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집 앞에 핵발전소를 짓겠습니다."
만약 이런 통보를 받는다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핵발전을 해야 한다', '더 확대해야 한다', '지금 기후위기의 대안은 핵발전뿐이다'라고 생각하고 믿는 이들도 이런 이야기에 "그래요. 좋습니다. 우리 집 앞을 흔쾌히 내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은 "말도 안 된다. 우리 집 앞은, 내가 사는 동네는 안 된다"고 할 것이다. 간혹 핵발전소 지역 주민들이 신규 핵발전소를 유치해 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미 어쩔 수 없는 것'에 기반한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발전소와 함께 살아온 이들에게 방사능의 위험이나 핵폐기물의 부담, 경제적 의존은 일상이 돼 있다. '이미 어쩔 수 없어서' 발전소가 더 건설돼도 '어차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이 주민들에게 있다.
핵발전에 대한 입장이 어떻든 간에 적어도 내 집 앞은 안 된다는 것, 냉각을 위한 물이 풍부한 한강 옆도 안 되고, 전기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서울도 안 되고, 송·배전이 간단한 수도권도 안 된다고 한다. 생명이 없는 아스팔트 위는 어려워도 땅과 바다, 산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사람들, 그래서 그것이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쉬웠다.
경찰은 '전기본 폐기'를 외친 활동가들에게 수갑을 채웠다
지난해 9월, 세종시 정부종합청사 대강당에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공청회가 열렸다. 나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 공청회가 시작되기 전, 활동가들과 주민들이 단상 위에 올라 "11차 전기본은 무효다, 폐기하라!"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산업부공무원과 경찰이 순식간에 활동가와 주민들의 사지를 들었다.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비명과 고성이 오갔다. 공청회장 밖으로 끌려 나온 이들의 손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미란다원칙을 제대로 고지받지 못했고 남성경찰이 여성 활동가의 몸을 강제로 들기도 했다.

그날 연행된 18명 중 10명은 '공동퇴거불응' 혐의로 약식기소 돼 법원으로부터 벌금 100만 원 약식명령을 받았다. 이 중 6명은 부당한 처벌에 맞서 정식 재판을 청구했고 지난 8월 19일 첫 재판을 받았다. 검찰은 정식 재판에서도 6명 모두에게 벌금 100만 원씩을 구형했고 1심 선고는 10월 10일 내려진다. 누구도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고, 단지 공청회의 절차적 문제와 11차 전기본의 부당함에 항의했을 뿐이었다.
공청회장 가장 맨 앞자리에는 전력계획으로 영향을 받는 주민들이 아니라 이른바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앉았다. 단상 위에서 전기본 폐기를 외치는 활동가들의 외침에 누구 하나 이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 보자고 하는 이들이 없었다. 경찰에 사지가 들려가는 활동가들을 보고도 그들은 침묵했다.
'국민 의견 수렴'의 허상
공청회는 전력계획 수립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다. '전기사업법' 제25조 2항은 이렇게 규정한다.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은 기본계획을 수립하거나 변경하고자 하는 때에는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과 협의하고 공청회를 거쳐 의견을 수렴한 후 제47조의2에 따른 전력정책심의회의 심의를 거쳐 이를 확정한다. 다만,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이 책임질 수 없는 사유로 공청회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는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공청회를 개최하지 아니할 수 있으며 이 경우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공청회에 준하는 방법으로 의견을 들어야 한다. <신설 2013. 7. 30.>"
법 조문에도 여러 한계와 허점이 있다. 2013년 전기사업법 개정으로, 산업부 장관이 책임질 수 없는 사유가 있으면 공청회를 생략할 수 있도록 하는 단서 조항이 신설됐다. 시행령은 그 사유를 "이해관계자의 방해로 공청회가 두 차례 이상 무산된 경우"나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한 경우"로 규정했다. 이는 주민이나 시민의 문제 제기와 항의가 오히려 공청회 무산 사유로 간주하는 결과를 낳아, 공청회 자체를 생략할 수 있는 빌미가 돼 버렸다. 결국 공청회의 본래 취지인 주민 의견 반영 기능은 심각하게 훼손됐다.
더구나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 과정에서 회의록이나 세부 근거자료는 지금까지 공개된 적이 없다. 과도하게 부풀려진 전력수요 전망과 전원믹스(핵발전·재생에너지 비율) 결정의 구체적인 산출 근거 역시 시민이 검증할 방법이 없었다. 이런 정보 비공개로 인해 공청회는 정보 비대칭 속에서 일방적인 발표만 이루어질 뿐이었다. 또한 주민이나 시민이 공청회에서 의견을 제출하더라도 이를 반드시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의견 청취 절차'는 존재하지만, 실제 정책 반영 여부는 불투명하다. 결국 정부는 법적 절차만 충족하면 "의견을 들었다"는 형식적 면피가 가능해지고, 공청회는 실질적 의견 수렴 장치로 기능하지 못하게 됐다.

