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의 밤, 그 때 내 이웃들은 어디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문득 12·3 비상계엄 1주기를 앞두고 일반 시민들이 느꼈을 당시의 상황과 기억, 그 사이의 변화가 궁금해졌다. 간단한 질문지를 작성한 뒤 SNS의 주소록을 검색하면서 대상자를 물색했다.
연령과 성별, 직업, 거주지 등을 골고루 섞어 모두 18명에게 질문지를 보냈다. 한나절 만에 15명에게서 답변이 도착했다. 답변을 주지 않은 3명은 50대의 현직 공무원, 60대의 국민의힘 전 당직자, 60대의 전 국민의당 당직자였다.
현직 공무원은 외부 행사에 참여하느라, 전 국민의당 당직자는 바쁜 집안 일로, 국민의힘 전 당직자는 '이번은 그냥 넘어가자'며 질문에 참여할 수 없음을 알려왔다.
질문은 모두 6개 문항이었다. △12·3 계엄 소식을 언제 어디에서 들었는지 △소식을 들은 후 든 첫 생각 (그 후 여러 집회에 참여했는지, 계엄에 찬성했다면 그 이유는) △그 이후 삶의 변화가 있었는지 △내란 사법절차의 속도와 내용에 대한 생각은 △사법적 처분은 어때야 하는지 △이 사태가 주는 역사적 교훈 등이었다.
언제 어디에서 계엄 소식을 들었는 지를 묻는 질문에서는 연령대에 따라 명확하게 구분이 됐다. 40대 이상의 응답자들은 모두 집에서 들었거나 귀가 중에 동료나 선후배들의 전화를 통해 들었다고 한 반면, 40세 이하의 응답자들은 일찍 잠에 들었다가 휴대전화의 알림음이나 다음날 일어 나서야 소식을 들었다고 답했다.
"당일(12월 3일)에는 일찍 잠들어서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휴대전화를 보니 단체 메시지 방에 친구들의 연락이 수십 통 와 있었고, 이제야 무슨 일이 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기사를 찾아보았고, 뉴스를 틀어서 상황을 확인했어요."<20대, 여성, 대학생, 경기 부평>
"자다가 핸드폰이 미친듯이 울려대서 알게 됐습니다. 집에서 핸드폰과 TV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했고 한동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30대, 여성, 회사원, 전북 전주>
"저녁 뒤풀이 모임 끝나고 집에 들어갔는데 후배전화로 듣게 되었다. 처음엔 무슨 황당한 이야기냐며 후배에게 화를 내었으나 뒤에 뉴스를 보며 알게 되었다."<60대, 남성, 전북 전주>
당일이든 다음날이든 계엄 소식을 접하게 된 이웃들은 극한의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대부분의 응답자들은 서면인터뷰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미친X'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정도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미친X들이라는 생각과 함께 시대착오적인 X들. 어찌 저런 것들을 정부랍시고 대해 왔을까라는 자책도 있었다. 행동하는 시민 때문에 쿠데타는 불가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60대, 남성, 전북 전주>
"큰일이다. 대통령 저X 미친X이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그런데, 군인과 경찰들의 동작을 보면서 조금 안심이 되었습니다. 군인과 경찰의 행동이 살벌하지도 민첩하지도 않았거든요. 어쩔 수 없이 하는 소극적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잘하면 우리 국민의 힘으로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에 소극적으로 행동한 경찰과 군인들에게 감사합니다."<60대, 전 대학교수>
"처음에는 뭐지? 장난인가 생각했고 곧 미친짓이다. 나라 말아 먹겠다. 국가적으로 창피하고 후진국으로 인식되겠다. 현실적으로 전혀 타당하지 않다라고 생각했습니다."<70대, 남성, 전 교육공무원, 전북 전주>
"아는 지인 몇 분에게 모처 또는 저희 집에서 모이는게 어떨지 상의하였고, 내내 서로 미친X라고 욕을 했습니다."<40대, 남성, 연구원>
"‘이게 무슨 일인가’라는 당혹감이 가장 컸습니다. 주변에서 계엄에 대해 잘 모르는 친구들은 “내일 출근 안 해도 되는 거냐”는 농담을 하기도 했지만, 저는 손이 떨릴 정도로 불안했습니다. 당장 우리 동네에 군대가 배치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까지 들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30대, 여성, 회사원, 전북 전주>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먼저 든 감정은 분노였습니다. 오랫동안 투쟁해서 만들어낸 민주주의를 이렇게 쉽게 흔들어 보려고 시도했던 그 자체가 믿기지 않았고, 국민을 얼마나 가볍게 보면 이런 결정을 ‘툭’ 던졌다가 철회할까… 이건 지나갈 수 없는 일이고 결국 거리에서 싸워야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친구들과 대화했던 기억이 납니다."<20대, 여성, 대학생, 경기 부천>
"취업준비생이라 도서관에 있다가 옆 사람들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알게 됐고 나라가 위기에 직면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 집회나 시위 현장은 찾지 않았다."<20대, 남성, 취업준비생>
