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고장'인 전북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 소신과 철학을 갖고 문화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예술인들을 찾아 작품 세계와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번 주인공은 순수한 우리 민족문학의 기본 틀이자 한국의 정형시인 시조 보듬기에 온 열정을 다하는 시조시인이다.
늦깎이로 문단에 데뷔해 시조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감성 에듀테이너 이선녀(49) 시조시인을 만나 외길 시조사랑에 빠진 삶의 속내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 “일본의 대표적 정형시 ‘하이쿠’...우리 한국의 대표 문학은 시조다”
“이웃나라 일본에는 16글자로 된 하이쿠라는 정형시가 널리 알려져 있어요. 한국은 3장 6구 12음보의 43, 45글자로 된 정형시가 있지만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말살되고 짓밟혀 버렸죠”
늦깎이로 문단에 데뷔한 이선녀 시조시인은 “우리 한국의 대표 문학은 뭐냐?” 스스로 자주 되물으며 시조에 대한 사랑을 키워간다고 한다.
“2010년도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우리 순수노래이며, 우리전통 성악인 가곡의 가사가 바로 시조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짓눌린 이렇게 좋은 문학인 우리 시조를 알리고 계승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는 시조는 한국 고유의 리듬과 정서를 담은 한민족의 자긍심과 자존심의 표현도구라고 강조한다. 시조는 오랜 세월 면면히 내려온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학이라는 신념이 가득하다.
그는 뛰어난 음악성을 지녔고, 그런 가운데서도 절제의 아름다움을 즐겼던 민족의 전통을 잇기 위해 시조가 되살아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남들은 시조가 형식이 있어 고루하다고 하는데, 그 형식 속에서 단어와 문장을 매만지는 재미에 피로한 줄 모릅니다.”
그의 시조에 대한 깊은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시조가 고리타분하고, 고전적이어서 현대감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입관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의 말대로 시조는 순수한 우리민족의 문학이다. 계승 발전해야 되는 이유가 아닐까?
그의 ‘꺼지지 않을 열정’을 직감할 수 있다.
■ 문학이 있는 고종시 마실길 걷기...위봉폭포에서 선녀를 만나다
//얼려진 감 하나를 입안에 넣어보니
마음이 물들어서 노을로 번져가네
발그레 상기되어서 설레기도 하여라//
전북 완주군 위봉사 인근 위봉폭포를 지나는 길엔 언제나 선녀를 만날 수 있다.
올해 5회째를 맞는 ‘문학이 있는 고종시 마실 길 걷기행사’가 펼쳐진 10월 27일. 어김없이 이선녀 시조시인의 정감 어린 싯귀가 탐방객들의 가슴을 보듬는다.
//길위를 걷는다는 동행은 인인이니
내 평생 동무되어 같은 곳 바라보네
전과답 문서 쌓이듯 우정 쌓여 가구나//
이선녀 시인의 작품 기부로 한껏 여유로움과 느낌이 있는 감성을 품은 위봉폭포다.
위봉폭포 인근 동상마을엔 고종 임금이 즐겼다고 하는 고종시(柿, 감 시)라는 씨없는 감이 유명하다.
‘씨 없는’ 고종시의 향기를 품은 ‘고종시 마실 길’은 18km의 고즈넉한 길로 임실군의 ‘섬진강 시인의 길’과 견줄만한 ‘문학이 있는 길’로 널리 알려져 있다.
“풀도 보고, 꽃도 보고, 시조 있는 길 천천히 걸어보세요. 감성이 어루만져져요”
시향정에 도착한 이들은 언제나 고마운 분들에게 편지를 쓴다. 쓴 편지는 다자미 마을 입구에 있는 우체통에 넣는다. 후에 편지에 받을 분과 다음에 함께 와서 우체통에 있는 편지를 꺼내 읽으며 깊어가는 우정을 나눈다는 속내다.
이렇듯 고종시 마실 길을 걷는다는 건 단지 길을 걷는 것만이 아니라 삶을 되돌아보는 명상의 길이기도 하고, 이선녀 시조시인의 시조가 있는 문학의 길이기도 하다.
길의 테마가 널리 알려지면서 이젠 전국의 길 애호가들이 즐겨찾는 명소가 되어가고 있다.
“시조는 감성을 자극해 일상의 지친 마음을 치유하는 문학치료의 의미도 있습니다”
올해 4회째 맞는 완주군의 고종시 마실 길 걷기행사가 자리잡아가고 있어 보람을 느낀단다.
다른 지자체도 시조가 있는 마실 길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도 크다.
■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왔다”며 아빠가 지어준 이름
전북 장수 장계 면에서 태어난 그의 ‘선녀’라는 이름은 아빠가 지어줬다.
그의 엄마는 15살 때 시집와 16년이 지난 후인 31살에 첫 아이를 낳는 등 아기가 쉽게 들어서질 않아 절을 다니며 기도하는 등 온갖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첫 아이 출산 후 7년 후에야 딸인 선녀를 낳았다. 그의 아빠는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왔다”며 기뻐하며 이름도 ‘선녀’라 지었다고 한다.
그는 ‘뼈대 있는 집안’의 손녀라는 자긍심을 가진다. 그가 태어난 장수군 장계면에 도암서원이 있다. 1815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직계할아버지인 이경광, 이성구, 유심춘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신 곳이다.
농사만 짓는 평범한 할아버지인줄 알았는데 고종황제에게 동몽교관(현재의 교육장급), 선혜낭청(세무서장급) 2개의 직함 받은 내력을 알게 된 것.
그의 할아버지는 고종 32년인 1895년 백성들에게 상투를 자르게 한 명령인 단발령 실시 때 거부하기도 했을 정도로 강직한 소신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고종과의 인연이 운명적이라 여긴다.
