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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믿는 것'이 다시 허용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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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믿는 것'이 다시 허용될 수 있을까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20> '죽음의 도시'와 볼프강 코른콜드

***종이와 스탬프**

츠바이크는 카푸치나베르크의 자택을 나와 잘츠부르크 구시가까지 산보하고 카페에 앉아 그날의 신문들을 읽는 것이 일과였다고 한다. 그는 신문 기사의 구석구석에서 '세계와 인간을 믿는 것'이 허용되던 시대가 급격히 쇠잔해 사라져가는 불길한 징후를 읽어냈을 것이다.

구시가의 한가운데 '토마셀리'라는 오래된 카페가 있다. 나도 잘츠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이 카페에 앉아 신문을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독일어는 못 읽으니, 늘 영자 신문이었다. 내 눈길이 끌려들어가는 기사는 대개 전쟁에 관한 뉴스들이었다. 세계에 흉조가 가득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2004년 여름 잘츠부르크에 도착하기까지 엄청난 고생을 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출발을 며칠 연기한 탓에 이미 티켓을 구입한 두세 개의 연주를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다. 나중에 들으니 내가 단념한 오페라 <아더왕>(헨리 퍼셀 작곡,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지휘)이 일품이었다는 것이어서 어지간히 분한 심정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고생했다고 말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런저런 잡무를 정리하고 짐 꾸리기와 청소도 끝낸 출발 전날 밤, 그것도 밤 12시가 지나 이제 겨우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한숨을 돌리며 무심코 여권을 보다가 나는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재입국 허가기한이 끝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테니 설명을 하자면, 나는 한국 국적자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발행한 패스포트를 소지하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해외여행을 할 수 없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직장과 집이 있고 가족과 친구가 사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내가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는 일본 법무성의 '재입국 허가'가 필요하다. 나는 일본에서 '특별영주'라는 카테고리에 분류돼 있다. 이것은 재일 외국인 가운데서는 상대적으로 가장 안정된 법적 지위이긴 하지만, 그래도 '재입국 허가' 없이 일본 밖으로 나가면 다시 입국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아니, 원칙적으로 '재입국 허가' 없이는 재입국할 수 없다.

'특별영주' 자격 소지자에게 일일이 재입국 허가를 받게 하는 것에 어떤 합리성이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나와 같은 사람이 일본에 살 수 있는 것도 전적으로 당국의 허가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감사히 여기라고 다짐을 하려는 것일까?

언제나 여행을 마치고 나리타 공항에 돌아오면 주위의 일본인 승객들은 안도하지만 나는 혼자 긴장이 풀리지 않는다. 늘어선 줄 속에 서있다가 내 차례가 가까워오면 마음 속의 긴장은 높아지고 머릿속에는 망상이 펼쳐진다.

내 여권의 페이지를 팔랑팔랑 들추면서 입국관리국 직원이 졸린 듯한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재입국 허가가 무효가 되었군요. 이것으로는 입국이 안 됩니다." 놀란 나에게 직원은 말한다. "몰랐었나요? 이거 봐요. 씰이 푸른색이죠?" 틀림없이 푸른 색이다. "핑크색이 아니면 안 됩니다. 지난주 정부의 결정으로 푸른색은 무효가 되었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필사적으로 항의하는 내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직원은 냉담하게 말한다. "자, 다음 사람." 이것이 내게 익숙한 망상이다. 지금으로서는 아직 망상일 뿐이긴 하지만.

그건 그렇고 재입국 허가기한이 지났다는 것을 안 순간 내 마음은 즉시 단념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도,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드의 <죽음의 도시>도, 토마스 햄프슨의 가곡 리사이틀도 단념하자. 비행기 예약 취소요금을 포함한 막대한 손실이 있겠지만 단념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바둥거려볼 정신적 에너지가 거의 고갈된 것이다. 최소한 태연한 얼굴을 하자는 억지로 갖다 붙인 오기는 있다.

그렇게 단념하고 나서 애써 태연하게 친구에게 전화해 그 상황을 보고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단념하지 말라, 비행기 출발시각으로 보아 내일 아침 일착으로 입국관리국에 달려가면 허가를 받아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안절부절 잠 못 이루며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택시를 타고 업무개시 9시 정각에 맞추어 입국관리국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미 중국 사람, 한국 사람, 필리핀 사람 등 아시아계 외국인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 상태라면 내 차례가 올 때까지 반나절은 걸리겠지. 줄서있는 사람들은 모두 생활이 걸려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유학생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동자 같은 사람도 있다. 우는 아기를 달래는 어머니도 있다. 나보다 훨씬 더 불안정한 법적 지위에 놓여 있어, 그러기에 입국 관리국이라는 곳에 익숙해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그들은 업무시간 훨씬 전부터 거기에 와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들보다 나를 우선해 주기를 바랄 수 있는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런 바람 자체가 부도덕한 것이다. 이제 틀렸다. 나는 또 한 번 재빨리 단념했다. 그러나 거기서 조용히 돌아가는 건 너무 화가 치미는 일이었기에 나는 거기에 있던 직원에게 가능한 한 정중한 말로 사정을 이야기했다.

