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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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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신간] '독립기자'가 발굴한 역사추적기

<대한민국 다큐멘터리>(인물과 사상사 간)은 2001년 10월부터 '언론사 소속 기자'이기를 거부하며 독자적인 탐사보도 영역을 개척해온 정지환씨(현재 '시민의 신문' 취재부장)이 소위 '독립기자' 시절 발굴해낸 '비공식 대한민국 역사추적기'다.

특히 저자는 친일파과 극우 엘리트들이 형성한 '공식 대한민국 현대사'의 허구성을 뒤집을 사례들을 집중적으로 취재했다.

이 책에는 일본 헌병 출신으로 해방 후 권력 2인자까지 올랐던 김창룡과 현대 한국 사학계의 태두라고 불리는 이병도의 기묘한 인연, 서북청년단 활극사건,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가문의 치부를 들춘 '화가와 공안판사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낮의 대통령'과 '밤의 대통령'의 권언유착 비사 등 수십편의 '비화'들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 뽑은 몇가지 기사들을 발췌 요약해 소개한다.

***이병도와 김창룡의 기묘한 인연**

김창룡(1920~1956)은 함남 영흥에서 태어났다. 일본 헌병으로 독립군 체포와 고문에 앞장선 그는 해방 후 조선 경비대 3기생 출신으로 육군 특무대장이 되었다. 그는 '멸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백범 김구 암살 등 수많은 정치공작을 자행한 장본인으로 지목받았다. 36세의 나이로 죽은 김창룡의 묘비는 이병도가 써주었다.

'고 김창룡 중장 묘갈'이라는 제목의 비명에는 "조국 치안의 중책을 띠고 반역분자 적발에 귀재의 영명을 날리고 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 중장은 돌연 괴한의 저격을 입어 불행히도 순직하였다. 이 참변을 듣고 뉘 아니 놀래고 슳어 하랴. 아! 이런 변이 있을가.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 함이 이구동성의 외침이었다. 아-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는 내용들이 적혀 있다.

비명에는 '문학박사 이병도 지음'이라고 적혀 있다. 김창룡은 민간인들을 빨갱이로 몰아간 '범어산 무장공비 침투사건'이라는 '원조 총풍 사건'을 조작했다. 김창룡의 정치공작 중에서도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사건이다. 암살범 안두희는 세상을 뜨기 전인 1992년 "조선 호텔 앞 대륙상사로 위장된 특무대 사무실에서 김창룡을 만나 백범 암살을 지시 받았다"고 증언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바 있다.

***서북청년단 활극 사건**

관서(평안남.북도와 황해도)와 관북(함경남.북도)의 끝 자를 따서 명칭을 지은 서북청년단은 해방 이후 38선이 그어지면서 월남한 이북 5도의 우익 청년들이 결성한 반공단체이다.

공식적으로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1월30일 결성되어 1948년 12월8일 대한청년단에 통합되기까지 만 2년 동안 활약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1946년 3월부터 시작되어 6.25 동란 중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서북청년단 2대 위원장을 지낸 문봉제의 주장이다.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 연재물 중 제30화 '서북청년회'를 쓴 문봉제의 증언에 따르면 평남동지회와 평안청년회라는 전신이 있었으며 서청이 한창 날릴 때는 회원수가 7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철저한 극우로 일부에서는 서청을 '백색테러단'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문봉제는 "우리의 배후에선 이미 당시의 군정 경찰청(청장 조병옥)이 있었고 행동의 철학은 이승만 박사로부터 나오고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면서 "우리는 많은 경우 경찰과 음으로 양으로 손잡고 있었다"고 말했다.

문봉제의 증언에 따르면 8월21일 평청은 양평동 경방 고무공장을 습격해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소속 노동자들을 '장작개비로 개 패듯 패고' 철수했다. 장택상 수도청장은 '각본에 따라' 집단적으로 남의 공장에 몰려와서 테러를 벌이던 1백50여명의 평청 대원들을 현행범으로 체포해 트럭으로 싣고 가다가 한강을 건너자마자 모두 풀어주었다.

