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질서의 설계도를 다시 그리겠다는 중국의 야심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중국 허베이성 슝안신구(雄安新区)에서 열린 제1회 글로벌 거버넌스 포럼은 그 야심을 국제사회에 공개한 무대였다. 90여 개국에서 모인 400여 명의 참석자 가운데 아프리카와 중남미, 아시아의 개발도상국 인사들이 두드러졌다. 회의장을 관통한 질문은 분명했다. 흔들리는 세계질서를 누가, 어떤 원칙으로 다시 세울 것인가.
23일 기조연설에 나선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유엔 중심의 다자주의 복원과 글로벌 사우스의 대표성 확대를 역설했다. 중국은 글로벌 거버넌스 연구센터를 설립하고 국제 전문가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인공지능과 우주, 사이버 공간 등 새로운 영역의 국제규범 형성에도 적극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국제질서를 논하는 회의체를 만들고, 이를 뒷받침할 연구기관을 세우며, 규칙을 생산하고 확산시킬 인적 네트워크까지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단순한 외교적 수사로 넘길 일이 아니다. 중국은 이제 국제질서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국제사회의 공통 의제로 만들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쌓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중국 외교를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포럼에서 주목할 것은 중국이 내놓은 선언의 화려함이 아니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국제사회의 보편적 요구로 번역하고, 그것을 다시 제도와 규범으로 조직해 나가는가 하는 점이다. 국제정치에서 힘이란 상대를 굴복시키는 능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지 규정하고, 어떤 해법이 정당한지에 대한 국제적 동의를 만들어 내는 능력 역시 힘이다. 중국은 바로 그 힘을 확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외교는 이제 기존 질서에 적응하는 단계에서 그 질서의 규칙을 바꾸는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 이것이 슝안 포럼이 보여준 가장 중요한 변화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이 미국 주도의 전후 국제질서를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유엔과 국제법, 다자주의, 자유무역이라는 기존 질서의 원칙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다. 트럼프의 미국이 관세와 일방주의, 국제기구에 대한 불신으로 자신이 구축한 질서의 토대를 흔드는 사이, 중국은 그 질서의 수호자이자 개혁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미국이 세운 질서의 정당성을 미국에 맞서는 외교적 자산으로 활용하는 역설이다. 질서의 창설자가 스스로 규칙을 훼손하고, 한때 그 규칙에 적응해야 했던 후발국이 규칙의 존중을 요구하는 기묘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물론 중국의 구상이 기존 질서의 단순한 복원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 강조하는 주권평등과 내정불간섭, 발전권과 문명다양성은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중시해 온 민주주의와 인권, 정치적 자유의 가치와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중국은 국제질서의 제도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가치의 우선순위와 권력의 배분을 바꾸려 한다. 기존 질서의 파괴보다는 선택적 계승과 재해석을 통한 변형에 가깝다.
여기에 중국 외교의 전략적 정교함이 있다. 미국과의 정면 대결로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기보다는 기존 질서의 정당성 위기를 활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제도와 규범을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중국 외교의 무게중심도 그만큼 달라졌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미국 중심 질서에 편입되어 성장했고, 국력이 커진 뒤에는 그 질서 안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데 주력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제질서의 규칙과 제도를 직접 설계하겠다고 나선다.
시진핑 집권과 함께 시작된 일대일로가 도로와 철도, 항만을 통해 물리적 연결망을 구축하는 사업이었다면, 작년에서 제시된 글로벌 거버넌스 이니셔티브(GGI)는 그 연결망 위에 어떤 원칙과 규범을 세울 것인가를 묻는 작업이다. 2021년 글로벌 발전 이니셔티브(GDI)가 발전과 공동번영의 의제를, 2022년 글로벌 안보 이니셔티브(GSI)가 안보질서의 원칙을, 2023년 글로벌 문명 이니셔티브(GCI)가 문명과 가치의 다양성을 제시했다면, GGI는 이들을 포괄하는 제도적 틀을 지향한다.
