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채희완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의 2021년 7월 1일자 '채희완의 탈춤1', "전근대의 유산 탈춤, 청년들에 의해 끓듯이 부활하다", 2022년 1월 3일자 '채희완의 탈춤2', "인생으로서의 탈춤"의 뒤를 잇는 글이다.
지난해 11월 7일 진주탈춤한마당제전위원회에서 주최하는 24회 진주탈춤한마당이 진주아트홀을 비롯한 살내공간에서 거행되었다. 행사의 일환으로 7일에는 상오 10시부터 현장아트홀에서 (사)진주문화연구소가 주관하여 “채희완의 탈춤이야기, 탈춤과 나”라는 주제로 ‘학예굿’ 이야기마당이 펼쳐졌다. 여기에는 채희완, 정병훈, 남성진, 김중섭, 강동옥 외 방청객 등이 참가하여 두 시간 반동안 열띤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다음은 강영진이 녹취한 것을 옮겨적는다,
남성진 : 안녕하십니까? 요즘 코로나 때문에 여러 가지로 어렵습니다. 진주탈춤한마당도 예술회관에서 하다가 지금 현장아트홀 본 공연장으로 옮겨 왔습니다. 탈춤한마당 안에 계속해 왔던 학예굿 행사도 <극단 현장 아트홀>에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학예굿은 학술행사 또는 학술대회 형식으로 진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특별하게 사랑방 형식으로 학예굿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채희완 선생님을 모시고, 채희완의 탈춤 이야기, ‘탈춤과 나’ 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좀 편안한 형식의 자리로 마련했기 때문에 경청하실 때도 편안하게 들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오늘 학예굿을 시작하면서 이 행사를 주관하고 주최하신 진주문화연구소의 김중섭 이사장의 인사 말씀부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중섭 : 참 뜻깊은 자리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채희완 교수님께서는 벌써 24회 진주탈춤한마당이 진행되는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탈춤에 대해서 오랫동안 연구해 오시고 또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현장에서 이론적인 뒷받침, 이런 걸 해 주셨는데, 채 교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대담의 사회를 해 주실 정병훈 교수님은 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대학 시절부터 탈춤을 철학과 학생으로 탈춤을 추셨는데, 그런데 그것이 진주에 와서 꽃을 피워가지고 지금 제전위원장을 맡고 계십니다. 그런 두 분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갖는 것이 대단히 뜻깊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아쉬운 것은 코로나 상황에서 또 지금은 좀 거리두기가 느슨해져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영향으로 많은 분들이 이 자리에 오시지는 못했지만, 저는 오늘 채희완 교수님의 말씀과 또 정병훈 교수님 두 분이 행사만이 아니라 대담한 과정을 좀 잘 기록해 남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른 아침 시간에 와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또 특히 오늘 이 행사만이 아니라 탈춤한마당 전 과정을 준비해 주시는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진주가 문화도시라고 일컫고 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성과를 냈는데 특히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유네스코 창의도시로 선정이 됐었죠. 물론 그 과정에 정병훈 교수님은 아주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고 많은 수고를 해주셨는데, 그 씨앗은 제가 생각할 때에는 탈춤한마당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출발은 진주오광대를 복원하는 과정이었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진주오광대가 일제시기에 중단되었던 것을 복원한다는 것은 보통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런데 그것을 이뤄냈죠, 이뤄냈고, 그 이뤄내는 힘이 바로 시민들로부터 나왔고, 특히 문화 예술인으로부터 나왔고, 하는 것이 저는 진주의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이제 결실을 맺기 시작을 했고 아마 저보다는 정병훈 교수님께서 더 좀 광고하고 싶으신 내용이 공예비엔날레일 것입니다. 그것에 관심을 좀 많이 기울여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진주가 문화도시라고 했을 때 시민들의 자긍심이 높아질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정말로 삶 속에서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그것이 구현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장황해진 감은 있지만 이렇게 인사말을 대신하면서 특히 멀리서 와주신 채희완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감사의 박수를 좀 보내드립니다.(박수 소리)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오늘 좋은 말씀 잘 경청해 주시길 부탁드리면서 이만 간단히 인사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성진 : 네, 감사합니다. 오늘 진주탈춤한마당에 제전위원장이시고, 또 사회까지 겸해서 진행을 해주시는 우리 정병훈 선생님 소개드리겠습니다. 인사 말씀과 함께 바로 채희완선생님하고 말씀을 나누는 대담 시간을 갖겠습니다. 정병훈 선생님 소개 드리겠습니다. 박수 보내주십시오.(박수소리)
<프레시안>에 대학탈꾼의 회고담 “탈춤과 나” 연재되고 있어
정병훈 : 네, 여러분 반갑습니다. 정병훈입니다. 우선 이런 학예굿을 마련해 주신 진주 문화연구소에 감사드립니다. 쉽지 않은 부탁인데 이렇게 허락해 주셔서 이 자리에 같이 해 주신 채희완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은 <프레시안>이라고 하는 인터넷 신문에 ‘탈춤과 나’ 라고 하는 지금 연재물이 게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1970년대에 탈춤을 췄던 사람들이 그 당시에 자신들의 경험을 조금씩 써서 지금 그 신문에 게재하고 있습니다. 채희완 선생님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계시는데 실제로 본인은 옛날에 썼던 거 하나 실으시고 당신 얘기는 별로 안 하셨어요. 그래서 이번에 선생님 얘기를 직접 들었으면 해서 제가 어려운 부탁을 드렸는데, 이렇게 응해 주셔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뭐 다른 말씀은 다 생략하고요. 바로 시작을 할까요?
