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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메기 세상' 꿈꾼 백기완 선생, 세상과 작별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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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메기 세상' 꿈꾼 백기완 선생, 세상과 작별하던 날

장례위, 서울광장에서 영결식 엄수...시민 500여 명 참석해 고인 추모

고(故) 백기완 선생의 영결식이 19일 서울광장에서 엄수됐다.

농민운동가, 빈민운동가, 민주화운동가로 살았고 말년까지도 사회적 약자들의 곁을 지킨 한국 진보운동의 큰 어른. 병상에 있는 순간에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김진숙 복직, 세월호 진상규명 등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영원한 투사 백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났다.

이날 영결식은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 주관 하에 진행됐다. 영결식장에는 99개의 의자가 놓였지만, 현장에는 500여 명이 찾아왔다. 의자에 앉지 못한 시민은 의자 주위에 둘러서서 영결식을 지켜봤다. 사회를 맡은 김소연 장례위 상임집행위원장은 영결식 중 몇 번이고 거리두기를 당부했다.

영결식을 찾은 시민들의 왼편 가슴에는 "남김없이"라고 적힌 추모 리본이 달려있었다. 백 선생의 꿈이었던 "노나메기 세상"이 적힌 마스크를 쓰고 있는 시민도 있었다.

이날 영결식에 참석한 김태규 씨는 "생전에 멀찌감치 집회 같은 데서 앞에 계시는 모습 보면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며 "많은 분들에게 삶의 지표가 되는 분이었다고 생각한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호랑이 같은 분이 돌아가셨다"거나 "약자와 통일을 위해 애쓰신 삶에 애달픈 마음이 든다"고 안타까워하는 시민도 있었다.

오전 11시 10분경 풍물패와 유족, LG트윈타워, 코레일네트웍스 등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앞에 선 채 고인의 상여가 서울광장으로 들어왔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딱 한발떼기에 목숨을 걸어라"는 글과 함께 백 선생의 사진이 인쇄된 피켓을 들고 있었다. 피켓에 적힌 글은 <임을 위한 행진곡>에 일부가 인용되기도 한 고인의 장편시 <묏비나리>의 시작 구절이다.

상여가 들어오고 영결식이 시작됐다.

▲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운구 행렬. ⓒ연합뉴스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했던 백기완 선생

이날 연단에 오른 이들은 추도시, 조사, 조가, 진혼무, 합창 등으로 추모의 마음을 표했다. 백 선생이 사회적 약자들의 싸움에 함께하던 모습을 회상하는 이들이 특히 많았다.

영결식의 첫 순서인 <임을 위한 행진곡> 합창을 위해 무대에 오른 세월호 유족 강지은 씨는 "요 며칠 우리 아이들이 두 손을 흔들며 백기완 선생님을 환영하고 선생님과 아이들이 서로 얼싸안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상상했다"며 "이제부터는 하늘을 볼 때마다 백기완 선생님을 떠올릴 것 같다"고 말했다.

강 씨는 "유가족에게 백기완 선생님은 존재 자체로 든든한 버팀목이셨다"며 "촛불집회 때마다 맨 앞자리에 자리하고 계신 모습은 마치 무너져 내리는 하늘을 온몸으로 바치고 있는 것 같은 든든함이었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유신 시절부터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백 선생의 ‘동지’였던 문정현 신부는 "백 선생님 고맙습니다. (집회 현장 등에서) 백 선생님 앉아계신 곳에 다가가 인사드리면 꼭 당신 옆에 앉히셨다"며 "백 선생님 옆자리가 곧 제자리인 줄 알고 살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 신부는 "언젠가 함께 회초밥을 먹으며 또 날 잡아 따끈한 정종 딱 한 모금씩만 입에 대자고 서로 약속했는데 이렇게 그만 가셨다"며 고인을 떠나 보낸 것을 애통해했다.

문 신부는 "앞서서 나아가셨으니 산 저희들이 따르겠다"며 "백선생님 계시던 바로 그 자리에 가서 앉겠다. 선생님을 다시 만나 뵐 그 날까지 선생님의 자리를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청천벽력'이 떨어지듯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백 선생을 처음 만난 일을 이야기했다.

김 이사장은 "지방에서 싸웠지만 관심을 받지 못해 아들을 서울대병원으로 옮긴지 얼마 되지 않을 때 사회원로들과 함께 백 선생님께서 걸음걸이가 힘드셔 양쪽 부축을 받으면서 빈소에 오셨다"며 "손자뻘 되는 용균이에게 큰절로 두 번 절하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그리고 바로 빈소 식당 한켠에서 원로 기자회견을 했는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셨던 백 선생님께서는 저에게는 천군만마였다"며 "그 모습이 그립고 목마름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그동안 참으로 고마웠다. 아낌없이 주신 사랑이므로 저 또한 살아있는 자들에게 그 마음 온몸으로 전하고 싶다"고 한 뒤 "저 세상에서 용균이를 만나면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잘 있으라고 꼭 한 번 안아주시면 좋겠다"고 조사를 마무리했다.

이날 조가는 가수 정태춘 씨의 <92년 장마, 종로에서>였다. 정 씨는 간주 중 "우리 마음속에도, 이 노래 속에도 백 선생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며 "그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해주셔서 고맙다. 편히 쉬시라"고 추모의 뜻을 전했다.

명진 스님, 송경동 시인,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등도 영결식 연단에 올라 고인에 대한 추모를 표하고 그의 뜻을 잇겠다는 다짐의 말을 남겼다.

▲ 1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영결식에서 유가족이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숙 여사 "우리 남편 같은 사람을 만나서 나는 행복했어요"

영결식 말미에는 백 선생의 누이동생인 백인순 씨와 딸인 백원담 씨가 유족을 대표해 연단에 올라 고인을 추모하는 이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백인순 씨는 "오라버니는 오로지 '노나메기 벗나래(세상)'를 이루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셨다"며 "그러나 저의 오라버니는 지금 벗나래에 아니 계시기에 제 마음은 찢어진다"고 말했다.

백인순 씨는 "오라버니, 오늘 여기 모이신 모든 분께서 오라버니의 뜻을 잇고자 한마음으로 모여 나아가고자 하니 걱정마시고 부디 편히 쉬시라"고 백 선생에게 인사를 전 한 뒤 고인의 죽음을 함께 슬퍼해준 이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백원담 씨는 백 선생의 부인인 김정숙 여사가 백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쓴 편지를 공개했다.

백기완 선생님.

'봄이 지나가기 전 불러보세 우리의 봄 노래'하는 노래 가사를 불러보려 했는데 이제는 불러볼 수도 없으니 우리 이 다음에 다시 만나면 꼭 같이 불러요.

물어볼 것이 있으면 언제나 기억하고 있던 우리 남편 같은 사람을 만나서 나는 행복했어요.

멋진 목도리를 휘날리며 바위고개 그 언덕에서 꼭 기다리세요.

잘 잘(잘 있어요, 잘 가세요)! 우리 실랑 백기완 씨.

2021년 2월 1일. 아내 김정숙.

유족 인사가 끝난 뒤에는 양규현 전 전국노동자협의회 위원장의 호상 인사와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민중의 노래> 공연, 헌화가 이어졌다.

백 선생은 이날 오후 마석모란공원에 안치된다. 백 선생의 묘역은 전태일 열사가 잠든 자리 옆에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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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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