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람의 실천적 행위는 결국 그 사람(들)의 '생각'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기에, 한국 진보정치의 본질적 문제점은 '총론적 좌표의 붕괴' 그리고 시대적 낙후성, 바로 그것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최초의 화두 : 도대체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마찬가지 원리로 현재 지구상 존재하는 나라들 중, 가장 높은 수준에서 평등과 연대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는 나라를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들이라고 한다면, 그 사회는 분명히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이론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함이 온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이념과 어떤 정치이론이 스웨덴 같은 사회를 만들게끔 하였을까? 이 문제는 2012년 정치재편과 복지국가가 거론되는 한국 정치의 현실에서 정치가, 노동운동가, 그리고 한국적 복지국가를 염원하는 국민들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인식론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 스웨덴 모델에 관한 기존의 학문적 연구들은 90년대에는 '스웨덴 모델'을 중심으로 렌-마이드너 모델과 노사관계를 중시하는 것이 주종이었고, 최근에는 유연-안정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스웨덴 모델'이 경이로운 몇 가지 지점들
그러나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지점은 스웨덴 모델의 정초를 놓았던 스웨덴 사민당 초창기의 '정치이념'에 관한 부분이다. 그럴 때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하는 스웨덴 사민당의 이론가는 단연 닐스 칼레비(1892~1926)와 에른스트 비그포르스(1881~1977)이다. 그중에서도 전후(戰後) 스웨덴 사민당의 정치 지도자들이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닐스 칼레비의 역할이 보다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스웨덴 모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경이로운 점들을 보여주고 있다. 몇 가지만 나열해 봐도 그 '창의성'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스웨덴 사민당은 △베른슈타인(=개혁적 사회주의) 노선을 창당 직후부터 수용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었다는 점 △초기부터 자유주의 정당과의 정치연합에 매우 적극적인 점 △'그람시 이전의 그람시주의'를 채택한 정당(=닐스 칼레비) △좌우파를 막론하고 모두가 자유주의적 건전재정 이론에 함몰되어 있을 때 '케인즈 이전의 케인즈주의' 정책을 세계 최초로 채택한 점(=비그포르스) △우파에 의해 제기된 우생학적 인구문제를 복지국가 정책으로 전환시킨 점(=군나르 뮈르달) △1950년대 각국이 서로 케인즈주의 정책을 모방하고 있을 때, 오히려 케인즈주의의 한계를 깨우치며 세계 최초로 노동 친화적 '공급중시' 경제정책을 채택한 점 (=렌-마이드너 모델) △1970년대 중반, 임노동자기금이라는 형태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최초로 시도한 점 등이 모두 그러하다.
오늘날 우리는 유럽에서 가장 큰 덩치를 갖고 있는 독일 사민당과 프랑스 사회당 등을 통해서 '이론적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반면 스웨덴 사민당은 이론적 영감은 물론 '정치'의 영역에서 새로운 실험을 실제로 관철했거나, 실험했다. 그런 점에서 스웨덴 사민주의의 역사는 '사민주의 정치의 거대한 실험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창기 스웨덴 사민당이 직면했던 정치적 상황들
닐스 칼레비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웨덴 사민당이 처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스웨덴 사민당은 1889년에 창당되었다. 스웨덴 사민당은 초창기부터 영국의 페이비언 그룹, 국가를 긍정한 독일 라쌀레, 그리고 베른슈타인의 개혁주의와 의회주의 노선의 영향을 받았다.
스웨덴 사민당은 1891년 제2차 당 대회에서, 중요한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사민당의 정치적 동원은 "국민들의 현재적 관심과 의식에 위배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사민당 조직위원회가 제4차 당 대회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계급투쟁'이라는 운동권적 표현을 일부러 삭제하고, 노동자와 사용자간의 '갈등'이라는 용어로 노동쟁의를 표현할 정도로 유연성을 발휘했다.
