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5일은 74번째 광복절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한반도의 식민지화는 한국 사회를 여러 층위에서 왜곡하고 뒤틀리게 했다. 식민지 잔재의 불철저한 청산은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국가, 국민이 행복한 나라로 나아가는데 여전히 걸림돌이 되고 있다.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정리와 청산 없이는 불행한 과거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크다.
근래에 세계 4대 강국에 둘러싸인 한반도가 다시 격랑에 휩쓸리고 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동서 간 이념 대립의 세기에는 팽팽한 냉전의 격전장이었던 한반도는 이제 자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시대 들어 세계 4대 강국의 이해관계가 맞붙는 새로운 전쟁터가 되고 있다. 미중 대결, 남북 이슈, 한일 갈등 등 한반도를 둘러싼 해결 과제는 한둘이 아니다. 혹자는 현재의 상황을 구한말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만큼 한반도가 처한 지금의 상황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이다. 외부의 변수가 많은 만큼 내부의 정체성과 균형을 바로잡지 않으면 지난 근·현대 1세기의 ‘고난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광복 74주년에 돌아보는 보수와 진보
제도주의 학파는 한 사회의 풍요와 빈곤은 그 사회의 인적·물적 자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제도와 시스템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본다. 자원이 아무리 풍부하더라도 이를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이를 운영할 사람이 없다면 오히려 풍부한 자원은 다양한 갈등과 폭력의 원인이 된다고 본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풍부한 자원이 다양한 갈등과 폭력의 원인이 된 사례를 이미 충분히 보았다. 중동의 석유가 그랬고,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가 그랬다. 마치 좋은 약도 그것을 감당할만한 체력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는 독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라 하겠다.
민주공화국 선언 100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 사회는 여전히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이를 제대로 운영할 인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 다른 국가들에 비해 단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었다고 평가받지만,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의 모습을 구현하기에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1919년 4월 한반도의 국가 정체성을 민주공화국으로 선언한 것은 보수와 진보 어느 쪽도 부정하지 않는 합의의 결과다. 건국 이후 민주공화국의 완성을 위해 다양한 정치세력들은 각자의 방향을 제시하고 노력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와 공화정을 역사적으로 시민의 힘을 통해 쟁취했던 유럽과 달리, 민주주의와 공화정이 쟁취보다는 주어진 측면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각자의 정체성과 방향은 모호하다. 특히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본령은 어떤 정체성이나 가치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인데, 대한민국의 보수가 지키고 보호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와 닿지 않는다. 그렇기에 국민이 점점 보수의 정체성과 실체적인 모습에 실망하고 멀어지는 것이 아닌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치에서 보수와 진보의 문제는 근대가 태동하고 자유로운 개인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고대와 중세에는 신(神)이나 하늘(天)과 같은 형이상학적 존재가 실재한다고 믿었고, 이 믿음을 불신하는 이들은 마녀사냥이나 사문난적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당시 사회에서 제거되었다. 때문에 중세 유럽에서는 완전무결한 신의 존재 증명을 위해 논리학과 논증학이 발달했고, 중국과 조선의 성리학도 천명을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사서삼경을 암송했다. '신'과 '천'이 실재한다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다양한 악과 모순이 계속되자 일부 지식인들은 신과 천 같은 것들은 실체가 없는 이름뿐인 존재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중세말의 유명론(唯名論)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실재하는 것은 인간 개개인 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대체로 근대를 연 당시의 진보주의자들에게 실재하는 것은 '살아있는 개인' 뿐이었기에, 이런 개인들의 자유와 행복을 어떻게 증진시키느냐가 중요한 화두였다. 그렇기에 근대 초기의 자유주의는 곧 진보주의였고, 진보주의는 자유주의였다. 반면에 보수주의는 중세 신학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신과 같은 형이상학적 존재들이 여전히 실재한다고 믿었고, 신만으로는 설득력이 떨어지자 국가와 민족과 같은 사회적 구조물이 불완전한 개인보다 선행한다고 믿었다. 단순화해서 보자면, 근대 진보와 보수의 인간학은 개인을 믿을만한 존재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성선에 기초해서 인간의 가능성을 믿으면 진보에 가깝고, 성악에 기초해 인간의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으면 보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민족반역자 처벌을 방기한 한국 보수, 도대체 정체성은?
