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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곳곳을 누빈 방대한 국토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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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곳곳을 누빈 방대한 국토교과서

[신간] 다시 쓰는 택리지

인문지리 답사가로 유명한 신정일(50) 향토현문화연구소 소장이 2백50년전 조선 후기에 쓰인 이중환의 <택리지>를 업데이트하는 야심찬 기획을 시도했다.

***전국 팔도의 산천에 어린 역사와 문화 기록**

<택리지>가 사화(士禍)에 연루돼 유배로 젊은날을 보내고, 실의에 빠져 살던 이중환이 20여 년 동안 전국토를 발로 밞는 방랑생활 끝에 쓴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라면 신정일의 <다시 쓰는 택리지>(휴머니스트 간)는 <택리지>를 교본 삼아 20년간의 답사 끝에 시도한 ‘문화역사지리서’ 다.

신정일은 이 책을 쓰기까지 한강 5백14㎞, 낙동강 5백17㎞, 금강 4백1㎞, 섬진강 2백12㎞, 영산강 1백38㎞, 만경강 98㎞, 동진강 54㎞. 도합 2천㎞의 강들을 상류의 발원지에서부터 시작해 하류 끝까지 두 발로 직접 걸었고 산도 3백곳 이상을 올라가 보았으며 1천여회의 문화답사로 전국을 누볐다.

<다시쓰는 택리지>는 총 5권으로 <택리지> 체제를 본떠 '팔도총론' 편 3권(1권 경기.충청 편, 2권 전라.경상편, 3권 강원.함경.평안.황해편)이 우선 출간됐고 조만간 ‘복거총론’에 해당하는 지리.생리.인심.산수로 구성되는 4~5권이 나올 예정이다.

신정일은 행정구역 중심의 사고에서 탈피해 생활권 중심으로 접근하기 의해 산줄기와 하천을 중심으로 우리 국토를 파악하고 각지의 역사와 문화, 경제활동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지역을 대상으로 한 탓인지 발로 띈 흔적이 느껴지는 기록과 문헌에만 의존한 평범한 기록이 혼재해 있다.

다음은 이 책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몇 편의 글을 요약 소개한다.

***여주는 국도의 상류지역에 있다**

죽산 남쪽에 있는 구봉산은 산이 고리처럼 돌아서 산성을 만들만 하고 경기와 충청 한복판에 있다. 물길은 충주에서 강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오는데 원주.여주.양근을 지나고 광주 북편 회룡진에 이르러서 한양의 면수(面水:바로 앞에 있는 물)가 된다.

여주읍은 강 남쪽에 위치하여 한양과의 거리는 물길로나 육로로나 2백리가 못된다. 태백에서부터 발원한 남한강이 흘러내리며 만드는 여러 물굽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가운데 하나가 신륵사 부근일 것이다.

한강 상류인 이곳을 이 지역 사람들은 여강(驪江)라고 부르는데, 주변의 풍경과 수려함이 하도 뛰어나 예로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조선 초기의 학자인 김수온은 그가 지은 <신륵사기>에 “여주는 국도(國道)의 상류지역에 있다”고 썼는데, 국도는 바로 충청도 충주에서부터 서울에 이르는 한강의 뱃길을 말한다.

신작로나 철길이 뚫리기 전까지는 경상도와 강원도, 충청도의 물산들이 한강의 뱃길을 타고 서울에 닿았으므로 한강 뱃길을 ‘나라의 길’로 불렀던 것이다.

정선 아우라지에서 띄운 뗏목이 물이 많은 장마철이면 서울에서 사흘이면 도착했다는데 1973년 팔당댐이 생기고 1978년부터 충주댐 건설에 들어가면서 ‘나라의 길’이라고 부르던 뱃길은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산은 낮고 옥야는 평평한 평택**

경기도 화성시 남서쪽에 자리 잡은 평택시는 고구려의 영토로 하팔현으로 불렸으나 1914년 양성현과 직산현의 일부를 떼어내어 진위군이 되었다가 1924년에 평택으로 바뀌었다.

평택은 들이 넓어서 쌀의 본고장, 즉 경기미의 본고장이다. 평택은 서울에서 삼남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평택군지>에 의하면 청북면 고잔리의 고잔포는 한강 하류를 거쳐서 마포나 인천으로 가는 뱃길 중에 중요한 포구였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남북으로 통하는 큰 길이므로 사신과 빈객의 행차가 잇달아서 영접하고 전송하고 공제하느라고 넉넉하지 못함이 염려된다”고 하며 평택 고을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벼슬아치들이 묵어 가던 객사마저 “터가 낮고 습하여 기둥과 서까래가 썩고 위태한 곳이 거의 반이나 된다”고 하였을만큼 가난했던 곳이 바로 평택이었다.

그러나 평택 일대에 철로와 길이 뚫리고, 한국전쟁 전까지 숯을 구어 팔던 송탄시의 신장동 일대에 미군과 비행장, 기지촌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도시로 변모했다. 1995년 1월 송탄시와 통합된 지금은 서해안 고속도로와 평택항이 건설되면서 활기를 띄고 있다.

평택의 북쪽에 오산시가 있다. 조선조 말까지 수원 관할이었던 오산이 읍으로 승격된 것은 1960년의 일이다. 1970년에는 화성군 청사를 수원시에서 오산읍으로 옮겼고, 1989년 1월 오산시로 승격되었다.