정부세종청사에서 평일 오전에 열린 공청회는 애초부터 주민 참여를 가로막았다. 핵발전소나 송전탑 인근의 주민들은 대부분 고령자이거나 농·어업에 종사하는 이들이다. 온라인으로 사전에 신청해야 하고 신청한 이들 중에 선택돼야만 공청회장에 입장이 가능하다. 운 좋게 선택되면 평일 오전에 열리는 공청회장에 도착하기 위해 새벽같이 길을 나서야 한다.
현장에서는 보안검색과 물품검사까지 거치며, 전기본에 대한 입장을 표현하는 피켓조차 들고 들어갈 수 없었다. 공청회장은 오직 전문가와 관료들만 앉아 있었고, 방송 카메라가 그것을 담았다. 그 자리는 국민의 의견을 듣는 공간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계획을 합리화하기 위해 짜인 무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난 20여 년간 전기본 공청회가 모두 그렇게 진행됐다. 고준위핵폐기물, 신규핵발전소 건설, 노후핵발전소 수명연장, 송전시설 건설 등 무수한 에너지 관련 설명회, 공청회가 모두 그렇게 진행됐다.
수백 쪽 계획서 대신 20쪽 요약본만 공개됐고, 세부 근거자료나 회의록은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주민의 삶과 권리를 좌우하는 중대 결정이 '요식 절차'에 불과했다. 과거에도 공청회가 항의 속에 무산되거나 지연된 적은 있었지만, 형사입건과 재판으로 이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공청회에서 수갑이 채워진 것은 에너지정의와 기후정의였다.
민주주의 없는 전력계획, 기후정의 없는 기후정책
전기본은 전력수요 전망, 발전·송전·변전 설비 건설계획을 담는 전력정책의 최상위 행정계획으로 2년마다 수립하게 돼 있다. 2002년 1차 수립 이래 지금까지 회의록이나 세부 근거자료는 공개된 적이 없다. 공청회는 수백 쪽 계획서 대신 20쪽 남짓한 요약본만 제시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핵발전소와 송전시설 지역 주민은 언제나 배제됐다. 주민들은 강제이주와 방사능의 위험, 핵폐기물의 책임을 떠안았다. 2014년 밀양의 어르신들은 송전탑 건설을 막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산속 농성천막에서 지냈다. 포크레인과 헬기를 앞세우고 온 수천 명의 용역직원과 경찰 병력이 행정대집행을 강행한 날 주민들은 스스로 땅을 파고 그 안에 몸을 뉘었다.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묶었고 농성천막 안에 스스로를 가뒀다.
한전은 행정대집행으로 농성천막을 부수고 주민들과 연대자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통곡하고 있을 때 보란 듯이 소나무를 베어냈다. 결국 밀양에 765만kV(킬로볼트) 송전탑은 세워졌다 어디 밀양뿐이겠는가. 홍천, 월성, 수많은 마을의 주민들이 곳곳에서 마을공동체와 삶터를 지키기 위해 부정의한 전력계획에 맞서 싸워 왔다. 민주주의가 없고, 인권이 없고, 투명한 정보공개가 없이 부풀려진 전력수요와 엘리트 전문가만 남은 것이 한국의 전력계획이 걸어온 길이었다.
정부는 기후위기를 말하지만, 11차 전기본은 기후위기를 심화시키는 계획이었다. 노후 핵발전소의 수명 연장, 신규 핵발전소건설, 대규모 송전망 확충, SMR 건설. 모두가 재생에너지 확대를 가로막는 정책이었다. 서울의 전력 자급률은 10%에 불과한데, 발전소 지역은 200%가 넘는다. 주민들의 눈물과 희생 위에 수도권의 불빛이 켜지고 있다. 수도권의 전력을 위해 지역은 송전탑과 핵발전소, 핵폐기물을 떠안는다. 이것이야말로 '에너지 부정의'다.

퇴거되어 온 삶, 퇴거할 수 없는 자리
그날 활동가들과 주민들에게 씌워진 혐의는 '퇴거불응'이었다. 공청회장에서 나가라는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다른 장면과 겹친다. 바로 발전소와 송전탑 인근에서 살아온 주민들의 역사다. 핵발전소 지역 주민들은 반복된 강제이주를 겪어야 했고, 방사능의 위험과 핵폐기물의 책임을 떠안고 살아간다. 밀양과 청도의 주민들은 초고압 송전탑 건설 과정에서 국가폭력으로 인한 인권침해를 겪어야 했다. 홍천, 삼척 등 전국 곳곳에서 마을과 터전이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됐다.
'퇴거'는 단지 공청회장에서의 퇴장 명령이 아니라, 수십 년간 국가가 지역 주민들에게 강요해 온 삶의 파괴였다. 따라서 공청회장에서의 '퇴거불응'은 이미 삶터에서 수없이 퇴거당해 온 이들의 고통을 알기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던 자리였다. 퇴거하지 않겠다는 불응은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려는 행위이자, 부정의한 구조 앞에서 더는 침묵할 수 없다는 절박한 호소였다.
퇴거당해도 되는 삶은 없다. 이제는 연대의 서명을 모을 시간
10월 10일, 1심 선고를 앞두고 에너지정의와 기후정의를 위해 정당하게 행동한 활동가들을 위한 탄원서 조직이 시작된다. 처벌받아야 할 대상은 시민이 아니라, 비민주적이고 부정의한 전력계획이다. 탄원에 참여하는 것은 왜곡된 절차와 부정의한 에너지정책에 맞서 시민이 함께 목소리를 모으는 과정이며, 기후정의와 에너지정의를 향한 연대의 발걸음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기사업법을 비롯한 제도의 개정, 그리고 국가 에너지정책과 전력계획 전반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 주민들이 정책의 주변이 아니라 주체로 참여하고,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며, 정의로운 전환이 보장될 때 비로소 에너지정의는 현실이 될 수 있다. 국가가 추진하는 정책이라는 이유로 퇴거당해도 되는 삶은 없다. 공청회장에서 차단된 "전기본 폐기"의 외침을 이제는 우리 모두의 목소리로 이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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