대체로 유럽의 진보와 보수는 이런 사상과 철학에 기초해서 정책을 만들고, 정치 활동을 해왔다. 유럽의 진보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토대로 자유롭고 행복한 개인을 만드는 데 역점을 두었다. 반면에 보수는 개인보다 종교나 민족과 국가를 우선시했다. 그렇기에 민족과 국가의 가치를 극대화하면 나치즘과 파시즘 같은 극우민족주의와 국가주의로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유럽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지켜야 할 것은 종교와 신이나 국가와 민족 등으로 비교적 명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는 비시정부 4년 동안 독일 나치즘에 부역한 이들 중 1만여 명을 처형했고, 4만 명에 가까운 이들을 수감했다. 무엇보다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과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진보와 보수의 모습은 한국 사회로 오면 '회수를 건넌 귤'처럼 정체성이 모호해진다. 자칭 보수라는 이들은 국가와 민족보다는 개인과 개인 재산의 자유를 중시하고, 진보를 자임하는 이들이 오히려 민족과 국가를 더 많이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보수주의자들이 개인의 자유를 말하면서 개인의 인권과 같은 기본적인 시민권을 함께 말하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무엇에 기초해서 자신들의 보수론과 진보론을 펼치고 있는지,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최근 한일 갈등은 정상적으로 보자면 보수주의자들이 훨씬 더 분노하고 강경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게 정상이다. 개인을 중시하는 진보주의자와 자유주의자에게 민족과 국가의 지나친 강조는 자유로운 개인의 성장과 행복을 가로막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인 반면, 보수주의 고유 철학은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과 우위성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국가와 민족 문제에서 자신들의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행동한 역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정상적인 보수주의자라면 식민지 잔재 청산에서 누구보다 근본적인 처리를 주장해야 하며, 신자유주의 시대에 강대국의 경제 침탈에 단호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국가나 민족 문제에 있어서 단호하고 분명한 입장을 가지지 않는 보수주의는 제대로 된 보수주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가 정체성을 가지고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보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이야기하면서도 국가와 민족의 번영까지 이야기해야 하는 웃지 못 할 상황에 처해버렸다. 국가와 민족의 번영과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선순환하면 좋겠지만, 그 둘은 종종 충돌하고 갈등하기에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된 진보와 보수가 자리를 잡지 못한다. 한국 사회의 갈등지수가 높고, 사회적 신뢰가 바닥 수준인 것도 개인의 존엄과 행복을 제대로 이야기하고 대변하는 정치 집단이 없거나 미약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세계 7번째로 인구 5000만 명이 넘고, 소득 3만 달러 이상 국가인 30-50클럽에 속했지만 최고의 자살율과 최저의 출산율을 보이는 것은 개개인에게 행복한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다양한 국내외 현안 이외에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심각한 저출산·고령화에 처해있다. 조만간 인구는 정점을 찍은 후 급속하게 감소할 전망이며, 고령화는 급속하게 진행돼 2050년 이후 경제활동인구보다 비경제활동인구가 더 많아질 전망이다. 지난 수십 년간 개인의 존엄과 행복을 무시한 데 따른 파국적인 결과이다. 그럼에도 처방과 문제 해결 방식은 여전히 현재를 살고 있는 개인의 존엄과 행복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 국가주의에 기반했다. 자칭 보수주의자들이 출산 지도와 같은 몰상식한 방식을 사용한다면 국가주의에 경도된 자유주의자들은 약간 세련된 방식을 사용할 뿐 큰 차이가 없다. 지금의 출산율로는 미래의 국가 경제가 위태롭다는 걱정이 있을 뿐이지, 오늘을 살고 있고 미래를 살아갈 시민의 행복할 권리에 기초하고 있지는 않다.
국가의 큰 역할을 강조했던 과거의 사회주의는 '자유의 부재' 때문에 역사의 장에서 사라졌고, 시장의 큰 역할을 강조했던 신자유주의는 '무늬만 자유' 때문에 힘을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복지국가는 개인의 실질적 자유와 행복을 보장하는 역사적 성과를 내고 있다. 복지국가는 개인들이 실질적인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교육, 의료, 주거, 노동 등 생활의 필수적인 영역에서 국가 공동체가 보편적 복지를 보장해야 한다는 명제 아래 출발하고 있다. 부국강병 국가가 아닌 국민이 행복한 복지국가야 말로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이 가야할 길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이런 목소리는 약하고 힘은 부족하다.
광복 100년의 청사진: 보수와 진보의 제자리 잡기와 강한 민주주의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모두 제 길을 잃어버린 데는 무엇을 지켜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는 보수에게 일차적인 탓이 크다. 보수가 스스로 지켜야할 정체성과 가치를 찾지 못함에 따라 진보 또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새가 양 날개로 나는 것처럼, 마차가 두 바퀴로 가는 것처럼, 진보와 보수가, 오른쪽과 왼쪽이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때 한 사회는 건강하게 굴러갈 수 있다. 인간은 성선도 아니고 성악도 아닌 '성무선악'이라고 주장한 고자(告子)의 주장이 현실에 가까우며,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제도와 시스템이 현실의 악을 제거할 수 있다는 제도학파의 주장이 차라리 호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왕과 귀족이 아닌 시민이 주권을 가질 것을 선언한 지는 100년, 해방 이후 74년, 반만년 역사에서 민주공화국을 처음 만든 지는 71년이 되었지만, 실질적인 민주공화국으로 나아가기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지난 8.15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해방 100주년이 되는 2045년까지는 제대로 ‘하나 된 나라’를 제안했지만, 이 말이 얼마나 현실화 될지는 알 수 없다.
지난 100년 동안 한국 사회가 뒤틀린 것은 세계 4대 강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식민지·전쟁·독재를 요구했던 원심력에 비해 우리 내부의 구심력이 충분히 강하지 않았던 탓이 크다. 문제는 복잡하지만 해결책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외부의 원심력보다 내부의 구심력을 더 키우면 되는 일이다. 구심력 강화의 첩경은 보수는 보수의 자리에서 진보는 진보의 자리에서 각자 열심히 날갯짓을 하는 것이다. 개개인은 스스로의 자유와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깨어있는 시민으로 거듭나도록 노력해야 하며, 국가는 그런 시민이 강한 민주주의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면 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한 '담대한 해방 100년의 청사진' 실현을 위해서는 애국애족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제대로 된 보수가 제 자리를 잡는 것이 우선적인 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시민이 스스로 무엇을 지켜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거짓 보수, 말만 하는 보수를 판별하고 제대로 된 건강한 보수를 키우는 시민의 민주주의 역량이 해방 100년 청사진의 실현 여부를 좌우하는 데 매우 중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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