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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회색론은 삼성에게 던진 채찍과 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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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회색론은 삼성에게 던진 채찍과 당근"

[시론]대통령의 뜻과 삼성의 선택

삼성에 대해 그동안 말을 아껴 왔던 노무현 대통령이 드디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27일에 있었던 언론사 경제부장 초청간담회에서 금산법 개정과 이재용의 상속을 거론하며 "삼성에게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지적이다.

***"노 대통령 인식변화 높이 평가"**

노 대통령은 이어서 "삼성이 합법만을 주장하지 말고 국민 감정과 사회적 공론을 수용해야 할 것"이라면서 자신은 "흑백논리에 의한 일도양단보다는 회색지대에서의 타협을 중시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노 대통령의 이런 언급이 전해지자 언론사들은 바빠졌다. 삼성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언론사는 노 대통령의 언급 중 그들의 마음에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타협"의 당위성을 언급하며 상황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고 가려고 했다. 덕분에 똑같은 간담회에 참석했던 경제부장들이 전하는 간담회의 골자는 언론매체마다 천차만별이 되었다.

필자 역시 몹시 헷갈렸다. 도대체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지 종잡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문제가 있다고 삼성의 잘못을 인식했으면 정부로서는 마땅히 잘못을 교정함으로써 문제를 치유하는 것이 당연하거늘, 이런 상황에서 회색지대에서의 타협을 거론한다는 것이 도통 필자의 좁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혼돈 속에서도 이번 대통령의 언급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기는 하다.

우선 필자는 아무리 그 메시지가 회색지대와의 타협이라는 가면에 의해 부분적으로 가려지기는 했어도 삼성에게서 문제점을 발견한 노 대통령의 인식변화를 높이 평가한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거의 2년 반 동안 삼성과 관련된 거의 모든 문제에서 외면과 부인으로 일관해 온 현재의 집권층이 비로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대통령의 이 한 마디는 국회에서 삼성을 상대로 국가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는 재경위, 정무위, 법사위의 몇몇 국회의원들에게는 천군만마로 다가올 것이고, 삼성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재경부와 금감위에게는 뼈아픈 반성과 새로운 각오의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부디 이것이 가을날의 한바탕 꿈으로 끝나지 않고 실질적인 성과로 연결되도록 대통령이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줄 것을 기대한다.

***"원칙 훼손하는 타협은 문제 해결을 포기하는 것"**

그러나 필자는 이런 귀중한 메시지가 회색지대론과 타협론으로 채색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안타까운 정도가 아니라, 이런 대통령의 접근방식이 자칫 모든 것을 다시 도로아미타불로 만들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왜 그런가?

먼저 회색지대론부터 생각해 보자. 회색지대론은 흑과 백을 명백하게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흑백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채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아보자는 뜻 정도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 삼성과 관련된 거의 모든 사안은 흑과 백의 판단을 유보할 정도로 모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필자처럼 법학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더라도 흑과 백이 너무나도 빤히 보이는 것들뿐이다.

지금 국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삼성과 관련된 거의 모든 의혹은 명백하게 현행법들을 위반한 '나쁜 짓'들이다. 삼성상용차가 분식회계를 해서 사기대출을 받은 것이 어떻게 합법일 수 있는가? 삼성캐피탈이 고객 몰래 거짓으로 도장을 파고 주민등록서류를 허위로 발급받아 대출서류를 마음대로 조작한 것이 어떻게 합법일 수 있는가? 삼성생명과 삼성카드가 금산법을 위반하여 계열사 주식을 초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합법일 수 있는가?

필자가 보기에 이런 것들은 다 불법이다. 여기에 판단을 유보할 만한 여지가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다음은 일도양단 대신 타협이 필요하다는 대통령의 언급을 생각해 보자. 필자는 이 말은 아주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얼굴에 나타난 표정이 아니라 손에 들고 있는 채찍과 당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섣불리 타협이라는 단어에서 원칙파기와 임기응변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려는 일부의 해석을 경계한다. 오히려 대통령의 언급은 삼성이 국법질서에 순응토록 하기 위해서는 채찍과 당근을 병행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원칙을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원칙을 훼손하는 순간의 타협은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아니라 문제해결 자체를 포기하는 짝짜꿍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금융기관 동원해 산업자본 지배하는 삼성 지배구조**

그렇다면 삼성문제 해결에 있어 원칙은 무엇인가? 그것은 삼성이 치외법권 지대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국법질서에 마땅히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삼성생명과 삼성카드가 초과보유하고 있는 계열사 지분은 적절한 절차에 따라 매각해야 한다.

현재 삼성이 안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에버랜드에서 삼성전자로 이어지는 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축에 삼성생명과 삼성카드라는 금융기관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삼성은 금융기관을 동원하여 산업자본을 지배하는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라는 우리나라 경제질서 설계의 근본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도저히 손쉽게 타협할 수 없는 근본적인 긴장이 초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국법질서에 순응하는 해결책인가? 그것은 금융기관이 더 이상 그룹 계열사의 지배에 동원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만이 국법질서에 배치되지 않는 해결책이다. 여기에는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 삼성은 이런 전제 하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할 것이다.

삼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해결책을 들고 나올지는 누구도 섣불리 짐작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구조에 관해 재계가 이제까지 주장해 온 것처럼 그 누가 구체적으로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고 삼성 스스로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사회는 그저 그것이 국법질서에 부합하는 선택인가에 대해서만 지켜볼 뿐이다.

그러나 이제 공은 진정한 의미에서 처음으로 삼성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대통령이 던진 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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