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어느 대학의 운동장이나 노천극장쯤 되는 곳. 무대가 설치되고 객석에는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이 가득한 채 무대를 주시한다. 무대 전면에는 커다란 걸개 그림이 걸려 있고 주변에는 수많은 깃발이 나부낀다. 곧이어 풍물패들이 길놀이를 하며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마침내 공연이 시작된다.
노래패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풍물과 춤 공연이 이어진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펼쳐지고 때로 동영상이 상영되기도 한다. 중간중간 누군가가 등장해 발언하고 시를 낭송한다. 마지막에는 무대 위의 출연자들과 관중이 하나가 되어 노래를 부르고 함께 구호를 외친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 자주 열렸던 대규모 공연의 기억이다. 음악과 문학, 무용, 미술, 연극과 영상 등 다양한 예술 장르들이 결합한 종합적 문화예술 공연이면서 분명한 정치 집회의 성격을 가졌던 그런 류의 행사를 집체극이라 불렀다. 87년 6월 이후 민주화의 물꼬가 터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군사정권의 여진이 계속되면서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던 시절, 역사의 수레바퀴를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게 하려던 사람들은 그렇게 모여 목소리를 모으곤 했다.
새삼 집체극의 추억을 꺼내는 건 4월 30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릴 '백기완 문화예술 한바탕' 때문이다. 백기완 선생의 5주기를 맞아 열리는 이 행사의 부제는 "광장의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이다. 백기완 선생은 지난 수십 년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정에서 엄청난 고초를 겪으며 맨 앞에 섰던 재야의 정치인이자 운동가였고 또한 뛰어난 예술인이기도 했다.
그의 놀라운 시적 감성과 웅숭깊은 이야기들은 80년대 내내 뜨겁게 타올랐던 민족·민중문화운동의 과정 속에서 풍부한 영감과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란 구절로 시작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바로 80년대 민주화운동과 민중예술의 정신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백기완 문화예술 한바탕'은 백기완 선생이 남긴 뜻을 기억하면서 '지금 여기'의 현장에서 다시 한번 새롭게 환기하고자 하는 예술적 기획이다.
참여하는 예술인의 면모도 다양하다. 정태춘, 하림, 연영석, 꽃다지 등 이른바 대중가요와 민중가요의 경계를 넘나드는 음악인, 소설가 정지아, 시인 송경동 등 문학인, 정지영·우광훈·홍진훤 등 영화인, 거기에 한국민족춤협회와 풍물패, 미술인이 함께 한다.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적 실천이 결합하면서 당대의 현실에 대한 사회적 메시지를 함께 드러낸다는 점에서 가히 새로운 시대의 집체극이라 할 만하다. 물론 나 개인적으로는 집체극이란 용어가 왠지 북한식 집단 예술을 떠올리게 해 그다지 선호하지 않지만, 장르와 경계를 넘어 예술인들이 함께 하는 공동 작업은 언제나 기대감을 갖게 한다.
'백기완 문화예술 한바탕'에서 또 하나 주목할 지점은 이 행사가 다름 아닌 노동절 바로 전날에 열린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에서 노동절은 오랫동안 기념일로서 제대로 된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군사정권 하에서는 노동이란 단어 자체가 일종의 금기어로 치부되었던 탓에 노동절 대신 '근로자의 날'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았고 그나마 메이데이를 피해 한국노총 창립일인 3월 10일로 정해져 있었다. 문민정부 시절인 1994년에 와서 5월 1일로 변경되었으나 여전히 노동절 아닌 '근로자의 날'이라는 이름이었다.
이번 2026년 5월 1일은 노동절이라는 이름을 되찾으면서 처음으로 공휴일로 지정된, 진정한 첫 번째 노동절이란 점에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백기완 선생은 평생 노동자의 편에서 싸웠고 노동절을 되찾기 위한 운동에서도 늘 맨 앞에 서 있던 분이다. 5주기를 맞아 그 분의 삶과 뜻을 되새기고 기억하고자 하는 '백기완 문화예술 한바탕'은 자연스럽게 노동절의 전야제 성격을 띠게 된다. 다양한 문화예술적 실천을 통해 노동의 의미와 미래를 재삼 환기하는 행사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문화예술이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기억과 공감의 매개체가 되어 준다는 사실에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특정한 시기에 빠져들었던 노래를 통해 그 시대를 기억한다. 그리고 같은 노래를 좋아했던 사람들, 지금 함께 노래 부르는 사람들과 교감하며 자연스럽게 연대한다. 그게 문화예술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다.
노동절 전야에 열리는 '백기완 문화예술 한바탕'은 장르를 넘나드는 문화예술적 실천을 통해 지난 세월 민주화운동과 민중예술의 경험을 기억하고, '지금 여기'에서 노동과 노동자 정체성의 의미를 생각하며 함께 공감하는 장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이 일회적인 행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주체들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백기완의 뜻과 노동의 의미를 여럿이 함께 기억하고 공감하는 장으로서 지속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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