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고문의 현장에서 그 '어원'을 실감하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고문의 현장에서 그 '어원'을 실감하다"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16> 쟝 아메리와 브렌동크 요새

***브렌동크**

2002년 5월 2일 늦은 밤, 나는 암스테르담을 경유해 브뤼셀에 도착했다. 이렇게 외국의 공항에 내리는 것은 몇 번째일까? 셀 수 없을 정도로 경험한 일인데도 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열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면 언제나 불안한 심정이 된다.

일본에서부터 동행한 촬영팀과 간단한 미팅을 한 후 약 스무 시간 만에 호텔 방에서 몸을 뻗고 눕는다. 내일부터 나흘 동안 TV 프로 한 편의 촬영을 마치고자 하는 강행군이다. 나의 오랜 희망대로 펠릭스 누스바움(Felix Nussbaum)이라는 화가를 다루게 돼 그의 은신처가 있던 벨기에 브뤼셀과 태어난 고향인 독일 북부의 오스나브뤼크를 서둘러 돌게 된 것이다.

다음날 먼저 브렌동크 요새를 향했다. 나는 쟝 아메리(Jean Amery)의『죄와 벌의 피안』을 통해 이 요새의 존재를 알았다. 그리고 TV 프로의 기획 단계에서 이번 촬영에 꼭 이 요새를 넣어달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브렌동크 요새는 브뤼셀과 안트워프의 거의 중간 메헤렌이라는 지방도시의 근교에 위치한다. 1906년부터 14년에 걸쳐 건설되어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실제로 요새로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벨기에를 점령한 독일군이 이곳을 강제 수용소로 이용했다. 현재는 국립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참호로 둘러싸인 직사각형의 부지에 콘크리트로 만든 요새가 울퉁불퉁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원래는 전체가 흙으로 덮인 지하요새였다. 이곳을 독일군이 수용소의 수감자들에게 총 25만t이라는 방대한 양의 흙을 손으로 파게 하는 강제 노동을 시켜 요새를 드러나게 한 것이다. 참호에 걸린 작은 다리를 건너 정면의 문을 들어가 지하의 어두운 내부를 천천히 걸어 앞으로 나아간다. 촬영팀이 나의 이런 뒷모습을 찍으며 따라온다.

정면 현관을 들어가 오른쪽에는 이 수용소를 관리하던 SS(나치 친위대)의 집무실이 있었다. 더 들어가면 통로는 막다른 골목이 되어 T자형의 세 갈래길이 된다. 좌우는 감방이 죽 늘어선 통로다. 우리들은 오른쪽으로 꺾어 희미한 빛을 내는 전등이 밝히고 있는 갱도와 같은 통로를 천천히 나아간다. 무엇보다도 견디기 어렵다고 느끼는 건 습기다. 원래가 지하요새로 설계되었기에 통기가 지극히 불량한 것이다. 통로의 벽과 천정은 이슬과 스며나온 지하수로 언제나 젖어 있다.

통로의 끝까지 가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지니 곧 고문실의 입구가 있었다. 아메리가 고문을 당한 방이다. 방으로 가는 좁은 통로는 두 번 꺾어져 있다.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주의 깊게 계산되어 있는 것이다. 창은 없고 바깥의 빛은 전혀 새어들지 않는다. 인두 같은 도구가 놓여 있다. 철 갈고리가 천장의 도르래에 매달려 있다. 바닥에는 끝이 뾰족한 목제기구가 놓여 있다. 고문 집행자가 갑자기 사슬의 조임을 풀면 천정에 매달린 희생자는 그 기구에 세게 떨어져 무릎이나 정강이가 으스러진다.

"(…) 갈고리가 손을 뒤로 해 묶은 끈의 매듭에 걸려, 사슬로 바닥에서 1m 높이의 공중에 매달린다. (…) 양쪽 어깨가 부서져 튄 것 같다. 그 감각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프라이팬에서 공이 튀어나오듯이 양쪽 어깨 관절이 탈구되면서 나는 허공에서 떨어졌다. 어깨에서 뽑혀나간 뒤로 묶인 손으로 매달려 그 손이 머리 위에서 비비꼬였다. 고문(torture)은 라틴어의 탈구시키다. 어긋나게 해 비틀다(torquere)에서 유래한다. 실로 경탄할 만한 언어적 명찰(明察)!".

고문실의 살짝 경사진 바닥에는 가느다란 골이 패여 있다. 희생자가 바닥에 흘린 땀, 눈물, 피, 배설물 등의 온갖 액체가 그 골을 타고 배수구로 매끄럽게 흘러내려가는 것이다. 참으로 정밀한 설계라고 하겠다.

며칠 아니 몇 십 일 동안 이 밀실에서 괴로움을 당해도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것이다. 아메리는 고문을 강간에 비유하고 있다. 그것은 "그 어떤 도움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을 때, 실존의 절멸 속에서 완료된다"고.