이러한 구상들이 얼마나 일관된 체계로 작동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그러나 중국이 경제와 안보, 문명과 제도라는 서로 다른 영역을 연결해 하나의 질서 담론을 구축하려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인프라를 건설하던 중국이 이제 국제사회의 규칙과 상식까지 설계하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국이 가장 공을 들이는 대상이 글로벌 사우스다. 이번 포럼에서도 개발도상국의 대표성 확대는 거의 모든 논의를 관통하는 공통분모였다. 유엔 안보리와 국제금융기구의 의사결정 구조, 무역규범과 기후금융, 첨단기술에 대한 접근권에 이르기까지 서구 중심 국제질서가 남긴 불평등을 개혁하자는 것이다.
이 문제 제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세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들이 국제규칙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여전히 주변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독립을 얻은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국제금융과 기술, 안보의 핵심 규칙은 여전히 소수 강대국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중국은 바로 이 역사적 불균형을 자신의 외교적 기회로 삼는다. 미중 경쟁을 단순한 패권다툼이 아니라 국제질서의 민주화와 대표성 확대라는 문제로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보다 깊은 전략적 계산도 깔려 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군사력이나 첨단기술, 금융질서의 영역에 국한된다면 중국은 여전히 상당한 구조적 제약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경쟁의 무대가 국제사회의 대표성과 발전권, 제도적 공정성의 문제로 확장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중국은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국제질서의 정당성을 둘러싼 경쟁에서 새로운 연합을 형성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글로벌 사우스는 중국에 단순한 외교적 지지 기반이 아니라, 미중 경쟁의 성격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전략적 공간인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국이 스스로 경계해야 할 함정이 있다.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이 곧 중국의 지도력 확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도와 브라질, 인도네시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원하는 것은 미국의 패권을 중국의 패권으로 교체하는 일이 아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강대국 사이에서 자신의 선택권을 넓히고, 국제질서의 수동적 수용자에서 능동적 결정자로 나서는 일이다.
글로벌 사우스는 하나의 이해관계로 묶인 단일한 정치세력도 아니다. 국가마다 경제구조와 안보환경, 대중국 관계가 다르며,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일치하지 않는다. 중국이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정작 그들의 독자성을 제약하는 또 하나의 강대국이 될 위험도 있다. 글로벌 사우스는 중국이 이끌어야 할 진영이 아니라 중국 역시 설득하고 협상해야 할 다수의 주권국가들이다. 중국의 새로운 질서 구상이 진정성을 인정받으려면 이 차이를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포럼 개최지로 슝안이 선택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시진핑이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 건설하고 있는 미래도시 슝안은 중국식 장기계획과 국가 주도 발전의 상징이다. 중국은 이 도시를 국제사회에 선보이면서 서구 민주주의의 짧은 정치주기와 정책 혼선에 대비되는 중국식 거버넌스의 효율성을 과시하려 했을 것이다. 회의 장소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메시지였던 셈이다.
하지만 도시를 건설하는 능력과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는 능력은 다르다. 국내 자원을 동원해 거대한 계획을 실현하는 것과 서로 다른 역사와 이해관계를 가진 국가들을 설득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국제질서는 어느 한 나라의 청사진대로 건설할 수 있는 신도시가 아니다. 이견을 조정하고, 작은 나라의 반대할 권리를 인정하며, 강대국 자신도 공동의 규칙에 구속될 때 비로소 지속성을 얻는다.
바로 여기에 중국의 새로운 질서외교가 넘어야 할 가장 높은 문턱이 있다.
중국은 주권평등과 국제법을 강조하지만 남중국해에서 주변국들이 느끼는 불안은 여전하다. 발전권과 문명다양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치적 자유와 시민적 권리의 문제에는 충분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다자주의를 주장하지만 자국의 핵심이익이 걸린 사안에서는 강대국 정치의 논리를 앞세우기도 한다.
