다(1권 27)"
어린 김대중은 평생 어머니의 처지를 가슴 아프게 지켜보며 여린 마음으로 지켜 주기를 소망하고 살았다. 그는 처음으로 운명을 거슬러 간다. 어머니를 통하여 그 당시 하의도에서 목포로의 유학은 지금 미국 유학 가는 것 보다 더 힘든 시도였다. 그는 몸을 뒹굴면서 울었다 공부하고 싶다고... 당시 장수금 여사는 염전 하는 분들의 식사를 해주는 함바집을 하셨는데 알뜰히 모아 아들을 위해 두려움 없이 목포로 떠난다.
이렇게 시작된 운명에의 거스름은 서거하실 때까지 수없이 이어진다. 다섯 차례 죽음까지 넘어가며 6년의 독방감옥을 채워가며 조국을 떠나 망명의 길을 헤매면서 불굴의 도전은 끝없이 이어진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자서전은 이 한 말로 압축 된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는 당신이 이 세상에서 맺었던 모든 인연과 화해 하셨을 것이다(1권27)"
목포로 출항하며 세상을 향해 품고 간 3가지
그는 출생지 하의도에서 3가지를 몸에 담고 간다. 하나는 대자연의 품이다. 자연처럼 위대한 스승이 있는가? 하의도의 갯벌과 파도 그리고 바람은 그를 순수한 자연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대인의 품성은 자연만이 기를 수 있다.
또 하나는 아버지였다. 아버진 일본 왕을 부를 땐 유인(裕仁: 히로히토)이라고 이름을 직접 부르며 일제의 기세를 거부했다. 또 조선왕조 계보를 가르치셨다. 이 왕은 재임 시 무슨 일을 하셨다고 하며 일제 강점 시 우리역사의 의식과 실재를 심었다. 섬에 배달되는 딱 한 부의 신문은 이장이신 아버지 김윤식선생께 배달되었는데 그때부터 김대중은 신문 정치면을 살펴 세상흐름을 감지했다. 아버진 예인이셨다. 대통령의 문화정책은 아마도 아버지의 핏줄의 흐름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몇 백 년을 이어온 하의도 농민운동이었다. 농토를 지키고 불의에 항거하는 그 저항의 핏줄기는 어린 김대중의 심장을 힘차게 빠르게 휘돌았다.
큰아들 홍일이
2부 첫 장은 김홍일의원이 장식한다. 당선 첫날 새벽 "큰아들 홍일의 전화를 받았다 아들의 목소리가 각별했다.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김홍일은 대통령님 영결식 때 모습을 보였는데 그는 휠체어를 타고 있었고 몸을 거의 쓰지 못할 뿐더러 얼굴 근육도 굳어 있었다. 모두들 깊은 충격에 빠져 들었다. 그의 몸이 그리 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첫 장에 나온다.
"홍일이는 수차례 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오로지 아버지가 김대중이었기에 두들겨 맞았다. 나 하나면 됐지, 차라리 나를 더 때리지..."(2권 첫장)
김대중 대통령 부인이신 이희호 여사의 저서 <동행>을 보면 신군부 등장이후 부자가 구속되어 서로의 생사를 한참동안 몰랐고 불안하고 초조한 날을 보낼 때 아드님에게 편지가 왔다. 그는 그 편지 겉봉을 보고 감옥 침상에 들어가 큰 소리로 통곡하며 벌벌 떨었다
아들의 안위가 염려되어서였다. 그리고 몇 시간동안 편지를 가슴팍에 놓고 있다가 용기를 내어 펼쳐보며 또 울었다고 했다. 당신에게 그런 아들이었다.
"홍일이는 고문 후유증이 악화되어 제대로 걷지 못했다 그런 아들을 보고 있으면 뼈 속까지 아팠다"
군사 독재정권은 아무리 부도덕 할지라도 아무 관련 없는 자녀까지 데려다가 고문한 것은 인간의 정도를 벗어난 일이었다. 용서할 수 없는 죄였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였다. 언젠가 홍일씨는 고난 받는 아버지께 '어찌 그리 사십니까?' 하며 호소하였다고 한다. 옳은 일이면 가족들도 뜻을 같이 하여야한다는 세대는 아마도 김대중 선생이 마지막이었으면 한다. 어떤 이는 내게 말했다. "어떻게 저 가족들을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무슨 염치로 그들에게 다가간단 말인가..." 뼈 속까지 아픈 아버지와 그에게 신세진 그 많은 사람들도 가슴 깊은 곳에 남겨진 그 깊은 부채를 갚을 수 없다.
"국민과 함께, 반 걸음만 앞서서..."
읽다보면 마음에 담아야하거나 눈빛이 빤짝이는 글구들이 나온다. 요약해 적어 본다.
"정치인은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 상황이 나쁘면 최악을 피하고 차악을 택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정치인이란 현실을 살펴 미래를 향한 진리를 구하는 것이지 진리만 붙들고 현실을 도외시하면 안 된다.(1권 68)"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민주주의적 사고, 협상과 타협 등 4가지를 숙성시켜야 한다. 현실정치에서 소신과 명분 못지않게 현실적인 선택도 매우 중요하다. 나는 늘 핵심을 이야기 하려 했고 선명한 대안을 제시하며 비판했다. 이것이 나의 정치생활을 지배한 철칙이다.(1권584)"
"이상주의자들은 역사의 물꼬를 바꾸기도 하지만 때론 현실을 매우 고단하게 만든다. 그들은 혁명을 꿈꾸지만 희생만 양산할 뿐이다. 민주주의는 혁명이 아니라 국민과 함께 가는 개혁이다. 강경한 것이 겉으로 선명해 보이지만 때로는 한없이 무책임하며 무능한 것이다.(1권 199)"
"재야에 있든 야당을 하든 민주주의적 과정이 중요하지 말이 거칠어지고 강퍅해저서는 안 된다. 국민과 함께 가고 반걸음만 앞서 가며 손을 놓치지 마라. 어찌 보면 이념이란 세월이 흐르면 바래서 작은 바람에도 나부끼는 구호에 불과한 것 아니겠는가...(2권 327)"
"자유가 강물처럼 흐르고 민주주의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통일의 꿈이 무지개처럼 피어나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
자민련과의 연합은 기기묘묘한 전략적 승리이며 자민련의 우수한 인재들이 김 대통령을 도와 위기극복에 최선을 다했다. 재야에서는 독재세력이라 했지만 당시 충청권을 대표하고 있었고 정치적 경험이 있었으며 대통령 당선 후 공동 집권 시에도 독재의 어둠은 진정코 없었다. 국란 극복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공동 집권 후반에 자민련은 대통령의 평화통일정책에 여론의 불리함을 보고 스스로 물러났다.
외환위기와 카드대란
외환위기의 책임자였던 김영삼 대통령은 진심으로 그 자신이 저지른 위기에 대해 참회하지 않았고 시시때때로 언론에 대놓고 사리에 맞지 않게 하는 말엔 국민의 정부 모두가 침묵으로 일관했다. 외환위기의 정식명칭은 IMF외환위기가 아니라 김영삼외환위기다. 정치적 용어는 정확히 써야 원인과 결과를 도출 할 수 있다. 대통령께서는 외환위기야말로 6.25와 같은 대사건이라 하셨다. 당장 연말에 돌아오는 단기차입금에 대해 밤잠을 놓치셨다. 막대한 부채를 안고 매일같이 조여 오는 만기외채를 막는 일에 급급하며 달러를 구하기 위해 지구 끝까지라도 가야 했다.