남성진 : 예. 진행상. 혹시 마스크를 두 분께서 벗으셔도 될까요?
정병훈 : 그렇게 해도 될까요? 네. 그런데 너무 플로우가 어두워가지고 아이 컨텍트가 안 되니까.
남성진 : 조금 켤까요?
정병훈 : 조금만, 예, 조금만 해주시면.
채희완 : 여기는 좀 컴컴하게 (웃음)
정병훈 : 이런 얘기는 좀, 술 한 잔 해 가면서 해야 되는데, 아침부터 할려니 참 당황스럽더라고요. 그래서 어제 채희완 선생님을 밤에 계속 드시게 해가지고 아침까지 취한 상태에 계시면 얘기가 잘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한 12시까지 마셨는데 별로 안 취하세요. 그래서 아침에 조금 더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채희완 교수님의 약력을 간략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적어주신 게 아니고 제가 기억나는 것을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잠깐 써 본 것입니다. 채희완 교수님은 서울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서울 문리대 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셨습니다. 청주사대를 거쳐서 부산대학 무용과 교수를 역임하셨고요. 민족미학연구소를 창립하셔서 연구소장으로 이끄셨습니다. 1974년에 이애주 선생과 함께 탈춤에 기반을 둔 최초의 춤판 ‘땅끝’을 만드신 이후에 ‘칼노래 칼춤’ 등 여러 가지 많은 창작탈춤, 그리고 축전을 연출하고 기획하셨습니다. 물론 1996년에 진주탈춤한마당 출발에도 관여하셨지만, 1998년도서부터 예술감독을 맡고 계십니다. 그때부터 23년간 탈춤한마당에 예술감독을 맡고 계십니다. 1998년에는 진주오광대를 복원하는데 학문적인 기반, 그리고 연행적인 관점에서 저희를 도와주셔서 오광대가 잘 복원할 수 있게 뒷받침을 해주셨습니다.
이 정도로 소개를 하고요. 그냥 얘기하기가 좀 그래서 저도 몇 개의 주제를 적어 갖고 나오긴 했는데, 제가 뭐 채희완 선생님이라고 하기가 저는 좀 어려워요. 워낙 형, 형 하고 지냈기 때문에 그래서 편안하게 진행할 때는 형님께서는 뭐 이렇게도 얘기하고 하겠습니다. 근데 다 그런 사이들이시죠. 사실은 그래서 제가 미처 이렇게 짚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들께서 나중에 질문해 주시고 보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채희완 : 이제 시작을 하겠습니다.
정병훈 : 어떻게 잘 주무셨습니까?
채희완 : 조금 씁쓸하게 잤습니다. 술자리가 어제밤 조금 일찍 끝나는 바람에.
정병훈 : 조금 어제 부실했죠. 그래도 어제 국제적으로 좀 노셨거든요. 비엔날레에 와 있는 비엔날레 참여 작가들하고 저녁에 한 잔 했는데, 제가 한국 우리 민속예술계의 마스터라고 소개를 했더니 그 사람들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또 그분들한테 주법도 가르쳐주시면서 즐거운 시간이 됐는데 조금 술은 모자랐어요. 그렇죠?
채희완 : 정병훈 선생이 잘 가는 맥주집이었는데, 거기 미국 사람도 있었고 에스토니아 사람도 있었어요. 첫 자기 소개를 제 스스로 헤비드링커라고 했습니다.