이러한 모순은 단순히 중국의 외교적 위선을 지적하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국제질서의 지도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능력과 제도적 영향력뿐 아니라 규칙을 스스로 준수하는 데서 비롯되는 정당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자신의 국익과 충돌하는 국제규범까지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국보다 약한 국가의 정당한 요구를 얼마나 존중할 수 있는지가 결국 새로운 질서 구상의 성패를 가를 것이다.
무엇보다 국제질서를 주도하려면 선언 이상의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개발도상국의 부채 문제를 해결하고, 기후위기 대응에 실질적인 재원을 제공하며, 국제적 위기 앞에서 때로는 자국의 이익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다자주의를 말하는 것으로는 신뢰를 얻기 어렵다. 패권을 비판하는 일보다 패권 없는 질서를 실천하는 일이 훨씬 어렵다.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가 있다. 중국의 질서 구상이 성공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자유롭고 평등한 국제질서의 도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 중심의 위계질서가 중국 중심의 또 다른 위계질서로 바뀐다면, 세계는 패권의 주체만 교체할 뿐 패권정치의 구조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진정한 다극화는 강대국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집중을 제약하고 다양한 국가의 자율성을 확대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다극체제가 곧 다자주의를 보장하지 않으며, 세력균형이 곧 국제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도 아니다. 중국이 말하는 국제관계의 민주화가 강대국 간 권력 재분배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약소국의 실질적인 발언권과 선택권 확대로 이어질 것인지가 핵심이다.
그럼에도 이번 포럼을 일회성 외교행사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중국은 세계질서에 대한 불만을 하나의 외교적 언어로 조직하고, 그 언어를 공유하는 국가와 전문가들을 연결하며, 이를 지속적인 제도로 발전시키려 하고 있다. 새로운 질서를 완성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질서의 미래를 둘러싼 의제 설정 경쟁에서는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마침 포럼 기간에는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문제 역시 중국 외교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중국의 글로벌 거버넌스 구상과 동북아에서의 전략적 이해관계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이 국제무대에서 다자주의와 공동안보를 강조하더라도 한반도에서는 북중관계와 미중 경쟁, 지역 세력균형이라는 현실정치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세계의 규칙을 다시 쓰겠다는 보편적 구상과 동북아의 세력균형을 관리하려는 지정학적 계산이 동시에 작동하는 것이다. 중국의 글로벌 거버넌스 외교를 이해하려면 이 두 얼굴을 함께 보아야 한다. 중국이 국제사회의 보편적 이익을 강조하는 만큼, 한반도에서도 그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도록 요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 외교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여전히 국제질서의 변화를 미국과 중국 가운데 누가 우세한가, 어느 편에 서야 안전한가라는 질문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물론 강대국 경쟁의 향방을 읽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세계질서가 급격히 재편되는 시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누가 승리할 것인가를 예측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질서를 원하는지 스스로 규정하는 일이다.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판한다고 중국의 질서 구상을 추종할 이유는 없다. 중국의 패권적 행태를 경계한다고 미국 중심 질서의 모순까지 옹호할 필요도 없다. 그토록 강조해 왔건만, 한국 외교는 여전히 동맹과 자율성을 양자택일의 문제처럼 다룬다. 동맹을 유지하되 사고까지 동맹에 종속시키지 않고, 중국과 협력하되 중국의 전략에 휘말리지 않는 것. 말로는 쉬워도 정작 실천에서는 번번이 주저하는 우리의 오래된 숙제다.
이제 한국 외교에도 질서의 변화에 대응하는 수준을 넘어 그 변화의 방향을 제안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전략적 전환이 요구된다.
우선 한미동맹을 안보의 중요한 기반으로 유지하면서도 외교적 의제 설정의 공간을 넓혀야 한다. 동맹의 가치는 공동의 위협에 대응하는 능력에 있지만, 그것이 모든 국제문제에서 동일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후변화와 개발협력, 국제금융과 디지털 규범 등에서는 한국의 이해관계와 역량에 기초한 독자적인 제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글로벌 사우스를 미중 경쟁의 부속물로 바라보는 낡은 시각부터 버려야 한다. 아세안과 인도, 중남미와 아프리카 국가들은 강대국의 선택을 기다리는 주변부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제질서를 바꾸려는 주체들이다. 한국이 이들과 함께 국제규범을 제안하고, 개발과 기술, 기후와 평화의 의제를 만들어 갈 때 비로소 중견국 외교의 실질적인 공간이 열린다.