카드대란 혹은 신자자유주위 운운하며 김대중을 폄하하는 무리들이 있다. 국민들의 신용불량은 김영삼 외환위기로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소기업이 무너지고 자살이 속출했으며 가정이 해체됐다. 당시 불가피하게 신용을 지키지 못한 분들에게 부디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를 바란다. 카드 사태는 무차별 카드발행처의 실수이며 신용불량을 야기한 분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란 복지보다 시장을, 공공선보다는 수익성을, 사람보다는 이윤을 공공부분과 사회복지부분을 축소하고 일부 개인과 대형자본에 부를 축적하게 하는데 김대중 정부 5년간 신자유유주의 어느 부분이 있는가?
김대중은 그 와중에도 인권과 복지에 밤잠을 놓쳤다. 노동의 유연성은 기업의 자생력과 건전화로 돌려 IMF팀들의 국가부도사태를 막았는데 공적자금으로 겨우 살아남은 대기업들은 지금 수십조의 이익을 내고도 기업과 국가를 위해 희생한 노동자를 버리고 있다. 우리 선조와 부모님이 가르쳐 준 것은 인정이다. 도리다. 부디 자성하여 문화민족의 저력을 빛내주기 바란다. 국민의 정부는 인권과 복지뿐 아니라 기업재정의 건전성과 투명성 그리고 위기극복에 최선을 다한 것 아닌가? 그 어려운 속에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면서 지속적 성장을 이루어냈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지금 이명박정권이 아닌가?
"재임 중 신용카드 남발로 신용불량자가 많이 나온 것에 대해 가슴이 아프다. 정부가 신용카드를 권장한 것은 외환위기로 인해 침체에 빠진 경기를 구하자는 것이 첫째요, 둘째는 모든 상거래 과정을 투명하게 해서 세수확보 및 조세정의와 탈세를 막아 보자는 것이었다. 신용카드소득 공제제도를 도입하는 등 노력으로 투명한 사회, 신용사회로 가는 데 일조 했지만 너무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2권481)"
지금은 카드 활용으로 인하여 신용과 투명사회로 자리 잡았다. 제도보다 더 어려운 것은 국민과 같이 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격완성을 위한 노력이다. 인류의 숭배와 추종을 받는 사람은 자식의 정상에 오른 철학자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를 위해 몸 바쳐 노력한 인격의 성자였다.
남북정상회담
미국의 돈 오버도프 교수는 <두 개의 한국>이라는 책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시발점으로 남북한은 사상 처음으로 한민족 전체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2권 311)"고 평가했다.
지금까지의 한국은 국가안보를 타국에 의지하고 자국의 운명을 타국의 손에 맡긴 채 민중을 시대의 악운에 버려 둔 채였다. 친일파의 득세는 여전한 채로 일제시대보다 기세가 등등했다. 남북 정상회담 시 남쪽 인사와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할 때 김 위원장이 말했다
"합의문을 실천합시다 다 같이 노력합시다. 대통령과 나눈 말을 인민에게 다 알릴 수 없습니다. 알려줄 말이 있고 둘만이 할 말도 있습니다. 남에서 대통령이 해 주십시오 북에서는 내가 하겠습니다. 서로 힘을 빌려야 합니다(2부 306)"
남북이 하나 되고 통일되고 하는 그 힘의 결집은 서로 힘을 모으는 방법 외는 없다.
김대중 대통령의 만찬사 중
"이제 지난 100년 동안 우리 민족이 흘린 눈물을 거둘 때가 왔습니다. 서로에게 입힌 상처를 감싸 주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평화와 협력의 길로 나아야 합니다"
위원장과 대화중에 김대중 대통령의 말씀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힘을 합쳐 주도하되 주변국의 지지와 협력을 얻어 나가야 합니다. 배타적 자주가 아니라 열린 자주가 되어야 합니다(2권 291)"
"외세를 모르거나 혹은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고 활용해야 합니다. 외교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우리가 힘 합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면 말씀을 해 주십시오"
김 위원장과 식사 중
"김대중 대통령의 용감한 방북에 대해서 인민들이 용감하게 뛰쳐나왔습니다(2권270)"
문화, 정보화, 복지, 교육, 여성, 인권
"문화 부분 예산을 사상 처음 전체 예산의 1퍼센트가 되도록 편성했다. 문화는 이제 국가 발전을 이끌어 나갈 중심축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2권214)"
"나는 우리나라가 지식과 정보 문화 창조력이 중심이 되는 21세기 가장 알맞은 민족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우리민족이 미래 세계를 이끌어 나갈 역량을 지니고 있으며 패권국가의 구태를 버리고 더불어 살며 인권과 생명존중의 새 세기를 이끌 평화 견인차임을 확신하고 계셨다. 의식이 있는 분이라면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과거 50년 동안 열심히 수출했지만 누계적자가 900억불이었다. 그러나 지금 5년 동안 이를 상쇄하고 50억 달라가 남았다. 당시 외환보유고가 39억 달러였는데 1년 8개월 만에 지금 1200억 달러가 넘는다. 대외부채 1500억달러 그기다 거의 단기부채, 지불유예 파산직전 하루 하루 숨막히는 숨참과 고통 그리고 깊은 기도... 국제 신용등급은 국가도산 직전에서 국제 신용평가로 에이 플러스가 되었다.그것엔 위대한 국민이 있었고 그 국민에의 헌신에 있어 나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위대한 경제학자이며 경제 집행자이며 경제 구현자이시다.
"2003년에는 30만 명의 학생이 학자금을 대출해 갔다. 중고등학교 전부에 학교 급식을 전면실시 했다. 가난한 학생들이 눈치 보거나 물로 배 채우는 일은 없다. 의무교육을 중학교까지 확대했다. 6년에서 9년이 되었다. 단위 학교 자치기구인 학교 운영 위원회를 모든 학교에 설치했다. 가장 아쉬운 것은 시간강사 처우를 개선하지 못했다. 아직도 지식이 홀대받고 착취당하고 있으니 슬펐다(2권411)"
학교서부터 교육적 모든 업무가 민주적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사와 학생 그리고 행정직인 교장이 편하고 행복해진다. 교육의 주인은 학생이다.