"오늘 오후 1시 비행기를 예약했는데 무리겠지요?" 그 직원은 팔목시계를 힐끗 보고나서 언제나의 망상에 나오는 인물과 똑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뜻밖의 말을 했다. "지금부터 서둘러 공항에 가면 시간에 댈 수 있지 않겠어요? 일회 한정의 재입국 허가라면 공항 입국관리국에서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 건 금시초문이었다. 어제 전화를 한 친구도 몰랐던 것이다. 왜 그런 중요한 정보를 눈에 잘 띄게 홍보하지 않는가. 너무 불친절하지 않은가. 나는 트렁크를 끌고 무더위 속을 공항으로 돌진했다. 공항의 입국관리국에서 시말서 비슷한 서류를 쓰고 나서 일회 한정의 재입국 허가를 받아 겨우 예정했던 비행기에 뛰어올랐던 것이다. 다음은 망명생활에 들어가 국적을 잃고 난민이 된 츠바이크가 쓴 감상이다.

"여행 때마다 하는 신고, 외국환 증명, 국경 통과, 체재 허가, 외국 여행 허가, 체재 신고, 퇴거 신고 등의 법적 수속을 이 수년간 얼마나 많이 해왔는가, 얼마나 많은 영사관과 관청의 대기실에 서 왔는가, 친절한 사람 불친절한 사람, 지루해 보이는 사람, 엄청나게 바쁜 사람 등 얼마나 많은 공무원 앞에 앉아 왔는가, 국경에서 얼마나 많은 검사며 심문을 경험했는가, 하는 것을 전부 다 해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우리가 젊었던 무렵의 자유의 세기, 세계 시민이 찾아드는 시대로 믿고 꿈꾸던 이 세기에, 얼마나 많은 인간의 존엄이 상실되었는가를 감지하는 것이다 (…) 사람들은 끊임없이 힐문받고, 등록되고, 번호 매겨지고, 세밀한 조사를 받고 ,스탬프를 받는다.(<어제의 세계> 中)

프랑스어로 소위 '불법 체류자'를 가리켜 '상 빠삐에(sans papier)'라고 한다. '종이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종이와 스탬프가 없이는 이동도 맘대로 할 수 없는 사람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온갖 종이, 온갖 스탬프가 21세기로 접어든 지금도 얼마나 많은 인간의 존엄에 상처를 주어왔을까.

이런 소동을 겪고 겨우 도착한 잘츠부르크에서는 첫날 밤부터 열이 났다. 그래서 기대하고 있던 <장미의 기사>도 전반부만 보고 그 이상은 단념한 채 막간 휴게시간에 극장을 나와 호텔로 돌아오고 마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죽음의 도시**

며칠 후, 아직 미열이 가시지 않은 채 나는 카페 '토마셀리'에 앉아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드에 관한 긴 기사를 읽었다. 그의 오페라 <죽음의 도시>를 흡족하게 즐기고 난 다음날이었다. 기사의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코른골드의 생애는 '뒤늦게 나타난 조숙한 천재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소년 시절에 이미 말러에게 재능을 인정받고 그의 처 알마로부터 귀여움을 받았다. 그는 좋은 시절의 빈의 문화를 체현한 마지막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이었던 그는 나치에 의한 오스트리아 병합의 위협을 앞두고 친구의 권유로 아메리카로 건너갔다. 할리우드에서 많은 영화음악을 작곡했지만 마침내 이식에 실패한 식물이 메말라가듯이 창작의 영감과 의욕을 잃었으며, 전쟁 중에는 만족스런 작곡을 하지 못하는 시기를 보냈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후 그는 오스트리아에 돌아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이미 그를 키워준 문화는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려, 이전에 그의 음악을 평가해 주던 사람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한 사람의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에게 상처를 준 것은 "코른골드 씨, 잘 오셨어요?"라는 환영인사 뒤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 말이었다. "그런데 언제 미국으로 돌아가세요?"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으며, 그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망명생활의 쓰라림을 견뎌왔는데, 그곳 사람들이 그런 그를 향해 언제 떠나느냐고 정중하게 묻는 것이다."

나는 이 기사에서 코른골드의 음악의 비밀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음악에는 할리우드 뮤지컬과 같은 감미롭긴 하지만 속된 선율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어느 지점에 이르면 반드시 불협화음의 균열이 들어가 커다랗게 흐느적거리듯 휘어진다. 그래서 듣는 사람들은 선율의 감미로움에 안심하고 잠겨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에서 자아내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음악의 특징이며 독특한 매력이기도 하다.

신문 지면에서 눈을 드니 열어젖힌 도어를 통해 문 밖의 광장이 보였다. 세계각지에서 온 다양한 모습의 관광객들이 흥청거리며 오가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거리의 악사의 연주에 갈채를 보내고 있다. 모두가 웃고 있다. 잇몸과 입속이 춤추듯 붉게 빛난다.

평화라고밖에 형용할 수 없는 광경이건만 때때로 나에게는 그것이 코른골드의 음악처럼 휘어지고 뒤틀려 보이는 순간이 있다. 사람들의 즐거운 듯한 이야기소리가 금속성의 잡음처럼 귀를 찌를 때가 있다. 맥락도 없이 멍하니 되풀이해서 나는 생각했다.

'여기서 쟝 아메리는 자살했다.'

오늘 밤도 누군가가 향락적인 오페라를 만끽한 후 가볍게 와인이라도 마시고 기분 좋게 방에 돌아가 갑자기 목을 매는 것이 아닐까? 아메리가 자살한 것은 어느 호텔일까? 혹시 지금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일까? 매년 잘츠부르크에 올 때마다 확인해 보려고 하면서 지금껏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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