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300회를 기념해 만난 한윤수 목사의 삶은 그가 돕는 이들만큼이나 간단치 않았다. 1976년 29살의 나이에 청년사라는 출판사를 차렸다. 1970년대 10대 노동자들이 고단한 삶을 적어낸 글들을 야학하던 청년들이 모아 왔고,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이라는 책으로 엮었다. 교회 등을 통해 뿌려진 2만 부의 책은 당시 대학생들이 돌려 읽으며 노동 현실에 눈 뜨게 된 계기가 됐고, 한 목사는 군부의 감시를 피해 자취를 감췄다.
출판사 이후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다 빚만 늘린 채 신학교에 들어갔다. 목사 안수를 받고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를 차린 게 2007년이다. 30여 년 전 책에 적혀있던 10대 노동자의 삶이 화성지역 공장에 들어찬 외국인 노동자에 의해 재현되고 있었다. 그들이 여유를 가지고 스스로 권리를 외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게 그의 목회 활동이 됐다. 외국인 노동자 착취 수법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이를 헤쳐 나가는 한 목사의 노력이 끝나지 않는 한, '오랑캐꽃' 연재 역시 끝나지 않을 거란다.
연재 300회를 맞아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와 한 목사가 4일 만나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 한윤수 목사,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소장 ⓒ프레시안(최형락) |
"목사 된 후 본 외국인 노동자들, 30년 전 우리와 닮아"
프레시안: 청년사를 차렸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그 뒤의 행적은 그렇지 못하다. 어떻게 목사까지 됐는지.
한윤수: 일종의 'IMF 신자(1997년 구제금융 사태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 종교에서 안식을 찾으려는 이들을 비유한 말)'였다(웃음). 그러다 목사까지 됐다.
프레시안: <비바람 속에서 피어난 꽃> 시절부터 '추적'해 보자. 당시 사회적 파급력이 상당했는데.
한윤수: 당시 오스카 루이스의 저서 <산체스네 아이들>을 펴내면서 우리 역사에서도 10대 노동자들의 삶을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했다가 인생이 바뀐 셈인데, 원래 1978년부터 작업을 했다가 타이밍을 놓치고 2년 뒤에 내게 됐다. 처음엔 야학을 통해 공장 노동자들의 수기를 모았는데 분량이 부족해 일기장까지 모았다. 교회 청년회 200곳에서 2만 부를 뿌렸다.
프레시안: 노동 문제와의 인연이 시작된 게 그 책을 내면서부터인가?
한윤수: 관심은 있었지만 직접 문제와 부닥친 게 그 책이었다. 청년회에서 책을 뿌리는 중에 5‧17 계엄령이 터졌다. 마침 매형이 세상을 떠나 산에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집에 수사관들이 찾아와 벽장까지 뒤지고 갔다고 하더라. 그 길로 도망나왔다. 가을쯤 분위기가 잠잠해졌을 때 다시 나와 노동자들에게 인세를 지불했다. 그 후로 30년 동안 그들을 만나지 못했었다.
프레시안: 신학교엔 어떻게 들어갔나?
한윤수: 출판사를 후배에게 넘긴 후에는 경기 파주 오금리에서 가물치 기르고 살았다. 그러나 빚이 늘어 갚을 요량으로 다시 '형제'라는 출판사를 차렸다. 그런데 IMF가 찾아왔다. 당시 책 도매상 1위에서 3위까지 다 쓰러질 정도로 충격이 컸다. 그즈음에 교회를 찾았고 몇 년 더 있다가 신학교까지 가게 됐다. 사실 갈 데가 없었다. 빚쟁이들 피해 숨은 격이라고나 할까.
프레시안: 신학교를 나와서 바로 화성으로 가서 외국인 노동자를 만난건가?
한윤수: 안산에서 먼저 1년 정도 전도사 생활을 했다. 그 때 외국인 노동자들을 봤다. 과거의 기억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들과 연결이 됐다. 30여 년 전에 보던 그 모습이더라. 새카만 모습으로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데 10대 노동자 생각이 났다.
밑바닥 인생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타이밍 먹어가며 잔업하고, 소변 마려울까봐 식당에서 국도 안 나오던 시절, 전기도 끊어 가로등 밑에서 공부했던 그들이나 지금 냄새나는 컨테이너 방 한 칸에 네 명씩 들어앉아 살고, 시끄러운 공장에 일하다 손가락 잘리는 게 뭐가 다른가. 캄보디아 노동자들은 문맹이 많아 은행 계좌도 없다. 브로커들이 돈을 모아 프놈펜으로 가서 전화하면 어머니들이 직접 돈을 받으러 나온다. 30년 전 우리 모습 아닌가.
프레시안: '오랑캐꽃'을 쓰게 된 계기가 된 건가?