"21세기는 정보화시대이고 여성의 시대였다. 나는 여성을 위하는 길이 곧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여성의 섬세한 감각과 치밀한 사고는 국가가 관리할 자산이다"
여성부는 그런 의도에서 태어났다. 언젠가는 국가의 중추가 될 것이다. 여성입법은 남녀평등과 여성재능의 창출이었다. 상속세의 남녀평등 균등배분의 하나였다. "21세기의 주역은 여성입니다(2권412)"
"나는 오래전부터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생명공동체를 꿈꾸었다. 지구는 거대한 생명덩어리다. 우리는 지구 만물에 대해 너무도 많은 죄를 지었다. 우리가 눈을 가지고 보면 온통 자연의 눈물이고 귀를 가지고 들으면 만물들의 아우성이다. 다 인간 때문이다. 우리 산하는 산이 높은 만큼 강이 깊다. 강은 젖줄이다. 마르지 않은 젖을 지녔으니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랴 볼 때마다 경이롭고 감사하다. 나는 환경 선진국 환경대국 환경 문명국을 지향하고 싶다(2권199)"
이명박 정권 시 일어난 300만 "생명들의 절규"에 들리는 비명소리는 우리들의 뜨거운 눈물이다. 나는 살처분이라는 용어 대신 "생명들의 절규"라고 부른다.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인권입니다. 이제 복지는 손실적 비용적 개념이 아니라 효율과 창출이라는 생산적 복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생산적 복지는 재훈련을 통하여 고부가가치와 고효율을 낼 수 있는 정책입니다. 이 제도는 김대중 대통령의 결단이었습니다. 산재보험과 고용보험의 적용대상을 1인 이상 사업장까지 확대한 것 국민연금 의료보험 산재보험 고용보험과 국민기초생활보장법등을 실현했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야만의 시대서 문명의 시대로 도약한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수익률과 안전성이 확보된 국민연금 등 사회 안전망을 첩첩히 쌓은 것입니다. 특히 국민 기초생활 보장법으로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우리이웃들이 평안하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노년에도 질병과 마음의 외로움을 이기게 한 것입니다."
국가 인권위원회의 입법과 제도는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면 결코 이루지 못한 인권의 금자탑다. 건국 후 지금까지 국가의 부당한 권력으로 대항 한번 못하고 쓰러진 그 수많은 일들과 사람을 기억하신다면 인권위야 말로 얼마나 소중한 국가적 기구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 최정상급의 인권대국을 세우신 것입니다.
"인터넷은 스피드이며 정보입니다. 따라서 자라나는 학생에게 투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지금까지는 암기하고 외우는 부분이 많았으나 앞으로는 인터넷을 보고 생각하고 응용함으로써 인간이 더욱 창조적 사고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는 최고의 이윤을 내는 투자입니다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회장 말씀 2권442)"
"2000년 12월 정보 고속도로를 개통시켰다. 전국144개 주요 지역을 광케이블 초고속정보 통신망으로 연결했다. 1만 9988킬로미터로 경부 고속도로의 44배에 달하는 길이였다. 초고속정보 통신망은 정보화 사회로 가는 인프라였다 지식정보가 경쟁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2권441)"
"외교는 국운과 직결되어 있다. 외교가 운명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한반도를 둘러싼 역학관계와 그 힘의 실체를 정확히 인지해야 한다. 조선의 마지막을 생각해 보라. 외교를 잃고서 누구를 믿고 의지 하겠는가. 외교문서 달랑 한 장 의지해 살아온 결과가 무엇이었나. 식민지였고 수탈이었다. 우리가 힘이 약하고 분열되어 있으면 우리를 싸고 있는 강국들이 그냥 두지 않는다. 지정학적 이유이기 때문이다. 강국들은 서로 지배하려 들겠지만 우리가 강하고 단합해 있으면 우리와 협력하려 할 것이다.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2권 596)"
"중국은 물론 더 강해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중국을 파트너로 대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경제적 군사적 힘이 커질수록 미국과 한국이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한국이 어느 한쪽을 무시하고 중국과 미국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 그것은 위험합니다.(키신저 전 국무장관 2권 558)"
"아놀드 토인비가 지은 역사의 연구(12권)는 감옥에서 나에게 특별한 영감과 미래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었다. 신이 시련을 주면 인간은 그에 대한 응답을 통하여 성장하고 발전 한다. 문명은 도전에 대한 응전의 산물이기 때문에 응전에 성공한 집단만이 문명의 비약적 발전을 성취 할 수 있다. 민족 뿐 아니라 시련에 처한 내 운명의 앞길도 밝혀 주었다. 감옥에서 사색은 나를 자유롭게 했다. 나는 인간과 역사 뒤에는 정의로운 신의 섭리가 존재함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다.
(1권 362)"
깊은 눈을 갖고 볼수록 자서전엔 그대가 원하는 답이 그대에게 떠오를 것이다.
민주주의
"민주화 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제주 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전태일 분신사건, 인혁당사건, 원풍모방사건, 3.1구국선언사건, 3선 개헌반대투쟁, 민청학련사건, 부마항쟁 등 국민의 정부에서 모든 분들의 명예와 보상, 권리가 회복되었다."
"우리나라 어느 마을이건 아픈 사연들이 서려 있다. 나라전체가 무덤이고 온 산하가 피로 물들었든 근현대사였다. 동학혁명으로, 6.25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 4.19, 5.18등 정당한 정치적 요구에도 이유 없이 죽었고 죄의식 없이 죽였다. 우리 근대사에는 피바람이 멈추지 않았다. 그 원혼들과 유족들의 통곡과 원한을 씻어 주지 않고 무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죽음을 방치해 놓고 어떻게 산자들이 화해를 한단 말인가...(2권 426)"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해 온 영혼을 바쳤다. 그리하여 첫 부인인 차용애 여사는 과로로 인해 돌아가시고 이희호 여사와 온 가족들은 살얼음판에서 살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온 몸을 불살라 이 척박한 땅에서 민주주의를 이룩해냈다. 조지 부시 미 전 대통령의 <결정의 순간>이라는 자서전에서 광범위한 현안에 대해 보여준 지혜와 우정에 감사하며 그를 기꺼이 친구로 여긴다. 그 분은 자유의 투사이며 한국민주주의발전에 공헌했다. 몇 백 년의 서구 민주 정치사를 뛰어 넘거나 혹은 동등한 민주주의의 품격을 완성해 놨다. 세계역사에 영원한 민주주의 빛이 되셨다.
그러나 그분의 정치는 제도적 민주주의를 뛰어 넘었다는데 위대성이 있다. 현대 민주주주의 가야할 궁극적인 길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용서하신 것이다. 대통령취임 후 옛 정치 하에 저질러진 온갖 비리와 폭력 국가적조작살인, 법원에서의 법률의 조작등과 거짓언론, 관료와 기업의 부정부패 더러운 치부 등 법의 엄중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구나 자신과 그 가족에 대해 가해진 그 억울함도 도를 넘은 것이었다. 법의 심판이 태풍처럼 회오리칠 판국이었다. 정의의 심판을 피해자와 지식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폭풍은 아예 없었으며 버들잎에 봄빛을 담듯 모두 용서하신 것이다. 5.18 광주민주화영령들에 대한 살인마들의 학살은 가슴 저린 일이었지만 용서하신 것이다. 진정한 용기와 관대함이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용기라고 말씀하셨다. 해방정국부터 광주 민주화운동까지 그 범죄에 대한 답이 필요하였다. 그 답은 피바람을 화해와 용서로 승화시킨 용서였다. 나는 당신의 그 웅변적 말씀보다 당신의 인격과 마음에 자리 잡은 자기 구원의 문제를 극복하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인격의 성자라고 칭송하고 싶다. 노벨 평화상 선정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2권388)
그런 의미에서 우리산하에 흐르고 있는 보복과 피의 흐름을 거룩한 성인의 자세로 몸으로 막아 내신 것이다. 당신과 그 가족에게 몹쓸 짓을 한 무리들과 양심적 운동자와 민주인사에게 갖은 죄를 씌워 출세한 정치인과 사정당국, 법관의 무리들과 거짓말로 온갖 내용을 몇 십 년간을 퍼트리고 권력의 개가 된 언론에 대해서도 국법의 칼을 들어 대지 않으시고 사랑을 베푸신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가히 살인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충심으로 용서하셨다. 진심으로 회개하시 분들과는 화해 하셨고 영혼이 어두워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아낌없이 용서하신 것이다. 화해와 용서를 진정 구분하신 것이다. 잘못된 정치 제도하의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진정한 국가의 갈 길을 선포하신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하는 법과 제도를 바꾸는 데 혼신의 힘을 모으신 것이다. 한국정치의 위대한 업적이 세워진 것인데 이는 세계사에 영원할 것이며 세계 정치사에 규범이 될 것이다. 김대중의 민주주의는 성인의 도를 이룬 것이다.