***고봉산 자락 고양**

조선 태종 때 고봉산 자락의 고봉현과 덕양현의 글자 하나씩을 합하여 고양현이 되었고 성종 2년(1471)에 군이 된 고양은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큰 도로였던 관서로가 지나는 통로였다.

한양에서 의주까지 이어졌던 관서로에는 큰 역관 12개가 있어서 조선과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이 머물며 쉬었는데, 벽제관은 그 첫 번째 역관이었다.

중국의 사신들은 서울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예의를 갖추어 입성하는 것이 정례였다.

사신이 한양에 접어들면 현재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자리에 있던 모화관에서 임금이 몸소 중국의 사신을 접하였는데, 벽제관은 모화관에 버금갈 만큼 중요한 곳이다.

1930년대만 해도 벽제관이 남아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일부가 헐렸고 한국전쟁 때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이렇듯 관서 지방 사람들이 서울을 지날 대 꼭 들러야 했던 벽제관은 지금은 건물의 초석만 남아 있고 ‘국가사적 144호’라는 표지판이 무색하게 벽제관 터는 폐건축자재와 흉물스럽게 방치된 포장마차에 포위당한 채 번성했던 옛 시절을 부는 바람결에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고양시 일산구는 옛 시절 서울과 개성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1905년 경의선이 개통되었으나 일산 토박이들은 그 덕을 보지 못했다.

나라 안에서 실리와 계산이 가장 빠르다고 소문난 개성과 서울 상인들 때문이었다. 그때 떠돈 말이 ‘실속 없는 일산 사람’이었고, 일산 사람들은 두 도시 사람들로부터 받은 시달림으로 인해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을 보면 “저 놈을 개성으로 보낼까 서울로 보낼까”라고 했다 한다.

***고부마을에 얽힌 사연· **

정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이다. 고부군이 지금은 정읍시에 딸린 면이지만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정읍이나 부안보다도 더 세력이 컸으며, 쌀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조선조 말엽 전주 다음으로 번창했던 고부가 일개 면소재지로 전락한 이유를 무엇을 설명하겠는가. 조선 영조 시절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경상도 안의 사람이었던 정희량이 주동 세력으로 끼었다는 이유로 안의 땅 절반 거창에, 절반은 함양에 쪼개 주고 안의 사람들의 벼슬길을 막았던 적이 있다.

고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 철도시설이 통과하면서 정읍이 중심지가 되자 고부가 면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강변도 나오지만, 분명한 것은 고부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부안.고창.정읍으로 쪼개지면서 정읍시에 딸린 하나의 면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조선시대에 부산에서 서울로 가려면 영남대로를 이용해야 했다. 세 가지 길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 좌도가 열닷새, 즉 보름길이었다. 울산.경주.영천.의흥.의성.안동.풍기.죽령.단양.한양까지는 수로를 이용하기도 했다.

두 번째로 중도는 부산.밀양.청도.대구.안동.선산.상주.조령.음성.이천.광주 등을 지나 한양에 이르는 길로 열나흘, 즉 14일 길이었다. 마지막으로 우도는 김해.현풍.성주.금천.추풍령.영동.청주.죽산.양재를 지나 한양에 이르는 열엿새 길이었다.

철길이 놓이기 전에 영남 사람들이 서울로 갈 때는 대체로 청도를 거쳐서 가는 두 번째 열나흘 길을 택하였다.

중도의 조령(鳥領)이 있는 문경새재는 새가 날아서 넘기 힘들 정도로 험한 고개라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고, 억새풀이 우거져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문경새재는 나라 안에서도 중요한 천연의 요새임에도 불구하고 호란이나 왜란 때에 제대로 제대로 방어된 적이 없었다. 임진년 4월 4월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새재를 넘었는데, 그들은 조령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세 차례나 수색대를 보내어 한 명의 조선군도 배치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서야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넘었다고 한다.

그들은 곧바로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조선의 방어군을 전멸시켰다. 방어의 요지라는 중요성은 되풀이되면서도 실제로 새재에 산성과 관문이 들어선 것은 임진왜란을 치르고도 1백년이 더 지난 1708년이다.

문경읍 쪽에서 고갯길을 따라 10km 남짓 떨어진 산 속에 첫째 관문인 주흘관(主吃關)이 솟아 문턱을 이루었고 이곳에서 3.1km 떨어진 곳에 둘째 관문인 조곡관(鳥谷關)이 섰고, 다시 3.5km 떨어진 곳에 셋째 관문인 조령관(鳥嶺關)이 솟아 새재 관문을 이룬다. 그리고 남에서 북으로 4.5km에 이르는 돌성을 둘렀는데, 지금은 허물어져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1925년에 문경읍 각서리엣 해발 5백48m의 이화령을 넘어 충청북도 괴산군으로 가는 산길에 신작로와 터널을 뚫자 해발 6백42m의 새재는 역사와 전설이 서린 채로 버려진 길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70년대 중반에 들어 퇴락했던 관문들을 복언하면서 명소로 알려졌다. 이렇듯 한갓지고 소외받았던 문경새재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텔레비전에서 대하사극 <태조 왕건>이 방영되면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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