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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의 '양반 천석꾼' 김낙철 형제, 피 흘리지 않는 '상생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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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의 '양반 천석꾼' 김낙철 형제, 피 흘리지 않는 '상생의 혁명’

[기획] 부안동학, 130년의 침묵을 깨고 혁명의 중심으로 서다 ②

동학농민혁명은 극심한 수탈에 시달리던 하층 농민들의 계급 투쟁이라는 것이 학계와 대중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부안동학은 명문 고족 출신의 대접주 김낙철과 김낙봉 형제가 주도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독특하고 역설적인 성격을 지닌다.

성강현 동의대 교수는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 발표를 통해 "1000년 이상 부안읍 봉덕리 쟁갈마을에 터를 잡고 수만 환의 재산을 일군 천석꾼 양반 김낙철 형제가 가산이 탕진될 정도로 식객을 치르며 포덕에 전념했다"며 이들의 특이한 궤적을 집중 조명했다.

성 교수는 이들이 양반과 부자는 동학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른바 '삼불입'의 묵시적 금기를 깨고 입도한 배경에 대해 "체제 붕괴의 위기 속에서 기득권 유지보다는 시천주의 만민평등사상과 보국안민, 유무상자의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동학의 혁명적 비전에 깊이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성 교수는 1894년 4월 3일, 전봉준과 손화중이 이끄는 4000여 명의 동학농민군 본대가 부안읍성을 점령하고 부안군수 이철화를 처형하려 했을 때 발생한 극적인 일화에 주목했다.

전봉준의 급진적 노선과 거리를 두며 오히려 군수의 요청으로 치안 유지에 나섰던 김낙철은 즉각 읍성으로 달려가 손화중을 가로막았다. 그는 "네 선산이 부안 성 밖 땅에 있으니 나의 성주가 곧 너의 성주다"라는 유교적 명분을 내세워 담판을 벌였고, 결국 참혹한 유혈 사태를 막아냈다.

▲부안의 김낙철 대접주 부부 ⓒ

김낙철 형제의 노선은 파괴와 살육을 철저히 지양하고 관과 민이 공존하는 '상생'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이들은 전주화약 이후에도 서도 송정리와 줄포에 도소를 설치하여 지역의 치안을 안정적으로 관리했고, 흉년으로 굶주리던 제주도 유민들을 대대적으로 구휼했다.

성 교수는 훗날 우금티 전투 패배 후 이들이 관군에 체포되어 나주 진영에서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그들의 목숨을 구한 것 역시, 과거 줄포에서 은혜를 입었던 제주도민들이 민종렬 목사에게 올린 눈물 어린 탄원 덕분이었다고 역사적 인과관계를 설명했다.

이러한 부안동학의 독자적이고 온건한 노선에 대해 토론을 맡은 조성운 전 역사와교육학회 회장은 학계에 매우 도발적이고 날카로운 화두를 던졌다.

조 회장은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뚜렷하게 대비되는 전봉준의 급진적 무력 봉기 노선과 김낙철의 질서 유지 노선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급진적 봉기만이 진정한 혁명인지, 아니면 관아를 보존하고 민생을 지켜내며 피를 흘리지 않은 김낙철의 평화적 자치 활동 역시 동학농민혁명의 유의미한 축으로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전면적인 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부안동학은 혁명의 스펙트럼이 우리가 기존에 알던 것보다 훨씬 깊고 다채로웠음을 웅변하고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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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홍

전북취재본부 김대홍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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