"KBS사장에게 한국사 3대인물을 주인공으로 사극을 만들면 어떻겠냐 말한 적이 있다. 이순신 전봉준 장보고 세분이다. 일개 시청자의 견해였다. 전봉준선생은 시골 서당의 훈장이었지만 그는 그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조선말의 희망이 된 것이다. 민중의 위로요, 의지처가 되었다. 그의 사상은 반 봉건주주로 그 시대 최고의 사상이었고 시대적 소명을 지녔다. 장보고는 대양 대륙을 누비며 우리민족의 기상을 펼친 분이셨다. 이순신 장군은 구국의 성인이며 아무리 나쁜 악조건에서도 깊은 사상과 실력으로 나라를 구한분이시다. 3분의 영웅을 기리며 이시대의 일어날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
"한류가 대단하다. 한류는 우리민족의 고졸한 문화유산을 뽑아 올린 가장 성공한 소프트다. 확실히 우리문화는 격조가 높다. 어떤 문화유산을 봐도 천박하지 않다. 품위 있고 따뜻하다. 우리에게는 고 품격 문화유전자가 흐르고 있다. 지원을 하되 간섭하지 않았다. (2권 567)"
김영삼 정권 때 일어난 도청사건이 불거졌다. 삼성 이건희의 불법 선거 자금지원이 주 내용이었다. 노무현 정권은 범죄를 저지른 이건희와 여당 후보 양쪽을 다 처벌하지 않고 관계도 없는 국민의 정권에 칼을 디밀었다. 국정원개혁을 힘쓴 두 전직 각료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이다. 언론플레이와 함께 극심한 저질 극을 벌였다. 당시 국민의 정부에서 같은 각료로써 같이 일한 각료를 정권을 쥐자마자 구속시켜 버린 것이다.
특검은 사정없이 진행되었고 금융감독위원장 경제수석 대통령비서실장이 구속되고 연이어 박지원비서실장을 150억 뇌물을 받았다면 몰아나갔다. 물론 무죄였다. 삼성 대선 불법자금으로 파생된 이 사건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큰 충격 속에 빠졌다. 자식까지 감옥 보내고 이제 정말 마음고생이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마음이 쓰였다. 이를 참아 내는데 참으로 힘이 들었다. 미열과 염증으로 세브란스에 입원했다 나중엔 호흡곤란과 탈진으로 폐부종까지 같다. 생명의 사선을 넘겼다. 5번의 사선이 아니리 6번의 사선을 넘긴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정권초기 남북화해의 큰 역사적 사건을 대북송금이라는 것을 들고 나와 통일을 위해 애쓴 각료들을 구속시켰다. 그러고는 시시때때로 한나라당에 추파를 던지며 총리까지 줄 테니 연정하자고 애원했다. 노무현은 대선전 사람을 통해 대통령께 장관을 요청해 대통령께서 수산부장관직을 임명해 국정을 익히도록 했으며 같은 당으로써 대선에 당선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현직 대통령으로써 최고의 꿈은 정권 재창출이었다. 그런 그가 국가책임자로써 외교의 최고의 기밀을 대수롭지 않게 처리하고 범죄시했다. 현대는 4억불 대가로 30년간 7가지 사업을 북으로부터 확보 받았다. (2권516) 철도 정력 통신 관광 개성공단 등의 7개 사업권은 대단한 것이었다. 평화와 국익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고 허락한 사항이었다.
나의 후임대통령은 정통성을 지닌 민주당의 힘으로 당선되고도 당을 쪼개고 그 추종자들을 모조리 끌고 나가 당을 창당했다. 파렴치한 짓이었다. 역사에 정당정치에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김대중 대통령께는 사전에 말 한마디 없었다. 그 후 그는 민주세력들을 모조리 와해 시켰고 그 다음 대선에 역사상 가장 큰 참패를 기록했다. 정당민주주의의 힘을 소실하고서 무엇 하나 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또 재임 시 각료들의 부정으로 상심해 생을 끊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작은 그릇에 용량이 넘쳐 버린 형국이었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였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그들을 민주세력으로 보시고 끝까지 힘을 합쳐 민주주의 수성과 서민경제 그리고 남북관계의 위기를 극복하기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다. 손을 내밀어 같이 힘을 모어 나아가기를 그토록 원하셨건만 그들은 끝까지 실망시켰다.
"9.19공동성명을 6국이 힘들게 성사시켰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준수 하지 않았다"(2권541) 부시의 자서전에는 " 6자회담은 북이 말을 안 듣기 때문에 주변국이 목소리를 모아서 경계하려고 했다"고 헛소리를 했다. 북미 북일 외교관계성사, 남북평화회복, 동북아 긴장완화 평화체제구축 등 굵직굵직한 내용을 합의까지 하고선 딴소리였다.
"1997년 대선에서 일어난 일이다. 김영삼 정권 말기 대통령선거 때 비리들이 터져 나왔다. 그중 한나라당과 대선후보 이회창은 국세청을 동원해서 선거 자금을 모금한 것과 북한 판문점에서총격을 요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2권125)"
"언론은 두 사건을 세풍 총풍이라 불렀다. 세풍은 국가의 조세 행정을 송두리째 뒤집은 사건이었고 총풍은 공산당과 내통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용서 할 수 없는 범죄였다. 우리 국민이 공산당과 맞서 전쟁까지 치르며 지킨 나라인데 천인이 분노할 일이었다. 나라의 기본을 흔드는 중요한 중범죄였다. 한나라당은 오히려 야당탄압이라며 반격했다.(2권126)"
"김영삼 이회창 등의 한나라당은 외환위기를 일으켜 당장 서민구제를 위한 지원을 했어야 했는데 그들은 국회를 열지도 않았고 끝까지 사과도 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사람들이었다. 지금의 여당사람들이다. 이 사실과 그 사람들의 이름을 교과서 실어 후대를 위해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노사정 위원회는 내 혼이 담긴 작품이었다. 참으로 역사적인 일이었고 외환위기 극복과 한국경제의 새 틀을 만드는 중심축이 되었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 90개 항목을 합의했다. 민노총과 전교조를 합법화했다. 전교조선생들 모두 복권 시켰다. 전교조에 교육개혁을 기대했지만 아쉬웠다 그들이 주장한 참교육은 무엇인가. 민노총은 그들의 뜻을 정치에 묶어 활동하게 했지만 10여년이 지나도록 교섭단체구성은 커녕 분열되고 말았다. 제도권의 진입엔 진정한 실력과 겸손해야 뜻을 펼칠 수 있다. 재야에 있을 때 말을 아끼고 힘을 길러야 한다. 더구나 민노총은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나타나 수상을 저지하겠다고 방해했다. 노르웨이 노총도 동조 했다. 일정이 급한 와중에 노르웨이 노총위원장을 만났다. 민노총을 합법화하고 청치참여의 길까지 열어 준 정부가 어떤 정부인가. 세계 어느 나라 정부가 불법파업 그것도 폭력을 동반한 파업을 용인하겠는가? 면담이 끝나자 노총위원장은 설명해 주어서 고맙다고 사진 찍고 싶어 했다.(2권 399)"
그들은 부끄러운 짓을 해놓고 아직도 사과가 없다.