한윤수: 사실 노숙인이나 걸인에 대한 관심은 많지 않다.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을 보면 "손에 못이 박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라도 식탁에 앉아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열심히 일해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는 이들이 외국인 노동자다. 게다가 그들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도 없었다. 기록하면 나 아닌가. 이름 없이 고생하는 사람들, 무명씨들을 기록하는 게 내 작업의 키워드였다. 예전에 한국사를 가르치는 한우근 선생이 그런 말을 했다. "머리 나쁜 사람은 기록이라도 해야 한다. 1차 자료를 많이 만들어놔야 나중에 머리 좋은 사람들이 역사를 쓸 거 아닌가"라고. 그들도 우리 역사의 일부다.
"착취 방법 진화하니 퇴치 방법도 진화할 수밖에"
프레시안: 처음에 혼자 시작했나?
ⓒ프레시안(최형락) |
처음엔 혼자였다. 외국인 노동자 데리고 지역 노동부라도 가려고 하면 사무실에 아무도 없어서 앞에서 조개 파는 아주머니가 대신 봐주기도 했다. 다른 노동자가 찾아오면 돌려보내고 내가 돌아오면 알려주고. 지금은 직원이 5명 정도 된다. 일요일엔 통역 2명이 더 붙는다. 주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동네 주부들이다.
프레시안: 화성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어떤 공장에서 일하나?
한윤수: 주로 영세기업이다. 5인 이하 사업장은 퇴직금을 안 줘도 되니 오히려 더 늘어나는 편이다. 부지도 싸서 수도권 다른 지역에서도 많이 찾아온다. 사업을 확장해도 같은 장소에 다른 회사 이름을 다는 식으로 퇴직금 지급 의무를 피해간다.
프레시안: 그럼 주로 퇴직금 때문에 찾아오는 이들이 많나?
한윤수: 아무래도 그렇다. 월급은 제때 주는 편인데 퇴직금을 안주려고 편법을 많이 쓴다. 3가지 유형이 있다. 먼저 무조건, 막무가내로 안 주는 방식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절차를 잘 모르는 점을 악용한다. 태국 노동자의 경우 사람들이 순박해서 순순히 떠나고 나서 후회하는 것도 많이 봤다.
그래서 정부에서 퇴직금 주라고 퇴직금 보험을 만들었다. 다음 수법이 보험을 이용한 거다. 회사 돈으로 보험금을 내야 하는데 월급에서 식대나 기숙사비 명목으로 떼어서 낸다. 자기돈 내고 자기돈 찾아가는 식이다.
세 번째 단계는 국민연금을 빼먹는 거다. 월급에서 공제해 매달 국민연금을 불입하는데 액수나 기간을 속인다. 국민연금은 강제력이 없어서 돈 받아내기도 쉽지 않다. 이런 얘길 '오랑캐꽃'에 썼더니 감사원에서 알아보겠다고 전화가 온 적도 있었다. 악덕 기업이 돈 떼먹는 방법이 진화하니 퇴치 방법도 진화해야 하지 않겠나.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으니 '오랑캐꽃'도 300회가 넘어가게 됐다.
"외국인 노동자, 말로는 도움 안돼"
프레시안: 상담 건수가 많은 편인가?
한윤수: 공장일 때문에 주로 일요일에 찾는 이들이 많다. 갑자기 사장이 쫒아내 불법 체류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이들은 평일에도 찾아온다. 일요일에만 4~50건이 들어오고 인원으로 치면 100명에 가깝다.
직원 6명으로는 당장 해결이 안 된다. 일단 사장을 찾아가보고, 안되면 노동부나 법원까지 가야한다. 작년에 처리한 사건 통계를 매겨보니 22%가 사장 선에서 해결됐고 67%가 노동부, 나머지 11%는 법원까지 가서 받아냈다. 한해로 치면 3000건 정도, 총 3억7000만 원이더라. 올해는 4억 원을 넘길 것 같다.
프레시안: 화성 말고 다른 곳 상황도 그런가?
한윤수: 센터에서 화성 말고도 전국에서 오는 민원을 처리한다. 전국에 외국인 노동자가 50만 명 정도 있다. 그 중 수도권에 60% 이상 몰렸다. 우리 센터 같은 곳이 50여 군데 있는데 활성화는 잘 안 되어 있다. 법원 소송까지 각오하면서 하는 곳이 많지 않다.