문봉제는 이어 "평청의 극우운동은 경찰과 손을 잡은 뒤 가속화됐지만 돈암장(이승만이 이화장으로 옮기기 전 머물던 곳)의 영향도 적지 않은 것"이라고 증언한다.

그는 "사실 평창이 활발해지면서 우리는 돈암장을 한 달에 한 번 정도 찾았다"면서 "평청의 가열한 행동철학이 사실 돈암장에서 비롯되고, 거기서 고무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별로 의식하려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화가와 공안판사의 운명적 만남**

미술사가 이태호 명지대 교수는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두 건의 혁명재판소 판결서(1심.항소심)을 찾아냇다. 기록에 따르면 화가 오지호는 1961년 2월초 전남민족자주통일협의회(전남민자통) 결성 대회에 준비위원과 의장단 총무위원장으로 참여했다. 민자통은 혁신계 사회단체의 전국적인 통일운동 연합체에 불과했으나 5.16 쿠데타 세력에 의해 용공.친북단체로 몰리게 된다.

필자가 광화문 한글회관에 있는 현대사자료실(일명 보림재)에서 찾아낸 '한국혁명재판사'는 5.16 쿠데타 세력이 그 해 11월 편찬한 것이다. 이 책 제 4집에는 현대사의 격랑과 정면으로 씨름했던 한 예술가와 현대사의 격랑에 무력하게 굴종했던 한 법조인의 진면목을 증언한 4장의 낡은 흑백사진이 있다.

이 중에는 1962년 1월16일 이회창 판사 등 5명의 재판부가 참석한 가운데 오지호 등 3명의 전남민자통 사건 관련자들에게 실형을 선고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이 있었다.

혁명재판소(혁재)의 재판관은 혁재 소장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승인을 얻어 임명했는데, 선임 과정이 꽤나 까다로웠다. '한국군사혁명사'에는 재판관 임명 전에 개개인의 '경력과 혁명정신, 인격, 덕망,법률소양,건강 등을 다각적으로 심사 검토'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나아가 재판관들은 박정희 앞에서 '충성의 선서'까지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혁재가 다룬 재판 중에는 국민의 지지를 받은 부패.독직 사건도 있었지만 쿠데타 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반대.비판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인권을 유린하면서까지 무리하게 조작한 사건들도 적지 않았다.

조용수 사장을 억지로 간첩으로 몰아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든 민족일보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당시 이회창씨가 사형선고를 내린 1심 제2재판부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사실은 이제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당시 이회창씨가 26세의 젊은 판사로서 권력의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차출 명령을 거부하기에는 군부의 힘이 너무 셌다는 일부의 반론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의 정치재판'에 협력한 이회창씨에 대한 비판은 그 정당성을 분명하게 갖는다고 할 것이다.

***'낮의 대통령'과 '밤의 대통령'의 권언유착 비사**

현재는 고인이 된 방일영씨를 정계와 언론계에선 흔히 '밤의 대통령'이라 부른다. 방일영은 박정희의 둘도 없는 술친구였다. 박정희가 요정에 가보면 항상 화술과 주량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방일영이었다.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자신을 '대통령 형님'이라 부르는 방일영을 '우리 나라에서 제일 팔자가 좋은 사람'이라고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말이 '낮에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밤에는 임자가 대통령이구먼'이었다고 한다.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에도 자세히 나와 있는 이 비사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을 '주야로 이끌었던' 권력자들의 추한 알몸을 다시 한 번 목도하게 된다. 한 편 이런 둘도 없는 '술친구'이자 '형님과 아우' 사이에서는 천하의 '사상논쟁'이나 '색깔론'도 전혀 힘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도리어 '조선일보'는 이후 '박정희 신화 만들기'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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