"나의 재임 하의 정책은 전자행정으로 부정과 부패의 요소를 줄인 것이고 두 번째는 선택과 집중이었다.. 이 시대는 국토의 넓이나 돈과 자원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식과 정보, 문화의 창의력이 국가운명을 가늠합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내 일생의 좌우명입니다. 용기는 최고의 미덕으로써 행동하는 양심은 용기로부터 비롯됩니다. 양심이란 양식과 영혼의 소리이며 신의 지시입니다. 지식을 쌓고 학 석사가 된 후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을 살펴보는 것이 양심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며 지성이 싹트고, 그 후 세계를 바라보는 통찰력과 현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채운 후 학문적 궁구를 거쳐 뚜렷이 보이는 것이 양심의 소리입니다. 오로지 참 인간만이 내면에서 울어 나오는 그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거부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을 목숨을 걸고 행할 때 행동하는 양심이 됩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 인권과 평등 평화를 수호하는 것 인류모두 더불어 함께 사는 것, 좋은 정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행동하는 양심입니다.
대통령님의 운명을 거스르는 힘은 여기서 분출하는 것입니다. 목포유학, 6.25 감옥에서의 탈출, 차용애와의 결혼, 6년간의 선거 도전, 대선후보 획득, 대선도전, 망명, 6년간 감옥 사형선고, 목숨 건 귀국, 정계은퇴, 영국유학, 귀국 후 카터만나 전쟁방지, 자민련과 연합, 대선당선, 외환위기 극복 ,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 6.15공동성명획득, 퇴임 후 외교, 북의 핵실험 후 정국안정시도. 민주위기 마지막 저항..
"독재세력과 그 하수인 언론은 행동하는 양심에 비수를 꽂았다. 그것은 내 인격에 대한 비열한 테러였다. 갖은 거짓말로 수 십 년간을 나를 짓밟았다. 나는 수없이 분노하고 좌절했다. 국가 반란수괴죄에 용공분자 과격한자 거짓말쟁이 국가전복 선동 등 온 국민을 속였다. 조중동 등 한국의 유수언론들은 아직 한마디 사과가 없다.(1권 478)"
국가권력을 견제하는 국가 제4의 책임을 버리고 권력의 개가 되었다.
"고향의 품에 안겨 실컷 울고 싶을 때가 많았다. 55차례의 연금이 있었다. 실력 없는 이들이 하는 일이 늘 이 짓이었다. 아버지의 임종 때도 그들은 나를 묶었다. 돌아 가시기전 얼마나 나를 기다리셨겠는가. 나는 불효자가 되었다"
"나는 평생을 스스로 무너지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 스스로 일어나야 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한다. 이런 해석이 아닐까? 하늘은 스스로 모든 이들을 도우려는 자를 성심껏 돕는다"
"교황을 방문했다. 천년단위로 선포하는 대희년에는 국빈방문을 받지 않는 관례를 깨고 나를 맞았다. 또 교황만이 다니는 베드로성당 성문을 통과하도록 했고 교황과 면담 후 베드로 성당으로 이동할 때는 교황전용 통로를 밟도록 배려했다 베드로성소 또한 직접 볼 수 있도록 했다. 교황께 북한 방문을 요청했다(2권237)"
한국의 천주교는 김대중 선생 서거 1주년 때 숨 하나 쉬지 않고 조용했다. 남북이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고 민주주위가 후퇴해도. 그들의 교우였는데도. 추기경과 정의사제 구현단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김대중 자서전은 인류사에 빛나는 금자탑이다. 전 세계 모든 국가들과 민주주주의 운동가들이 민주주의로 가야할 전범이며 행동지침이다. 전 세계 비 민주국가의 어느 정치체제, 어느 상황도 이 두 권속에 답이 있다.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하셨다. 민주주의를 하는 한, 하려고 하는 한 살아 움직이는 게 정치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려는 분들에게는 무한한 힘이 될 것이다.
1권은 봉건과 이데올로기와 군사 독재와 문민독재 모두를 헤쳐 나갈 길이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중동 어느 나라라도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면 자서전 1권에서 답을 찾아라! 2권은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려하는 정치인이거나 학자이거나 지식인이라면 숙지하여 그 나라의 환경이 맞게 만들면 된다. 국가정책으로 매우 우수한 내용이 담겨있다. 그 책속에는 지금의 세계 패권국가 같은 모습은 없다. 생명존중 인권존중 민주주의 빈곤 퇴치 등 어울려서 사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많은 분들이 평전을 써서 보충해 주시리라 믿는다. 한 100권쯤 나왔으면 싶다. 김대중은 세계학문의 꽃이 될 날이 올 것이다.
읽다보면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나서 그냥 책을 덮는 적이 많았다. 고난 속에 그를 바라보고 따라온 이들이라면 그의 자서전 속에 어마어마한 공간이 있음을 실감할 것이다.
"영국유학을 다녀온 뒤 당과 내 자신의 결심으로 정계복귀를 하였다. 마포에 있는 민주당사에는 우리 민주진영의 모든 것이 스며 있었다. 애환이 켜켜이 서린 곳 이었다. 그러나 이기택 대표를 비롯해서 지도부가 버티고 있었다. 나는 5층짜리 마포당사를 포기했다. 정말이지 피 눈물 흘려 마련한 당사였다(1권 655)"
마포당사의 포기에 나는 책을 덮고 말았다. 정치자금 운운하며 불같은 감시 속에 피땀으로 세운 정당이었다. 이기택은 외환위기 극복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호언한 분이었다. 김대중 선생이 위기 속에서 당을 세우면 노무현을 비롯한 부산출신 국회의원들이 5대5를 요구하며 당의 요직을 꿰 차고, 얻을 것은 모두 챙기면서 선거 때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의원 수는 평민당이 67명 신민당이 8명이었다. 당시 공동대표가 이기택이었으며 조순형, 김현규, 이부영, 목요상, 김정길, 노무현 등 이었다.(1권 577)
"목포를 점령한 공산당은 민주인사를 감옥에 넣고 퇴각직전 사살하고 있었다. 20명씩 끌려 나갔다. 죽으러 가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비규환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용해 졌다. 죽음의 진행이 일시 끊어 진 것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두렵고도 두려운 시간이 흘러갔다.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이상해 졌다. 늦은 저녁 자물통을 부수고 감옥을 탈출했다. 달빛이 밝은 새벽녘이었다. 목포 형무소 앞 인가에 숨어 있다가 새벽에 거리로 나셨다. 대성동 네거리쯤 이르자 갓난아기 업은 여인이 울면서 새벽길을 서성거렸다. 나는 그 아낙이 아내임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아내는 형무소에 붙잡힌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문에 밤새 울었을 것이다. 우리는 길에서 마주쳤다 살아서 만났는데도 눈물이 났다(1부 81)"
"그들은 나를 배에 실었다. 그리고는 흡사 시체에 염하듯이 했다. 두 손목에는 30~40킬로그램 무게의 돌인지 쇳덩어리를 달았다. 입에 나무 조각을 물게 하고 붕대를 둘렀다. 삶이 간절했다 아니다 살고 싶다 살아야 한다. 아직 할 일이 너무 많다. 상어에게 하반신을 뜯어 먹혀도 상반신 만으로라도 살고 싶다...."