특히 한국이 경쟁력을 지닌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 녹색전환, 보건과 개발협력의 영역에서 새로운 국제적 공공재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첨단기술의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기술규범의 공동 설계자가 될 수 있도록 협력하고, 개발협력 역시 원조 제공자의 관점이 아니라 상대국의 정책 자율성과 제도적 역량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러한 협력은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얻는 일시적인 외교적 영향력보다 오래 지속되는 신뢰의 기반이 될 수 있다.
나아가 한국은 국제질서의 민주화와 규칙 기반 질서의 유지가 서로 대립하는 목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개발도상국의 대표성을 확대하면서도 국제법과 인권의 보편성을 지키고, 다자주의의 효율성을 높이면서도 약소국의 권리를 보호하는 제도적 개혁을 제안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질서 구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 양쪽 모두의 모순을 비판하고 보완할 수 있는 규범적 기준을 갖추어야 한다.
한반도 문제도 마찬가지다. 중국이 유엔 중심의 다자주의와 국제협력을 강조한다면, 그 원칙이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다자안보에서도 구현되도록 요구해야 한다. 북중관계의 변화에 일희일비하며 소외를 걱정하는 데 머물 것이 아니라, 한반도 평화를 동북아와 유라시아의 공동 이익으로 연결하는 구상을 우리가 먼저 제시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는 단지 남북한 사이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문제가 아니다. 동북아의 군비경쟁을 관리하고, 경제적 상호의존을 안정시키며, 기후와 재난, 보건과 에너지 등 초국경적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는 지역협력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미동맹과 한중협력을 상호 배타적인 선택으로 보는 사고에서 벗어나, 안보적 억제와 외교적 관여를 병행하는 복합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한국 외교는 국제질서의 수용자라는 자기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제력과 기술력, 민주주의의 경험과 개발의 역사, 국제협력의 역량을 갖춘 한국이 언제까지 강대국이 제시하는 질서의 틀 안에서 자신의 위치만 계산할 것인가. 우리의 역량에 비해 국제질서에 대한 상상력과 제도적 제안 능력이 지나치게 빈약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다.
이번 슝안 포럼 소식을 접하며 가장 선명하게 다가온 것은 중국의 자신감보다 우리 외교의 빈약한 상상력이다. 중국은 국제질서의 규칙을 바꾸겠다고 나서는데, 우리는 여전히 남이 만든 규칙 안에서 어느 자리가 가장 안전한지 계산하는 데 익숙하다. 한쪽은 설계도를 펼치고 있는데 다른 한쪽은 입주 조건부터 따지는 형국이다.
물론 중국이 새로운 세계질서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경제적 영향력이 국제적 신뢰를 보장하지 않으며, 다극화가 곧 국제질서의 민주화를 뜻하지도 않는다. 미국 중심의 위계질서가 중국 중심의 또 다른 위계질서로 바뀌는 것이라면 그것을 역사의 진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어느 나라가 세계의 중심에 서느냐가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 더 이상 어느 한 나라의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일이다. 강대국의 권력은 견제되고, 약소국의 목소리는 존중되며, 국제사회의 공동 문제가 소수 국가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지 않는 질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다극화는 바로 그런 것이어야 한다.
세계질서의 재편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규칙을 제안하는 나라와 남이 만든 규칙을 받아들이는 나라의 운명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모든 나라가 새로운 패권국이 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원칙을 갖고,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과 함께 그 원칙을 현실의 제도로 만들어 갈 능력이다.
슝안에서 제기된 질문은 중국의 미래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더 절박한 질문이다. 국제질서의 변화에 단지 순응하는 나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 변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참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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