일단 요새 밖으로 나와 둘레를 따라 걸었다. 처형장은 예전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적당히 늘어선, 끝이 뾰족한 갈색의 말뚝은 희생자를 묶어 총살하기 위한 것이다. 4m 높이 정도의 벽이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는 각진 부분에 침목과 같은 굵은 재목이 비스듬하게 걸쳐져 있다. 재목으로부터 녹슨 사슬이 세 개쯤 늘어져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던 것이다.

***오스나브뤼크**

독일 점령 하의 벨기에에서 망명 유대인인 쟝 아메리가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고 있을 때 브뤼셀의 은신처에서 한 사람의 화가가 누구에게도 보일 희망이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화가의 이름은 펠릭스 누스바움이라고 한다.

그가 태어난 고향은 독일의 오스나브뤼크. 2000년 여름 그 곳에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설계한 미술관 펠릭스 누스바움관이 새로 개관했다. 여기에는 누스바움의 작품 17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펠릭스 누스바움은 1904년 12월에 태어났다. 대학에서 가까운 고급 주택가 슈로스가에 유복하고 평화스러웠던 시절의 누스바움의 집이 남아 있다. 지금은 앞뜰에 조촐한 표지판이 있을 뿐 누스바움과는 전혀 상관없는 가족이 살고 있다.

철물상이었던 아버지 필립은 당시의 전형적인 동화 유대인이었다. '기사 전우회'의 회원으로 애국주의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는 많은 독일 유대인이 종군했는데, 그것은 국가가 요구하는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앞장서서 이행하는 것으로 다수자와 같은 '동화 독일 국민'이라는 인지를 얻으려는 심리의 표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 세기에 걸친 신분차별로부터 벗어나기를 기대했던 그들은 '국민'으로서의 평등이라는 근대 국민국가의 약속을 믿어 스스로를 '국민'이라는 관념에 동일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나치즘이라는 반동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내성적인 아이였던 펠릭스는 유대인 초급학교에 다닌 후 일반의 실과학교로 옮겼지만 다수자인 그리스도교도의 급우들로부터 "유대인 자식이 강가로 내려왔다네. 돼지 자식을 목욕시키러"라는 구전 동요로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펠릭스는 일부러 마음에 두지 않는 척했다고 하지만 이런 경험은 사실은 다수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소한 것이 아니다. 나 자신 이 에피소드를 알았을 때, 초등학교 동급생들로부터 "죠-센, 죠-센, 파가(바보) 취급 하지 마. 같은 밥 먹고 토코(어디)가 다르지"라는 노래로 놀림을 당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재일 조선인 1세들의 일본어 발음을 비웃기 위해 일부러, '바가(바보)'를 '파가', '도코'를 '토코'라고 하며 놀리는 것이다. 지금도 세계의 각지에서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펠릭스들이 분한 눈물을 참고 있을 것이다.

독일인 다수자에의 동화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의 유지, 이 양자의 갈등이 펠릭스 누스바움 예술의 모티프였다. 그것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 22세 때의 작품 <두 사람의 유대인>이다.

유대교의 예배당인 시나고그의 내부에서 예배를 위해 긴 천을 머리에 쓴 두 남자를 그린 작품이다. 그 중 젊은 쪽의 남자는 화가의 자화상이리라. 역사적으로 보아 시나고그의 내부를 그린 그림은 드물며 종교적 의장을 몸에 두른 유대인의 자화상도 역시 드물다. 그 이유는 우상숭배를 금지한 전통적인 유대교 공동체에서 구상적 그림을 그리는 것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확고한 전통에 의거한 유대교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다수자에 완전히 동화돼 버린 것도 아닌 누스바움의 양의적인 정체성의 모습이 그에게 이 그림을 그리게 했던 것이다.

전에 이 시나고그가 있던 장소는 펠릭스 누스바움관에서 걸어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차장과 같은 빈터가 되어 있다. 이웃에 있는 근사한 훌륭한 건물은 지방행정부 청사로 측면 벽의 부조에는 시나고그가 1938년 11월 9일, 즉 나치의 선동으로 대중들이 독일 전역에서 반유대 운동을 벌인 '크리스탈 나하트'의 밤에 파괴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 때 이미 브뤼셀에 망명해 있던 누스바움은 고향으로부터의 불길한 소식을 어떤 심경으로 들었을까.

이 고장의 지방사 연구가인 페터 융크 씨의 설명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오스나브뤼크에 약 600명의 유대계 시민이 있었는데, 종전 후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불과 6명이었다. 그 6명은 배우자가 '아리아인'이었기에 수용소에 이송되는 것이 나중으로 미루어져 그대로 종전을 맞았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이는 추방당하고, 어떤 이는 수용소에 보내졌다. 누스바움의 부모도 형도 살아남지 못했다.

번역 : 김혜신 가쿠슈인대학 강사(미술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