박정희정권은 국제적인 압력에 살인을 포기하고 5일 만에 집 근처에 내려주었다.
"나는 동교동 우리집근처 골목에 서 있었다. 달빛이 밝았다 달빛속의 골목길은 적요했다. 유신 독재 후 정처 없는 망명길을 떠나 10년 만에 집에 왔다. 대문 앞에 서서 문패를 올려 보았다. 벨을 눌렀다."
그를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이 광경에서 가슴이 먹먹해지거나 눈물이 맺힐 것이다. 그는 세계를 관통하는 현대사의 산맥이다. 깊은 눈을 갖고 볼수록 자서전엔 답이 그대에게 떠오를 것이다.
김대중 선생은 우리나라 역사를 통해 네 인물에 비견할 수 있다.
첫 번째가 세종임금이시다.
새 나라 조선을 찬란하게 문명국으로 만드신 분이다. 그의 리더십은 선생과 거의 같다. 통치력은 자신보다 신하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만든다. 집현전을 통해 지식경영시대를 열었고 문화가 꽃 피었다. 그의 한글 창제는 오늘날 민주주의 완성과 비견될 수 있다. 하지만 최고의 권력자와 온 세상이 비난하는 그 칼날에 선 고난의 길에서 이른 공과는 비견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세계가 가야할 정의롭고 거룩한 제도다.
둘째는 이순신 장군이시다.
구국의 명장임을 말할 필요가 없다. 전함 한 척 없는 빈 바다, 육지에서 싸우라는 선조의 명, 7년 전신을 다한 한산섬의 군량과 군기는 다 한줌 바람이 되고...죽기를 각오한 12척의 배와 적선 133척 그는 조국을 구하고 조선의 위신을 세웠다. 군왕이 직접 쓴 신도비가 있는 장군 이순신 오늘날 또 다른 장군 김대중 현직 헌법상 총 사령관.
"아시아의 리더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책을 보면(창작시대 다쿠마 다카시) "그 당시 경제위기에 휘말려 국가파산 직전의 상황까지 몰린 한국에 김대중씨 외에는 나라를 구원할 지도자가 없었다"라고 썼다. 바다에서 포와 전함에서 싸움만이 전쟁이 아니다. 경제전쟁은 어찌 보면 더욱 치열하다. 경제 주권을 다 내주고 트집 잡아 국가부도로 몰고 가려는 그 상황에서 나라 곡간은 텅텅비고...경제정책은 모조리 허락을 받아야 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나라를 구한 구국의 장군이라 하면 누가 아니라 하겠는가? 전략과 작전은 명장 이순신 장군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한 번도 패가 없는 불패였다.
정조대왕은 유학의 극점에 선 성인이셨다.
아버지를 죽게 한 그 세력들과 군신의 예를 다하며 새 시대의 통합을 꾀했다.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끊고 진정으로 국민을 사랑하셨다. 임금으로 국민의 예와 부모의 예를 다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께 직접 어제 신도비를 내려 주신 분이기도 하다. 가뭄과 가난으로 고향을 버리고 한성으로 몰려오는 백성들을 성문에서 맞으며 울면서 다시 고향으로 가서 살길을 일러주신 현군 정조. 청와대서 가난한 이들과 아픈 이들을 위해 밤잠을 자지 못했다고 고백하신 김대중 대통령. 그의 정치적 신앙적 신념은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위한 구제였다. 대통령 신앙의 평생지침은 마태복음 25장 40절이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서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 이니라" 김대중에게 이 세상 모든 이들은 바로 예수였다.
퇴임 후 최대화두는 빈곤 퇴치였고 지구상 모든 분쟁과 불화와 다툼은 부의 평등이 아닌
차별적 빈곤이었다고 설파했다. 평화와 용서와 국민에 대한 사란은 정조와 비견될 것이다.
네 번쩨는 학문과 현인의 경지에 선 다산 정약용선생과 비견할 수 있다.
아직도 다산선생의 저서 주역사전이나 악서고존 등 풀이 할 수도, 풀어서 내놓지도 못할 책이 있다. 그는 진정 세상을 변하게 하고 싶어 하는 대 철학자였다. 정치적 박해 18년을 의연히 이기고 학문의 깊은 탑을 쌓은 현인이셨다. 김대중 선생의 학문과 청치 경륜과 새로운 다가올 미래의 구상은 세계석학과 세계를 움직일 것이다. 이미 세계는 김 대통령의 학문적 가치에 목말라 하고 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석학 중 한사람이었으며 세계를 움직이는 대정치가며 인류문제의 해결자였고, 미래의 플랜을 제시한 미래학자였다. 인내천 민주주의나 글로벌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곧 김대중 민주주의가 세계정치를 이끌게 될 것이다.
세계유수대학과 연구기관 그리고 세계를 움직이는 정치가들의 초청을 무수히 받았었다. 미국의 전 재무장관 이었던 로버트 루빈은 그의 회고록에서 대통령과 그의 각료들을 영웅적인 사람이라고 평했으며 미국 방문 시 미국경제를 살려달라고 구원을 청할 정도였다.
"시간이 다 됐습니다. 서재에 마련된 침대서 4시간 30분 꼬박 누워 있어야 했다. 일주일에 세 번씩(월수금) 신장 혈액투석을 받았다. 생명을 다할 때 까지 투석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마음이 울적하다. 아무도 내게 말 안했지만 5년을 넘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다
치료 받은지 5년이 넘은 지금도 지구인으로 살고 있다. 비서들의 보살핌이 고맙다.(2권599)"
나는 신장의 망가짐에 대해 생각해 봤다. 대통령은 신체적으로 건강하신 분이시다. 지금까지의 모든 선거유세나 국가차원의 해외방문이나 극심한 환경 속의 감옥에서도 육신을 이겨냈다. 그런데 1971년 대선을 치루시고 총선 지원 차 지방에 다니실 때 (1971년5월 24일)무안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다. 목포에서 예약한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광주비행장에 가라는 것이다. 광주 가는 도중 무안에서 8톤 넘는 트럭이 나타났다. 그냥 스쳐갈 차였다. 무심히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도로를 바꾸면서 승용차를 향해 직각으로 핸들을 꺾어 돌진해 왔다.
"순간 내 눈에는 거대한 화물트럭만 보였다. 흡사 괴물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내차 운전사가 가속 페달을 밟았다. 충돌했다. 차는 오른쪽 길 아래로 튕겨져 날았다.(1부 259-260)"
삶과 죽음이 찰라 간에 갈라진 순간이었다. 사고를 낸 대형 트럭 소유자는 총선에서 비례8번을 부여받은 공화당 당원이었다. 수사에 나선 검찰은 살인 혐의로 기소했지만 돌연 좌천당하고 바뀐 검사는 이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해 버렸다. 이때부터 선생의 몸은 천천히 후유증이 나타나 대퇴관절에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 했다. 3급 장애인이 되었다.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걷을 수가 없었다.