정병훈 : 탈춤 활동을 어떻게 하셨나? 하는 것을 좀 시간적으로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제가 듣기에는 고등학교 시절에서부터 탈춤을 이미 아시고 시작하셨다고 그래요. 그래서 어떤 계기로 탈춤을 접하시게 된 거예요?
채희완 : 음. 고등학교 때는 탈춤을 잘 몰랐습니다. 고등학교 때 문학사 시간에 한국연극사의 한 대목으로 ‘산대놀이’라는 문자를 본 적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제가 탈춤을 만난 시기는 첫 재수때입니다. 저로서는 이제 인생 시련기의 첫 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건데요. 어느 대학에 들어가려다가 안 됐고, 2차로 들어갔는데 거기가 좀 안맞았습니다. 다음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가겠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재수할 때인데요. 시간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오갈 때도 없고 그래서 고궁을 갔습니다. 창경원입니다. 6월 초쯤 됐나요? 거기 수정궁이라고 하는, 그 호수 옆에 호사스런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그 옆에 오늘날로 치면 야외 무대라고 할까요? 계단이 길쭉길쭉하게 돼 있고 야외무대 같은 형태로 만들어져있는데, 거길 지나가다가 뭔 공연을 보고 거기서 놀랐습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부르르 떨었습니다. 그때 무슨 공연인 지도 모르고 본 게 나중에 보니까 ‘봉산탈춤’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경도 지역의 ’북청사자놀음‘이었습니다. 한 시간 30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는데 몸 자체가 막, 저걸, 저것을 해야지, 저거 하고 같이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그 공연들을 합니다. 해마다 그날쯤 극장무대에서 하지요. 왜냐하면 월남하신 분들이 옛날 살던 동네에서 하셨던 세시풍속의 하나로 단오날 음력 5월 5월이죠. 해마다 그 날이 오면은 나라에서, 고을에서 한 판 벌였던 그런 행사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날 그 자리에 오신 분들도 전부 월남하신 분들로 아마 마을잔치로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그것도 나중에 생각을 해본 것이죠. 그걸 보고나서 그 다음에 여러 차례 배우러 다니다가 실패를 하고 그 다음에도 실패를 보고 했어요.
재수할 때 단오날 창경원에서 처음 봉산탈춤을 보고서는
채희완 : 70년도에야 제가 원하는 학문에 들어갈 수 있게끔 입학을 했습니다. 입학하자마자 방을 붙였습니다. 문화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강의실 몇 호실로 오시오, 일곱, 여덟 명이 왔습니다. 그때 문화재 등 탈춤이라고 명시를 하고 싶었지만, 그때만 해도 저도 생경했던 용어였고, 다른 사람들도 그럴 거다 싶어서 문화재하고 괄호 치고, 장롱, 갓끈, 민속화 등등, 도자기류 또는 소리, 민요, 탈춤 등등 연희물, 이런 식으로 해서, 이런 쪽에 관심 있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싶어서 그렇게 방을 붙였던 거죠, 그랬더니 몇 학생들이 왔고, 그 자리에서 제가 미리 알아놓았던 탈춤 교습하는 장소로 갔습니다. 거기서 받아줬지만 별로 소통이 잘 되지는 않았어요. 여러 가지 이슈가 있었지마는 교습 조건이 안 좋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해서 며칠 같이 놀다가 그만 두고, 그 다음 한 달 있다가 다시 또 방을 붙였습니다. 그때 열세 사람이 왔어요. 그럼 이제 좀 든든하지 않나, 해서 또 가서 배움을 요청했습니다. 또 조금 잘 안됐어요. 서로간 소통이나 태도가 안 좋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왜 하려느냐?’ 이런 질문에 답변을 같이 간 사람들이 잘 못했고, 저는 뭐 말할 것도 없고요, 이런 자리 말고, 직접 보유자분들하고 접촉할 수 없나 해서 여러 궁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선 그만 두었다가 그 해 교양과정부 축제라고 하는 행사에 연극반을 통해서 축제 행사의 하나로 탈춤 공연을 한 번 하고 싶다는 전갈이 와서, 거기에 응해 가지고 한 일주일 간 독하게 연습을 해서는 노장으로 출연을 했습니다.
정병훈 : 그게 그러니까 대학에서 탈춤이 연행된 첫 번째 일이죠, 그러니까 정확하게 1971년 인가요?