“고종황제와 인연이 깊은 할아버지께서 ‘고종시 마실길 걷기 행사‘를 매년 참여해 세상과 좋은 인연을 맺도록 이끄는 끈이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다.
그래서일까? 매년 고종시 마실 길을 걷노라면 할아버지 생각이 절로 난다.
■ 늦깍이 문단 데뷔...어머니 사랑에 견줄 ‘시조사랑’
“시조의 긴 생명력의 비결은 한국인의 호흡과 기질에 맞기 때문일 겁니다."
그의 시조 사랑은 어머니의 자식 사랑과 견줄 정도로 지극하다.
그런데 왜 하필 시조일까? 흔치 않은 장르와 사랑에 빠진 이유가 뭘까 궁금증이 피어난다.
“시조가 널리 알려져 일기처럼 가까이서 일상 생활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 소중한 한국의 정형시를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학까지 졸업한 그는 뒤늦게 학구열을 불태우며 2013년 월간 한국문단으로 등단해 낭만 시조 공모전 대상을 수상했다. (사)녹색문단 회원이며 서울시인들 동인이다. 문학치료학도 깊이 있게 공부했다.
전주에서 서울과 분당을 오가는 등 시조 알리기에도 쉴 틈이 없다.
고종시 마실 길 걷기행사를 올해로 5회째 주도했다.
4년 전엔 혼자 발품 팔아서 전주문학제라는 큰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현재 수백 수의 시조를 썼지만 책을 펴내지는 않았다.
“스스로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공을 더 쌓아야 한다는 판단이다.
“야생초가 기다리던 햇빛을 받고 영롱하게 빛날 때, 더 이상 하찮은 풀이 아닌 풀의 본디 이름으로 불리는 것처럼, 제 삶의 과정에서 노력할 뿐 아직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며 겸손함도 몸에 밴 그녀다.
■ “시조는 일상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치유...세상과 이야기 할 수 있는 통로”
“시조의 주제는 모든 일상이 주제죠. 사물이나 자연이나 정서나 모든 일상을 담아낼 수 있어요. 항상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등단 이후 그는 누가 뭐래도 꿋꿋하게 시조사랑 ‘외길 인생’을 살고 있다.
“가끔은 돈도 안되는 일을 내가 왜할까 생각도 했었죠.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 생각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죠”
우리 전통시조를 널리 알려야한다는 사명감이 아닐까?
그는 매주 한번 정기적으로 오브제(프랑스 미술용어로 발상의 전환이라는 뜻) 갤러리에서 한번씩 8명의 문하생들과 함께 시조사랑을 나눈다.
“시조 사랑을 같이한 문하생들 중에 등단한 분도 많아 보람을 느낍니다. 모든 게 감사할 뿐 이죠”
그는 현재 시조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전북시조협회를 만들려고 구상도 하고 있다.
그는 시조시인이면서 ‘감성 에듀테이너’이기도 하다. 일상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자아 성장 할 수 있게 돕는 일을 한다.
“시조는 문학치료 효과도 뛰어나요. 국문학도로 시인에 등단한 제자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는 인사말을 들었을 때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행복과 보람을 느꼈죠“
습작 후 내 안의 감성을 꺼내 글을 쓰게 하는 것. 끌어낸 감성으로 문학치료가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그가 계속해서 공부를 하는이유다.
“어디를 가든 사실적으로 체험해야 감성과 버무러지죠, 시는 절대 공발에서 쓰면 안됩니다. 감성을 내 안에서 발효시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게 하고 쉽게 써야 합니다”
그는 직접보고 느낀 체험 위주로 시상을 떠올린다고 한다.
“어렵다고 생각하는 시조를 쉽게 접근시켜주는 매개자 역할을 하는 게 저의 소명이라 생각해요”
그의 시들은 이처럼 깊은 사유와 고뇌 속에서 행간을 메운다.
“시는 정말 모든 것을 담아낸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각과 미적 인식, 인습, 꿈꾸는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죠.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감정을 담아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전통적인 시 율격 위에 아름다운 우리말을 가득히 수놓겠다는 의지로 느껴진다.
"분명한 것은 제게 시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대한민국에 이선녀 시조시인보다 더 쉽고 재미있게 우리 시조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 시조사랑 외길...‘1인 지식기업 전문가’로도 활동
“엄마! 엄마가 지은 시조가 왜 이곳에 있어?”
최근 고종시 마실 길을 자동차 드라이브로 동행한 아들이 위봉폭포 가는 길목에 걸려 있는 그의 시조를 보고 놀란 표정이었다고 한다.
아들은 엄마가 유명한 시조시인인줄 모른 모양이다.
옷에도 감성과 정성을 새겨 넣을 정도로 그의 일상은 시다.
그가 입고 있는 옷도 미싱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일일이 직접 바느질해서 만들어 입는다고 한다.
“저는 우리 시조 대중화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해 주신다면 감사할 것 같아요”
그는 ‘1인 지식기업 전문가’로도 활동하며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1인 지식기업 전문가는 1인이 차별화되고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스마트 워크를 통해 기업에 견줄만한 콘텐츠와 역량을 갖추도록 돕는다.
1인 지식기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존방법이란다.
“기성세대는 아이들에게 꿈만 꾸라고 강요하지, 꿈을 어떻게 꿔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죠”
그는 1인도 자기만의 차별화된 지식콘텐츠를 발견하고 개발해서 마케팅 하면 충분히 브랜드가 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비록 1인이지만 기업에 견줄 만큼의 자기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이를 통해 어떤 분야라도 전문가로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잘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저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믿어요”
오늘도 그는 시조를 통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본다.
그의 섬세함은 어느새 곱게 단풍 든 바람결마저도 시화로 펼쳐지며, 한 수 시조로 눈 앞에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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