스웨덴 사민당은 1917년에서 1932년에 걸쳐 스웨덴 자유당과의 연립내각을 시도 또는 성사시킨다. 특히, 1917년 최초로 자유당과의 연립내각을 구성할 때, 사민당내 좌파들은 이에 반발해서 1만 명의 사민당 당원과 15명의 국회의원이 탈당하게 된다. 당시 스웨덴 인구가 300만 명 정도였으니 인구의 0.3%가 탈당한 셈이다. 오늘날 한국 인구로 환산하면 약 20만 명의 당원이 탈당한 '초대형 사건'이었는데, 이러한 과감한 정치적 결정이 없었다면 오늘날 스웨덴 사민주의의 위대한 성취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1920년에는 당 강령에 아예 '연립정치'(Coalition Politics)를 명문화한다.
1917년은 러시아 혁명이 있었던 해이다. 탈당한 사민당 좌파들은 '스웨덴 급진당'(공산당)을 만들었다. 요컨대 당시 스웨덴 사민당은 오른쪽으로는 자유주의 정치세력, 왼쪽으로는 볼세비키즘(=스웨덴 공산당)의 사회화 압력에 직면해 있었다. 스웨덴 사민당은 정치적으로는 보통선거권 쟁취, 경제적으로는 사회화를 핵심 강령으로 채택한 셈인데, 집권 경험이 누적될수록 '사회화' 문제에 대해 현실적 답변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닐스 칼레비의 창의적이고도 빛나는 이론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전개된다.
▲ 수영을 즐기는 스웨덴 노인들. 노후에 대한 불안을 덜어주는 것은 복지국가의 필수조건이다. |
칼레비 - '그람시 이전의 그람시주의자' 그리고 '마르크스 이론 재해석'
오늘날 한국 진보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닐스 칼레비 이론을 거칠게 정리하면,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람시 이전의 그람시주의 △맑스 이론의 재해석 △소유권 이론과 사회화 이론 △시장이론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씩 짧게 검토해보자.
첫째, 닐스 칼레비는 '그람시 이전의 그람시주의자'였다. 그는 자본가들이 사회의 주도세력이 되는 원인을 단지 물질적 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 그중에서도 '지적, 도덕적' 영향력으로 보았다. 그래서 사민당과 노동계급이 정치적 주도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영역에서 지적, 도덕적 영향력의 장악을 중시 여겼다. 다음의 문구는 칼레비의 '그람시적 발상'을 잘 보여준다. (*이하 인용하는 모든 발언은 '닐스 칼레비' 자신의 표현이다. 인용되는 책인<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모색>(백산서당 펴냄)은 이하 <모색>으로, <임노동자 기금 논쟁과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여강 펴냄)는 이하 <논쟁>으로 표기함.)
"스웨덴에도 배타적인 계급투쟁적 경향이 있다. 이것은 정치적 쇼비니즘(=국수주의)과 마찬가지의 해악을 미치고 있는데.... 그러나 내적인 문화적 우월성이 없다면 모든 외형적인 투쟁은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는 주먹이 아니라 머리를 써서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 - (<모색>, 144쪽)
둘째, 맑스 이론에 대한 칼레비의 재해석이다. 독일 사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당대의 사회주의파 주류는 마르크스 이론의 핵심을 '경제학적' 공황론(=파국론)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유물론과 계급투쟁으로 이해했다. 이에 베른슈타인 같은 수정주의자는 이 두 가지를 비판하며 대안적으로 '칸트의 윤리철학'을 채택한다. 경제학에 맞선 윤리학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칼레비는 '사회학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 핵심은 자본-임노동 관계를 '지배관계'로 해석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이 사회에 참여하게 될수록 마르크스가 말했던 의미에서의 자본주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게 되고 이윤은 더 이상 착취의 수단으로 작용하지 않게 된다... (이윤은) 특정한 조건하에서 착취를 위한 수단으로 전화된다. 이러한 조건을 바꾸면 이윤은 더 이상 착취적인 것이 아니다" -(<모색>, 154~155쪽)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칼레비는 '소유 일반'과 '부르주아적 소유'를 엄격히 구분했다. 요컨대, 노동자 및 중소 상공인에게 과도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부르주아적 소유'만이 공동체적 사회에 반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소유 일반의 폐지나 사적 소유의 폐지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에 대한 요구다.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부르주아적 소유란, 영원한 자연권의 신성하고 불가침적인 소유이자.... 사회로부터의 모든 참여를 배제하는 소유이다." -(<논쟁>, 98쪽)
그런데 이러한 칼레비의 마르크스 해석은 현대적으로 해석할 때, 탁월한 분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맑스의 주저 <자본>은 상품 ⇒ 화폐 ⇒ 자본의 순서로 전개되는데 이에 대해 각각 상품관계, 화폐관계, 자본관계로 표현된다. 상품관계와 화폐관계는 '아직' 자본이 아닌 것이다. 자본관계의 개념적 성립은 '노동력의 구매'가 이뤄지는 시점인데, 이것은 마르크스 자신이 상품과 화폐가 아닌, '지배관계'를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해석했기 때문이다.