"국가행사나 외교의전 행사에서 다리를 잘못짚어 넘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한국을 대표했으니 결코 넘어 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다리가 아파도 나는 웃었다. 그리고 한 번도 넘어 지지 않았다(2부 527)"
다리의 불편으로 양말을 스스로 신지 못하고 양말 고무끈도 풀어 신어야 했다. 운동부족이 누적되고 청와대 5년의 혼신을 다한 직무 수행으로 신부전이 왔다. 투석으로 신장기능을 유지해야 했다. 도로에서의 살인행위로 운동부족이 되었고 그것이 신장을 망쳤을 것이다. 선생을 죽이려 했던 박정희때의 그 사건은 이렇게 선생의 삶을 힘들게 했다.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6.25의 동족상잔과 깡패를 동원한 부산 정치파동을 보고 정치 입문을 결심한다. 목포에서 출발한 선거는 연속 낙선으로 이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1954년부터 1959년 6년간 관권 타락선거였다. 독재정권의 유혹을 물리친 탓이었다. 출마는 돈이었다. 어느 날 재산이랄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집에는 식량조차 없었다. 어디론가 가고 싶지만 갈 곳 없고 숨고 싶지만 숨을 곳이 없었다. 부인(차용애 여사)는 그 어려운 삶속에서도 항상 미소를 뛰며 기운을 주었다. "장부의 뜻을 펴세요. 옳은 길이면 , 당신의 길이면 목숨 걸고 싸우세요" 온갖 어렵고 힘든 일을 하다 1959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김대중은 통곡하며 "당신은 죽지 않았소, 아이들 속에 있소"
후광선생은 그 여인으로 인해 이 땅 모든 여성들을 사랑했다. 고난에서 벗어나기를, 울지 말기를, 행복하기를.. 김대중에게 다가 갈수록 차여사님이 다가온다. 인간 김대중을 사랑할수록 그의 가슴에 차여사님의 얼굴이 뚜렷하다. 차여사님를 진정 괴롭힌 것은 대통령님의 낙선이 아니라 뛰어난 인재를 괴롭히는 현실과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선거였을 것이다. 죽을 힘을 다해 정치인 김대중을 만들고 싶어 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 김대중을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었다. 대통령님은 내가 사랑한 여성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렇게 소원했다. "죽음 뒤에도 우리는 다시 만나 이승에서 못 다한 사랑을 똑 같이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내가 사랑했던 첫 아내와 함께 셋이서 반갑게 해후하는 자리가 마련되겠지요." 이희호여사님도 부산피난시절 차여사님을 뵌 적이 있으셨다.
"통일은 우리민족의 미래이다. 민족의 통일 없이는 절대로 진정한 민족의 평화와 번영은 있을 수 없다. 남북이 실질적으로 화해와 협력을 통해 평화적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단계론적 통일방안이 필요하다. 3단계 통일방안이다. 평화공존 평화교류(남북연합) 평화통일이다. 한국이 어느 특정국가에 이용되는 통일은 피해야한다. 주변강대국들이 불편해 진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는 북한이다. 남쪽이 잘살면 도와 줘야 한다. 동생네가 끼니를 잇지 못하면 형이 쌀을 퍼다 주는 것이 당연한일이다. 재임 중 쌀 200만 톤 비료40만 톤씩 인도적 지원했다. 비료지원은 곡물 생산량을 두 세배로 늘릴 수 있었다. 곡식을 지원받는 것보다 북한에 훨씬 도움이 되었다. 민간에 의해 의약품 생필품도 지원됐다. 인도적 지원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의무다. 남과 북은 혈류가 열려야 하고 통해야 한다. 한반도에 피가 돌게 해야 한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남북모두 가난해 지지 말아야 한다. 작금의 북한 돌보기는 우리 민족사에 대운을 가져 올 것이다.(561)"
같은 피를 나눈 형제들에게 퍼주기라는 야만적 단어는 쓰지 말자. 2011년 4월 춘궁기를 맞아 미국의 북한 식량지원은 한국의 완강한 반대에 직면해 있다. 국제사회의 대북 식량지원까지 막고 있다. 이명박정권에서 대북 정책은 없다. 종교적 집착만 있을 뿐이다. 헌법상 대통령은 국가의 안위와 통일을 평화롭게 이루어야 하는 직책이다. 북은 헌법이 정한 우리나라다.
"통일 되어 압록강의 기적을 꿈꾸자(2권159~160)"
"인류는 5번째 혁명을 거쳤다. 첫 번째는 인간의 탄생이다. 두 번째는 농업을 시작한 것이다. 세 번째는 황화 유역 등 5군데 도시문명을 이룬 것이다. 네 번째는 2500년 (BC 6세기)일어난 사상혁명이다. 다섯 번째는 18세기 산업혁명이다.20세기는 산업혁명의 절정기였다. 지금은 돈 노동 자원 땅보다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정보와 지식이 경제의 중심이 되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21세기 다가올 시대는 지식 정보혁명시대다. 창조적인 지식은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우리나라는 높은 교육수준을 바탕으로 우수한 인적자원이 있으며 수 천년동안 민족 정체성을 유지해온 문화적인 힘이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를 찾았을 때 스탠퍼드의 대학 교수가 말했다. 일본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규모는 거대하지만 21세기 정보산업이 경제 전체의 15퍼센트밖에 차지하지 못합니다. 나는 확신했다. 지식 정보화 대국, 그것이 우리 한국이어야 한다. 인류의 역사는 시대의 격변기에 따라 새로운 승자를 배출해 왔다. 21세기 최대 강국은 바로 우리나라여야 했다"
행동하는 양심
직접 들어야 할 음성은 두 음성이시다. 2003년 2월 24일 퇴임을 앞두고 국민들에게 남긴 말씀이시다. 제목은 '위대한 국민에의 헌사'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여러분 삼가 작별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 하나같이 단결합시다. 내일의 희망을 간직하고 열심히 나아갑시다. 큰 대의를 위해 협력합시다. 감사합니다."
슴이 절절히 녹는 음성이었다. 두 번째는 6.15남북 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 때의 음성이시다. 2009년 6월27일 생의 마지막 입원 보름 전이었다.
"여러분께 간곡한 피맺힌 마음으로 말씀 드립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독재정권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까? 그분들의 죽음을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생명의 불꽃이 사그러지기 직전의 찬란한 불꽃으로 다가온 말씀이다. 이 두 말씀은 문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음성으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한국의 우익은 친일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친일 세력은 장면 민주정권을 불과 1년 만에 전복시켰다. 5.16군사 쿠데타였다(2부 585)"
정경유착과 관치금융, 개발독재, 재벌위주 경제운용 등으로 수출증대와 경제성장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누가 경제 주체가 되어야 하는지 어디에 분배해야 하는지 생각자체도 없었다. 농민과 노동자의 희생위에 특혜와 특권경제하에서 대기업의 특혜를 보장하는 것이 박정권의 경제 본질이었다."