채희완 : 칠십, 지금 인제 (정병훈 : 72년) 70년 이고,
정병훈 : 70년.
채희완 : 이듬해에 탈춤반이.
정병훈 : 탈춤반이 정식으로 생기기 전 얘기죠.
채희완 : 그 얘기고 이듬해에 서울대 문리대의 써클 등록 기간 내에 교문 앞에서 서명을 받아가지고, 30명 채우면 될 것을 56명이나 서명을 받아서 등록을 해가지고,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라는 것을 말하자면 뭐 공식적이랄까요, 그렇게 설립해서 뛰었습니다.
정병훈 : 네, 사실은 서울대에서 탈춤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부산대에서 먼저 탈춤을 하고 있었지요? 거기 나중에 같이 모여서 행사도 하시고 그랬는데 그 얘기도 좀.
채희완 : 71년도에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를 정식으로 설립을 하고, 그해 9월에 교정에서 공연했습니다. 봉산탈춤이었는데요. 한참 학교가 휴업 또는 휴교까지 했습니다. 휴업은 업무를 그만둔다는 거고 휴교는 학교를 폐쇄시킨다는 얘기잖아요. 그러니까 학생들로서는 일자리를 잃는 거죠, 일을 못하게 되니까 늘 시간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알바하는 사람 대부분이었지만, 나머지 시간들이 많이 있어 가지고 그 시간을 잘 써서 하루에 8시간 이상씩 연습을 했습니다. 보유자분들이 꼭 오셨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가지고, 9월 19일 교정에서 대학생들이 출연한 탈춤으로는 거의 처음 한 것이죠. 몇 개월 배워가지고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이제 열정적으로 땀방울과 술의 양이 비례된 그 물량으로 비롯해서 예상외의 호응을 관중들로부터 받고 튼튼하게 이 일을 같이 하게 됐습니다. 그 해에 김종필씨가 이끄는 정부 내각에서 김종필씨의 문화적 심성이 반영됐다고 생각이 되는데 대학문화축전이라는 걸 했습니다. 여러 종목으로 했습니다. 문학, 미술, 연극 등등하고, 그 종목 중에 하나가 전통예술 분야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말하자면 출전을 하게 됐습니다. 가서 이렇게 했는데, 부산대 전통예술연구회라는 단체가 공연을 하는데 수영야류 말뚝이 과장을 그것만 한 23분인가 했습니다. 지금 없어진 세종문화회관 자리였던 그 시민회관이었던 데요, 그 본 무대에서 했는데 보고 있던 회원들이 너무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어요. 너무나 신나고 근사하고 멋있는 것이어서 우리 모두 굉장히 쫄렸습니다. 그리고서 그들과 만나기 시작해서 그 해 겨울에 부산 가서 그 팀과 같이 놀았습니다.
정병훈 : 그렇게 이제 문리대에서 탈춤반이 만들어지고, 그리고 1972년서부터는 각 대학의 탈춤 문화가 전파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 아마 채희완 선생님은 연세대학교를 맡아서 특별히 친하게 하시고 또 탈춤도 가르쳐주시고 그랬다고 들었는데, 그때 다른 대학에 전파하시던 말씀을 좀 해 주시죠.
채희완 : 72년도 가을이었습니다. 이대 문리대 연극반에서 우리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에 요청했습니다. 올 가을에 연극 레퍼토리로 ‘봉산탈춤’을 정했다. 같이 좀 지도를 받아서 공연했으면 좋겠다. 요청이 들어와서, 배운지 얼마 안 되고, 이렇게 할 역량도 없는 편안데 좋다고 했습니다. 근데 한가지 꺼름직한거는 공연 레파토리 하나로 ‘봉산탈춤’을 잡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대학 연극반들은 레파토리를 이제 어떤 작가의 어느 연극작품을 잡을 것인가가 대학 나름대로의 큰 고민이었겠지요.