칼레비 이론 - '소유권 분할론'과 '지금 당장의 개혁'이 곧 사회화이다.
셋째, 이는 진정 칼레비 이론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소유권 분할론'에 기반한 독특한 사회화 이론이다.
칼레비는 당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 내부에 만연했던 국유화와 계획경제적 발상을 동의하지 않았다. 계획경제적 발상은 본질적으로 중상주의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칼레비에게 소유권이란, "권리의 다발"이었다. 즉, 소유권이란 분할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소유권은 단일한 실체 덩어리가 아니라 법률적인 (처분)권리들의 집합이기 때문에, 그러한 처분권을 단지에서 곶감 빼먹듯이 하나씩 빼먹으면 자본가의 지배를 무기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유권의 변동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소유권의 변동이란 사회성원들 상호간 권리의 [법률적] 이전에 지나지 않는다. 소유권의 변동에서 본질적인 부분은 형식이 아니라 실제 내용이다." (<논쟁>, 94쪽)
칼레비가 주장한 소유권 분할론은 훗날 스웨덴 사민당의 법무부 장관을 지내게 되는 법학자 에스테 운덴의 '물권법' 이론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오늘날 법학의 물권법 편을 보면, 소유권이란 처분권, 점유권, 수익권 등으로 '분할'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전세권'을 들 수 있다. 전세 세입자는 처분권을 행사할 수 없지만, 전세 세입주는 함부로 세입자의 점유권을 침해할 수 없다. 칼레비는 사회화가 언젠가 '한꺼번에' 이뤄지는 것이라는 기존의 우상과 편견을 깨부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8시간 노동법, 노동자안전보호법, 산업재해보상법 등이 소유권의 변동, 즉 생산수단의 사용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소유주'로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이전시키는 조치가 아니고 다른 무엇이란 말인가?" (<논쟁>, 95쪽 )
요컨대, 칼레비는 '사회적 이익'에 반(反)하는 부르주아들의 특권적 지배력을 사회적 이익에 부합하도록 법률적 규제와 입법을 통해 제한하면, 그 자체가 사회화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즉, 사회화는 '먼 훗날'에 하게 될 그 무엇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노동친화적 개혁 일체, 시민사회 친화적인 개혁 조치 일체가 '사회화 조치'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훗날 스웨덴 총리가 된 타에 엘란데르는 칼레비의 책(=<현실에 직면한 사회주의>, 1926년)이 주었던 지적인 충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 책을] 읽으며 우리는 해방감을 느꼈다. 칼레비는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사회주의적 변화를 위한 다른 많은 도구들 중 하나일 뿐이며, 결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었다" (<정치가 우선한다>, 후마니타스, 251쪽)
넷째, 칼레비의 시장이론이다. 중앙집중계획경제를 거부했던 칼레비는 시장경제를 높이 평가했다. 칼레비에게 시장경제는 직업선택의 자유 등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전체주의에 맞서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보통선거권이 정치적 기초를 이룬다면, 시장의 구매력은 경제적 기초를 이룰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만일 자유로운 직업선택과 소비선택에 기초하여 [사회를] 건설하려 한다면, 노동계급의 이익이 사회적 수요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도록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생산물뿐만 아니라 생산요소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가격형성, 그러나 공적이고 조직적 차원의 개입을 통해 구매력의 분배가 시정되어야 한다." (<모색>, 103쪽)
"[권위주의적 사고에 맞서는 측면에서] 투표용지와 구매력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이한 방식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양자는 동질적이다." (<모색>, 103쪽)
1910년대~1920년대에 활약했던 스웨덴 사민당의 닐스 칼레비(1892~1926)는 34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그러나 훗날 스웨덴식 복지국가 건설의 주역이 되었던 당대에 '청년 정치인들'에게 지대한 이론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들은 칼레비의 이론에 힘입어 독일 사민당류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방식과 소련식 공산주의 모두와 이론적 단절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닐스 칼레비의 이론에 기반한 스웨덴 사민주의는 훗날 아들러-칼손이라는 스웨덴 경제학자에 의해 '기능 사회주의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스웨덴 모델'의 실천적 교훈 - 의회주의, 개혁주의, 다수자 정치연합