정부에서도 나서서 각지에 외국인 근로자 지원센터를 세웠는데 공무원들이라 실적 위주로 돌아가는 감이 없지 않다. 주로 전화 상담과 통역 서비스 정도를 제공한다. 전국에 8~9군데 정도 있는데 좀 더 활용을 할 필요가 있다. 외국인 노동자가 제일 원하는 건 동행이다. 서류로 진정서만 보내주고 말로 해결방법을 설명해주는 걸로는 안 된다. 미국에 가서 일하는 한국인이 50만 명이다. 들어온 수와 비슷하다. 우리가 미국 노동부에 혼자 찾아가서 해결하는 게 쉽나? 옆에서 미국 사람이 따라가 주는 것만으로 힘이 된다. 마찬가지다.
프레시안: 그렇게 동행해주는 상담소가 화성뿐인가?
한윤수: 5군데 정도 있다. 모두 민간단체에서 한다.
프레시안: 퇴직금 문제 말고는 특별히 불거진 게 없나? 산업재해 같은.
한윤수: 많이 좋아진 편이다. 사고야 계속 나지만 그 부분에서는 정부에서 의지를 가지고 보상 문제 등을 해결하고 있다.
ⓒ프레시안(김하영) |
"이들 돕는 게 나의 목회"
프레시안: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생기는 문제를 해결할 방도는 없나?
한윤수: 한국 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직업 50만 개가 있다. 3D 업종이라고 부른다. 그걸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다. 그런데 그들에겐 자유가 없다. 경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근무조건이 좋고 합리적으로 경영하고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곳을 고를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고용허가제가 있어서 사용자가 노동자를 선택한다. 맘에 안 들어도 무조건 1년은 일해야 한다.
프레시안: 고용허가제를 폐지하면 통제가 힘들다고 항의하는 이들이 있다.
한윤수: 그건 옛날에 시어미가 며느리 잡던 얘기나 똑같다. 근무조건 안 좋고 사장이 비인간적인 한계 기업은 도태당해야 한다. 그런 회사 도와주는 건 나라 망신이다. 그런 곳 때문에 잘하고 있는 기업까지 욕먹을 필요 있나. 그들은 노예가 아닌데 1년 일하지 않고 나오면 불법 체류자가 된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다. 현명한 정치가라면 이 부분을 해결해 줘야 한다. 외국 현지에서 노동자를 모집하는 과정에서도 비리가 많다.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프레시안: 외국인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조합을 만들어 권리를 찾는 방법도 있지 않나?
한윤수: 아직은 앞서 가는 얘기다. 일도 힘든데 잘 뭉칠 틈이 없다. 서울에 사는 외국인은 모르겠는데 지방은 그런 상황에 관심을 두기 힘들다. 우리가 그들의 위치를 어느 정도 올려놔야 여유를 가지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일주일 내내 잔업하고 주말에 술 한 잔 마실 틈 있는 게 다다.
프레시안: '코리안 드림'을 품고 온 외국인 노동자 대부분이 만족하지 못하는 게 현실인가?
한윤수: 90% 정도는 만족하고 간다고 본다. 한국인이 인정이 많아 잘해주는 사람도 많다. 10%가 문제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쓰는 이유가 있다. 한국인이 안 하려하는 3D 업종에서 일하는 데다 돈이 적게 들고, 말을 못하고, 결근 안 하고, 해고가 쉽기 때문이다. 그렇게 써서 이익이 나면 그들이 정당하게 받을 돈을 줘야하는데 열에 하나가 안 주는 거다. 그 중에서도 절반은 말로 해결이 되는데, 절반은 악질이다.
한국인의 외국인에 대한 보수적인 성향이 있다. 고쳐야 한다. 너무 민족, 국가 가르는 건 우리에게 맞지 않다. 사실 여부도 불분명한 '배달민족' 타령만 하고 있으면 세계화 시대에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저놈들 왜 와서 설치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몰라서 하는 얘기다. 한국의 주요 수출품에 들어가는 부품은 그들이 다 만든다. TV가 선명하게 나오려면 화면을 청산가리로 닦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인들이 그걸 하겠는가.
프레시안: 운영 예산은 어떻게 해결하나?
한윤수: 대부분이 후원금이다. 첨엔 내 전세금을 빼서 지금은 거의 다 썼다. 한 7000만 원 정도 될 거다. 지금은 소액 후원이 늘어 자력 해결하고 있다. 정부 보조금도 월 200만 원 정도 나온다. 내년에는 보조금이 나올지 모르겠는데 끊기면 그만큼 후원을 늘려야 한다. 힘들어질 수도 있지만 크게 걱정은 안된다. 사정이 어려울 때문 이상하게 도와주는 분들이 나타나더라.
프레시안: 마지막으로 목사가 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이야기 듣지 않는가?
한윤수: 많이 듣는다. 그런데 목회라는 게 따로 있나? 예수님이라도 이런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돕지 않겠나. 소외당하는 이들을 돕는 게 진짜 중요한 목회라고 생각한다.(☞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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