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흙이 배어든 손톱 끝은 늘 검었다. 그래도 손톱을 깎고 물에 불려 씻으면 손바닥, 손가락이 맑아져 절로 기분이 좋았다. 흙을 젖히고 펼쳐 잔 돌을 골라내며 생활하던 중 어느 날 김 화백이 나를 백 년 된 안성성당 사제관으로 데려가 인사를 나누도록 했다.
내가 영세를 받은 성당의 마리아나 수녀님에게서도 옛 시절 성남 소피아 수녀님처럼 아름답고 조용하면서도 활기차고 부지런함이 넘쳤다. 수녀님은 나에게 의무인 교리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내가 어릴 때 오랜 동안 개신교인 성결교회에 다녔다는 것은 물론, 내가 성경 내용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그러나 싶었다. 그래도 교리시험을 쳐 만점인 100점 맞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고, 그 뒤 이상돈 주임 신부님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상돈 신부님은 대야에 물을 담아 발을 씻겨주시고는 예수의 아버지이자 목수 노동자인 요셉을 받들어 내게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이상돈 신부님은 언제나 친구처럼, 때로는 형과 아우 사이로 대해주셨고, 나를 부를 때 늘 '위원장님'이라고 불러주셨다. 그러하니 늘 나에게 다정 다감하셨다.
마리아나 수녀는 한 시절 수녀님이 모셨던 김수환 추기경을 뵙도록 세례자 모두를 버스에 태워 서울 혜화동사거리 한쪽에 있는 가톨릭대학교 추기경관으로 인도해 김 추기경을 뵙게 하였다. 추기경은 민주 투사답지 않게 조용하고 부드럽고 따듯하셨다.
나는 추기경님에게 방을 보여달라고 간청했다. 추기경님은 왜 그런 것을 보고 싶어 하느나면서도 거처하는 방을 보여주셨다. 십자가와 조그마한 책상 위에 성경책이 놓여 있을 뿐, 작은 방은 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단정했다. 방 한쪽에는 깨끗이 정돈된 보료만 깔려 있었다.
모두 따뜻하고 고마운 분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 앞날을 어떻게 개척해 나갈까 고심했으나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우리 집이 시골 한구석에 있으니 안성 시내 소식을 듣는 것도 둔했다.
그러던 차에 경기도지사 선거에 나서는 정치학과 동기동창 손학규의 선거운동을 돕게 됐다. 손학규가 도지사에 당선되고 2년이 지나서야 나는 작은 봉급의 경기도 자원봉사센터 센터장이 됐다. 센터장 활동을 하던 2년 동안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버스를 갈아타고 집에서 40리 길의 센터가 있는 수원을 오갔다.
적은 활동인원과 부족한 예산으로 경기도내 33개 시·군 자원봉사센터 활동가들에 대한 지원활동은 물론, 적십자, 중고등학교, 해병대 등 경기도 사회봉사단체와의 공동 봉사 활동, 전국적으로 산재되어 있는 자원봉사센터와 연대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활동도 알게 모르게 도청의 행정체계와 재정지원의 통제 하에 있었기에 정신적으로 피곤도 가중됐다.
센터장 시절 자원봉사 활동에 대한 감회는 남겨두어야겠다.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어 있는 사람을, 소외되어 있는 곳을 무보수로 메우는 사회적 헌신이었다. 또한 자원봉사란 자기 아닌,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남을 돕는 것이지만, 남을 도움으로서 자기를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남을 사랑함으로서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2년을 지냈지만 손학규가 지사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서 나도 센터장의 자리를 비웠다. 다시 실직자 신세. 아내 김 화백은 우리가 살기로 지은 집을 전세 놓고서도 모자란 생활비를 은행돈과 사채로 충당했나 보다. 그래서 집과 대지를 내놓았으나 팔리지 않았다. 아마도 대지까지 거의 6백 평이 되는 땅이 마음에 들더라도 살림집으로는 덩치가 너무 커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그 후로 안성땅에 몸 붙여 30년 가까이를 미련 없이 살고 있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밭을 일구고 산에 파묻혀 지냈다. 이스라엘에서 마련해온 키부츠 크파르블룸의 역사와 생활을 살피는 영문책, 최초의 키부츠인 데가니아의 역사적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은 일어판 자서전을 번역했지만 출판하지는 못했다.
내가 번역한 것들이 출판가들의 돈벌이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터이고, 그들에게 나는 한낱 볼품없는 무명인으로 여겨졌을 터였다. 게다가 나는 돈 한 푼 없었기에 출판비용 이야기만 나오면 주눅이 들고 마음이 졸아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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