복지국가 유형론으로 유명한 에스핑 안데르센은 스웨덴 사민주의의 핵심 특징을 △의회주의 △개혁주의 △다수자 정치연합으로 꼽았다. 이중에서도 오늘날 한국적 현실에서 특히나 중요한 것은 '다수자 정치연합'에 대한 전략적 마인드이다. 스웨덴 사민주의가 '처음부터' 복지국가를 기획했던 것은 아니다. 주어진 정치적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개혁주의를 관철하기 위해서 다수자 정치연합을 추구한 결과물이 복지국가로 귀결된 것으로 봐야 한다. 실제로 스웨덴 사민당은 초기에는 자유당과의 정치연합(1917~1928)을, 그 이후에는 농민당과의 정치연합(1932~1950년대), 그리고 이후에는 노동-중산층과의 복지계급동맹을 통해 민주적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적 상황은 스웨덴과 다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후발 산업 국가였던 스웨덴은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활개 치던 독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날 스웨덴식 사민주의 복지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다시, 중요한 것은 '지적, 문화적 영향력'이다. 그리고 스웨덴 사민당이 일찍부터 대원칙으로 삼았던 "국민들의 현재적 관심과 의식에 위배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형' 복지국가를 위하여 - '복지국가 정치동맹'의 전략적 중요성
한국은 유럽과 확연히 다르다. 몇 가지 차이점만 열거해 봐도 △유럽은 정당형성기였고 △양차 세계대전이 우파의 헤게모니를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고 △비례대표제에 기반한 내각제이고 △노동계급이 인구에서 증대되던 산업화 확장기였던 데 반해서, 한국은 △자유주의 정당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전쟁을 통해 진보적 정치 역량이 괴멸되었으며 △소선거구제에 기반한 대통령제이며 △탈산업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과 유럽의 차이점은 동시에 '한국형 복지국가'를 위한 '기회 요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新)자유주의의 경제사적 본질은 구(舊)자유주의라는 점이다. 구매력 부족에 의한 만성적 경기불황, 금융주도 경제체제, 실업의 만연과 노동3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존재 등이 모두 그러하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한국 사회 모순의 현상적 특징으로 5대 불안을 꼽고 있다. 일자리 불안, 주거 불안, 보육-교육 불안, 의료 불안, 노후 불안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5대 불안은 21세기 '신(新)자유주의적' 핵심 특징이자 동시에 1920년대 '구(舊)자유주의적' 핵심 특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5대 불안은 오직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를 통해서만 극복 가능하다. 또한,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를 한국에서 구현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치'의 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한국적 복지국가'를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복지국가를 다수자 정치연합에 기반하여 추진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 형성'이다. 이것은 스웨덴 사민당의 역사로 본다면, 1917년~1928년에 걸쳐 자유당과의 정치동맹을 유지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특징 중 △소선거구제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강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치적 주체형성의 핵심적 과제는 진보적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정치세력이 향후 최소한 10년~20년 동안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서 굳건하게 정치동맹을 맺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 이념적으로는 마치 닐스 칼레비가 만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처럼, '한국적 볼세비키즘'에 다름 아닌 NL(민족해방)/PD(민중민주) 세력과 확연하게 분별 정립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보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복지국가 정치동맹은 소선거구제라는 한국적 특성을 감안한다면 '정치적 단일체' 형태가 가장 바람직하고, 차선은 선거연합 형태다.
그리고 이러한 복지국가 정치동맹은 한국 정치사의 시각에서 본다면, 박헌영/김일성을 비롯한 전체주의자들과 분명하게 단절하고 오히려 민주적/합리적 우파였던 안재홍, 김규식 등과 정치연합을 모색했던 여운형과 조봉암의 '중도 진보' 정치 전략의 21세기적 귀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형 복지국가'는 그 정치적 첫발을 내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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