12·3계엄이 좌절된 이후 전국 도심 곳곳에서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다.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쪽과 계엄을 옹호하는 시민들은 각자의 구역에서 경쟁적으로 집회와 시위를 이어갔다. 이웃들의 대부분은 집회와 시위에 참여했다. 20대의 취업 준비생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30대의 공직자는 그럴 수 없어서 참여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60대의 전 대학교수는 서울에 직접 가서 한 차례 참가하고 자신의 거주지에서 또 한 번 참가했다고 밝혔으며 40대의 연구원은 서울에서 3차례, 자신의 거주지에서 2차례 집회에 나갔다고 답했다.
"참여할 수 있을 때는 토요일마다 나갔던 것 같습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본회의장 빠져나가 표결 무산 됐던 날, 다시 표결 이루어진 날을 비롯해 탄핵 선고 전까지 시간 나는대로 광장과 거리로 나갔습니다. 특히 표결 무산 됐던 날 너무 추었던 기억이 나요.
"<20대, 여성, 대학생, 경기 부천>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온라인과 주변 지인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을 응원하며 지지했습니다. 마음만큼은 늘 그들과 함께였습니다."<30대, 여성, 회사원>
12·3비상계엄이 우리 이웃들의 삶에는 어떤 변화를 줬을까.
별다른 변화를 겪지 못했다는 응답이 절반 정도 차지했다. 그러나 생각 이상으로 사태 이후 큰 충격을 받은 이웃들도 많았다.
"전에는 나이가 먹어가면서 내가 점점 보수적이 되어가는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을 다시하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70대, 남성, 전 교육공무원>
"정권이 바뀌었다는 것 자체가 변화라고 생각합니다."<30대, 여성, 공무원, 세종시>
"절대 있을 수 없는 계엄과 쿠데타를 보며 역사의 후퇴를 보았지만 여기에 저항하며 사태를 원상회복하려는 시민의 힘도 함께 보았다."<60대, 남성, 전북 전주>
"저 개인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변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이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계엄 선포 이전부터 경기가 좋지 않았는데, 이후에는 밖으로 나오는 사람 자체가 줄어 폐업을 고민하는 지인도 생겼습니다. 수입은 줄고 물가는 오르며, 괜히 무기력해진다는 말이 곳곳에서 들렸고 실제 밖에 나가보면 썰렁하기도 했고, 사회 전체가 가라앉은 분위기였습니다."<30대, 여성, 회사원>
"평소 음악을 좋아하는데 그 후 습관적으로 뉴스만 보게 됩니다. 정치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며 견제하게 되었으며, 초등학교 때부터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굳히게 됐습니다."<50대, 여성, 경기 의정부>
"무엇보다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였습니다. 박근혜 탄핵 당시에는 고등학생이라 광화문 광장에 나갈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실제로 시민들이 함께 모여서 목소리 내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집에서 분노하는 한 시민이 되지만, 우리가 모이면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구나 하는 감각이 생겼어요."<20대, 여성, 대학생, 경기 부천>
"퇴근 후 안 보던 유튜브를 보는 시간이 늘었고, 알고리즘은 저에게 온통 관련 영상을 추천해 주고 있습니다."<40대, 남성, 연구원>
"가까이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감소되었습니다. 사람이 무서워졌습니다. 사람이 어디까지 사악해 질 수 있는지 늘 경계하고 의심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60대, 남성, 전 대학교수>
내란 사범에 대한 사법절차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엄정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응답한 가운데 50대의 남성 법조인은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내란에 참여한 자들에 대한 수사와 처벌이 시간이 걸려도 정확해야 한다"고 했으며 70대 전 교육공무원도 "속도는 조금 느리더라도 다시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조사, 처벌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며 내용면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응답을 보내왔다.