이화여대 문리대 연극반에서 봉산탈춤을 레파토리로 잡고 배우러 와
채희완 : 두 부류였습니다. 하나는 번역극 중심의 레파토리를 잡아서 하는 것, 또 하나는 리얼리즘 연극을 중심으로 잡아서 하는 것입니다. 리얼리즘 연극을 부문에서는 김영수의 ‘혈맥’에서부터 몇 작품들이 있습니다. 또 일제 때 유랑 극단에서 행한 것이 있고, 한국 연극사에서는 그런 경향의 것이 배제되어 있던 형편이었습니다마는, 유치진이나 신극운동을 했던 사람들 이외에 연극사에서 좀체로 잘 안 드러나 있는 그런 연극을 한 사람들을 좇아서 그걸 찾아하던 대학 연극반도 있었습니다. 서울 문리대 쪽이 그런 것이었는데요. 그것은 아마 조동일, 김지하, 허 술, 이런 분들이 연극반에서 좀 활동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은데요. 그게 나중에는 한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던 판인데 대학에서 탈춤이나 민속극이나 민속연희물을 공연하는 것은 60년대 후반에는 더러 있었습니다. 심우성, 무세중 선생이 주도해서 이끌어왔던 남사당패에서 대학 연극 또는 대학 축전 때 초청을 받아 가지고 공연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 정도였는데 대학생들이 직접 몸으로 출연까지 하면서 특히나 연극반에서, 대학 연극이 한 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인 거죠. 왜냐하면 한국 연극사의 핵심은 1920년대부터 대학연극입니다. 신극운동을 주창한 사람들도 전부 대학생들이었죠. 물론 일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다곤 하지만 대학 연극이야말로 그 나라 연극에 첫 출발점으로 매해 지금까지 그렇게 되었는데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만 그런 역사에서 대학연극반이 전통극 중의 하나인, 민중극 중의 하나인, ‘봉산탈춤’을 레파토리로 잡았다는 것을 저로서는 굉장히 감개무량해 했습니다. 물론 저도 여기 탈춤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주제에 그런 생각을 해서 여대생이 한다니까 더욱 더 그 의기를 높이 생각해서 같이 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 다음 해에 그들의 공연에서 역량을 키워가지고, 연극반 말고 따로 민속반을 만드는게 어떻겠냐 해서 시작한 게 이화여대 ‘민속극연구회’ 라는 것이지요. 같은 해에 연대도 생기고, 서강대도 생겨서, 서울권역에 세 군데가 동시에 한꺼번에 생겼습니다.
연대의 경우는 72년도에 망원동 일대의 도시 봉사활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그 다음 해에 동아리가 생기게 되었고, 서강대의 경우는 이훈상이라는 사학과학생이 주도적으로 이끌어냈습니다. 아까 저를 보고 고등학교 때부터 관심을 두고 하지 않았나 했는데 저는 그게 아니고 아마 이훈상 선생을 두고 말하는 건가 싶어요. 여기 경상대 김수현 선생님도 아마 고등학교 때 이들과 연관이 돼 있었을 겁니다만, 그 양반이 대학 사학과에 들어와 가지고 김열규 선생님을 모시고 ‘민속극연구회’를 만들었는데요, 인류학적 관점에서 굿이라는 걸로 해서 서강대의 뒷산인 마고산, ‘마고 할매’를 모시는 그런 행사로 출발해 서강대 민속극연구회가 생겨났습니다. 그때 각 대학 탈춤반 담당을 먼저 생긴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에서 저희들끼리 수의해가지고, 저는 이대하고 연대를 맡고, 서강대는 갓 들어온 입회한 지 얼마 안되는 장만철이 맡게 되었습니다.
정병훈 : 장선우 감독이 원래 본명이 장만철이지요?.
채희완 : 네, 맞아요. 그가 고고문화인류학과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인류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겠다 싶어 적합하겠구나, 그래서 서강대를 배정받았지요.
정병훈 : 연대에는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 가지고 희완이형하고 술 먹느라고 그 재미에 신촌에 많이 오셨던 것 같아요, 제가 채희완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거는 1974년입니다. 대학교 1학년 때니까 47년 전인데, 그때에 1학년 들어가서 이제 겨우 ‘봉산탈춤’을 배웠을 땐데 선배들이 어디를 자꾸만 가요. 그랬더니 어디 뭐 연습하는 데가 있다면서요? 한번 따라가 봤더니 서울사대의 무용실이었는데, 거기서 무슨 춤극을 연습하고 계시는데 너무나 재미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거기 가서 심부름도 좀하고 이러면서 이제 뭐라 그럴까, 이렇게 엉겨 붙었죠. 그래서 참가한 것이 바로 이애주 선생의 대학원 졸업 공연이었던 것 같아요. ‘땅끝’ 춤판. 이애주 춤판 ‘땅끝’이라고 하는 공연이었는데 그게 굉장히 무용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공연이었다고 하시는데요. 그 당시 얘기를 좀 들어보아야겠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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