이 더러운 경제구조는 지금 더욱 기승을 벌여 대기업의 욕심으로 서민 소가게까지 미쳐 치킨 피자 등 가난한 자영업자를 자살로 몰고 가고 있으며 아름뿐인 자회사를 만들어 일감 몰아주기로 부의 세습을 촉발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님때의 경제개혁과 그 정책을 다시 빠른 시일내로 회복한다 해도 점진적 변화로 앞으로도 50년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 이렇게 병이 깊은 것이다. 박정희의 가장 큰 죄는 지역대립을 조장하여 한 지역을 인격적으로 철저히 몰락시킨 것이다. 남북이 갈라져 가슴 아픈 것도 부족해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남남의 갈등을 부추기고 억압하며 경제적 혜택에서 제외 시켜 버린 것이다. 이는 이승만의 친일세력을 붙든 것과 같은 큰 과오였다.
또 정보정치를 하여 국가를 통제하고 선거를 조작하고 병영국가를 만들다 못해 헌법에도 없는 국회해산과 정기집권의 과욕을 부린 것이다. 그리고 실력으로 어찌 할 수 없으니 김대중 납치살해지시를 내려 세계적 망신과 살해 불발로 국가적 정통성을 잃어버렸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번 2012대선에서 독재권력이나 잔존권력이 등장할시 국민적 심판에 직면할 것이다.
용기는 최대의 미덕이며 진실에 근거한 웅변은 최고의 무기다(1부). 진정한 용기는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헌신에서 나온다(2부 601). 용기는 최고의 미덕이다. (대통령수첩 맨 위 구절)
김대중 대통령은 평생 두려움 속에 살았다. 그는 심성이 착하고 선한 분이셨다. 자신의 주변에 타툼이 있거나 큰소리 나는 것을 참지 못하신다. 늘 따뜻한 인품으로 화해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도 무너질까봐 용기를 북 돋아야 했으며 그 일을 실행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각료부터 설득해야 했다. 그는 쉼 없이 걸었고 쉼 없이 설득하며 쉼 없이 기도 했다. 그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진리에 대한 헌신"은 용기로부터 나왔다.
"시간마저 달콤했다. 아내랑 거실에서 마당을 보았다. 참새들이 찾아와 지저귀고 꽃들이 방실거렸다. 나는 뜰에 있는 나무와 화초들을 순서대로 다 외울 수 있었다. 이 작은 뜰에 행복이 고여 있었다."
서거 1년 전 그는 삶을 마감이라도 하시듯 마음속에 모든 것을 담으신다. 진도 벽파진과 해남우수영에서 이순신장군의 명량대첩유적 보다. 진도의 삼별초 옛터를 방문하다. 전북 변산반도 낙조, 중국 단동 압록강(-평생을 상상 속에서 압록강을 품고 사시었다.)을 찾아 가시다.
2009년 새해 아내와 연거푸 윷놀이에서 져서 돈을 잃었다. 고향 하의도를 방문했다. 선산에 가서 배례하고 쿤 바위 얼굴 등 어릴 적 추억을 찾아 하의도 곳곳을 찾아 가시다. 하의도 농민운동기념관 개관식에서 운동가들에의 헌사를 하시다. 중국 인민학회 초청으로 방문했다. 차세대지도자 습근평을 만나 강택민과 주룽지지 같은 최고 지도자들이 나에게 따거(형)이라고 불렀다고 하시며 동생으로 받아 드리시고 그의 노모를 어머니라 부르며 친목을 다지다. 돌아가시기 전에 편지를 보내주시다. 중국의 외교 석학들에게 앞으로의 세계적 외교정책을 제시하다. 기존의 햇볕정책과 천하태평외교를 간곡히 부탁하시다. 인터넷시대라 힘과 무력으로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니 천하 모두가 태평토록하는 외교를 지향해야 한다고 간곡히 권하시다. 여사님과 수시로 한강변 나들이를 하다. 저녁에 두 분이 가곡과 유행가 찬송가를 마음을 모아 이중창하시다. 토요일엔 동교동직원 모두와 함께 삶의 경험과 교훈하시다. 클린턴 미 전 대통령을 마나 9.19로 돌아가는 것이 미 국익과 동북아 평화를 앞당길 것임을 설파하는 편지를 오바마 대통령께 편지를 전해달라고 했으며 시진핑 중국 차기 최고 지도자를 만나 남북 평화에 앞장 서 줄 곳을 간곡히 말씀하셨다. 그는 마지막 삶을 이렇게 담고 버리고 하여 가벼워졌다.
그는 이 시대에 우리와 함께한 사람으로 다정다감하고 마음 따뜻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한 지식인이었다. 독실한 신앙인으로 섬기러 오신 예수께서 살아온 삶을 그대로 실천한 지성으로 소외받고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을 위해 살았다. 그로 인하여 고난을 몸에 짊어 졌으며 당신으로 인해 당하는 가족의 아픔에 눈물을 감추고 사는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 세상에 다녀가신 그 많은 성인들의 길을 걸었으며 인격의 성자가 되셨다. 두려워 울면서도 미래를 설계한 김대중, 청와대서 여사님으로부터 "오늘 안에 주무세요"라는 소리를 들으며 홀로 관저에서 보고서를 읽으며 나라 위한 열정과 지혜를 발견하며 가슴이 뛰고 희열을 느낀 김대중 대통령. 그의 그 많은 꿈 중에 마지막 꿈은 이런 것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높은 곳에 한옥을 짓고 살고 싶다. 봐 둔 곳도 있다. 거기서 한복을 입고 꽃과 나무와 새와 바람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고 싶다."
나는 목포 대반동 앞바다를 바라보는 그곳에 대통령님의 집이나 사당을 짓고 싶다. 역사는 앞으로 진전하고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다. 김대중 선생의 마지막 일기의 한 구절이다. 이희호 여사님께 바치는 꽃다운 헌사라고 믿고 싶다.
후기
경기도 파주에 사는 시민이며 직장인입니다. 나이는 58세입니다. 프레시앙입니다. 부산 출생으로 정치적으로 김대중선생의 정책을 공감해 따랐습니다. 하지만 당원도 아니였고 단지 선거 때 표만 찍었을 뿐입니다. 주위 분들에게 정책적인 우수성을 간곡하게 전했고
민주적 절차에 의한 정권교체와 존경하는 김대중선생의 집권을 간절히 바랬습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시민으로 돌아오실 때 서민들과 피부를 비비면서 여생을 보내시기를 빌었습니다. 드디어 김대중 팬클럽인 인터넷모임이 생겼고 대표와 고문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서거하신 후엔 김대중 도서관에서 하는 시민교육 모임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한 인물의 평가는 20여년이 지나야 정확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워낙 노출이 심하게 되어서 지금이라도 후배들이 배우고 실행할 부분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민주투쟁이나 그 과정을 모르고 삽니다. 마치 일본정부가 2차 세계대전의 과오를 숨겨, 자국의 국민을 일본인은 되도 세계인이 되는 것을 막듯 나라를 책임질 이들이나 다음세대들에게 김대중을 알리는 일이 더 급한 것 같았습니다. 프레시안의 김대중기획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처럼 시간이 없거나 책값이 다소 부담스런 분들을 위해 조금 자세히 기록했으며 프레시안을 통해 김대중을 만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꼭 정치인이나 유명인만의 글만 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좋은 글을 널리 공모하시고 책도 만들어 주십시오.
김대중이 만든 세상과 만들 세상을 이 땅의 젊은이들과 함께 고민하며 펼치는데 프레시안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좀 길지만 자서전 1,2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파주에서 단목 박수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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