60대의 전 대학교수는 "전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미 만천하에 드러나 사실을 질질 끌며 재판을 더디 하는 사법부를 규탄해야 합니다. 검찰과 법원의 뿌리 깊은 악질적 근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 말기 세도정치시대부터 이어진 기득권자 횡포의 뿌리가 워낙 깊어서 검찰과 사법 개혁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해내야 합니다"라는 답변을 제시했다.
20대 대학생은 "파면 결정이 내려진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출발이었고, 시민들의 요구에 응답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내란 관련 형사 재판과 수사, 군사 정치권 주요 내란 인사들에 대한 책임 규명 아직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고, 핵심 당사자들이 소환 불응하는 모습도 종종 보입니다. 답답하고 무책임하다고 느끼죠. 정면으로 민주주의를 뒤흔든 사건인 만큼, 조금 더 가시적인 결과들이 빠르게 나오면 좋겠습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이번 사태가 주는 역사적 교훈에 대해서는 완수하지 못한 일제 청산의 문제를 지적하는 답변이 눈길을 끌었다.
"일제시대부터 제대로 된 청산이 없어서 항상 기득권은 살아남는다는 생각이 있는데, 다시는 그런 생각조차 안하도록 철저한 조사와 처벌이 필요합니다. "<70대, 전 교육공무원>
"친일 잔재 세력들을 청산하지 못한 결과가 이번에 들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또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50대, 여성, 프리랜서>
우리 사회에 대한 뼈아픈 지적과 교육의 필요성을 언급한 이웃들의 답변도 눈길을 붙잡는다.
"이미 대한민국은 시민 의식이 높아 순리에 어긋나는 쿠데타나 불법적인 일들은 불가능한 나라이다. 결국 불법행위는 처벌되고 정의가 실현된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이분법적이며 사이비가 판치는 사회이다. 이념이나 도그마에 빠져있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교육, 특히 철학과 인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60대, 남성, 전북 전주>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감춰졌을지도 모를 문제점들이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쌓여 온 부패와 잘못이 여실히 밝혀졌고, 권력에 대한 견제 장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국민의 감시가 끊기면 언제든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으며, 결국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국민의 관심과 참여가 있을 때만이 민주주의는 지켜지고, 비극은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30대, 여성, 회사원>
"한국 내부에서의 양극화와 혐오, 특히 일부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 문제에 대해서도 외면할 수 없는 과제로 떠올랐다고 생각합니다. 탄핵 반대 집회와 극우 집회 현장을 눈으로 보았고, 그리고 '윤어게인'을 외치는 사람들을 파면 이후에도 계속 보았습니다. 이런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 불편하고 또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동시대 한국에서 어떤 교육이 필요하고 어떤 정치가 필요한지 생각해보게 됩니다."<20대, 여성, 대학생, 경기 부천>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관련자들의 색출과 확실한 처벌을 해야만이 재발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내란범들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다수 있는 점을 감안하면 초중고 학생들과 공무원, 고위 공직자들에게도 역사교육의 필요성이 절실함을 느끼게 됩니다."<50대, 여성, 경기 의정부>
"권력이 통제되지 않으면 항상 발생 할 수 있는 일이라 새삼 우리국민들의 위대함을 실감했다. 본건을 계기로 내란에 가담한 자들을 정확히 색출하고, 중형을 부과하여 다시는 이런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본보기로 삼았으면 한다."<50대, 남성, 변호사>
"역사 교육을 제대로 하여 포폄(褒貶:포상과 폄하)의 원칙과 포폄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바로 서야 합니다. 포폄이 제대로 되지 않은 역사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는 교육개혁이 시급합니다."<60대, 남성, 전 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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