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극의 문화충격
1980년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 광주역 인근에 있는 사회참여 성향이 강한 한빛교회를 다녔었는데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교회였다. 교회 학생회 고등부회장이기도 했던 나는 대학생 선배들의 비밀 집회나 모임에 참여할 수 있었고, 시국 강연도 자주 들으며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정신을 키웠던 것 같다. 80년 3월경 그러니까 5.18 광주항쟁 발생 이전 금남로 1가에 소재하고 있는 광주 YMCA 무진관에서 극회 '광대' 창단공연 마당극 <돼지풀이> 공연을 교회 대학생 선배들과 함께 관람하였다.
극회 '광대'는 광주 대학가의 탈춤 부흥과 전라도 지역의 최초 마당극 <함평고구마> 공연에 힘입어 1980년 1월에 창립된 마당극 극단이자 사회운동을 표방한 단체였다. 마당극 <돼지풀이>는 국가 축산장려정책에 힘입어 돼지를 키웠지만 수입개방으로 인한 도산과 이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을 다룬 작품이었다.
연극이란 무대에서만 이루어지는 예술로만 알고 있던 나로서는 체육관 한가운데 판을 만들고 배우들과 관객들이 대거리를 하는 공연을 처음 보았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날을 비롯하여 주요 행사가 있는 날이면 성극을 했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고등학교에서 연극반을 만들려고 했던 나로서는 마당극은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일단, 탈춤 등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활용하거나 새롭게 하고 있다는 점과 무대가 원형이라는 점, 특히 정부 정책의 신랄한 비판과 투쟁을 외치는 연극이라는 사실에 정말 “놀랍다” 라는 말이 적절하였다.
‘학생의 날’을 부활하자
고등학교 3학년 때 김진원이란 친구와 가깝게 지냈는데, 그는 아주 골수였다. 우리는 김대중 선생의 강연 테이프 등을 몰래 들으며 시국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하에 선배들은 독립운동을 했는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반성을 나누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우리는 일제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섰던 선배의 얼을 이어받아 독재에 항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학생의 날’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생의 날’은 76년 박정희 유신체제 하의 국무회의가 '각종 기념일들에 관한 규정'을 의결하면서 폐지가 되어 있었다.
광주지역 내 고등학교들과의 연대를 통한 전단 배포 작업이 인쇄소에서 정보가 노출되어 1차 실패하는 등 우여곡절을 밟았다. 결국 우리의 거사 일은 80년 5월 1일 광주일고와 광주상고의 대통령배 전국고교 야구선수권 대회 결승전이 열리는 서울 동대문야구장이 되었다. 송정역에서 밤 열차로 상경한 우리는 동대문 구장에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선배들을 만났고, 선배들은 적극적으로 유인물 배포를 도와주었다. 우리는 응원가를 열심히 부르며 유인물을 뿌렸고 일고 선후배 동문들에게 ‘학생의 날’을 부활하자는 주장을 널리 알렸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길 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라는 학생탑 비문을 마음에 다시 한번 새기었다.
80년 5월 1일 아침 학교는 발칵 뒤집혔던 모양이다. 전단지사건 이후 교육청과 학교 측에서는 우리를 제적하려 하였으나 담임선생님들의 인우보증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대학 탈춤반에 들어가다
광주 5월 항쟁 후 분노와 허망한 마음에 대학 진학에 별 관심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3학년 2학기 중간 무렵에 갑자기 마당극 <돼지풀이>가 생각났다. 그리고 마당극을 하려면 먼저 대학에 입학하여 탈춤반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 입학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대학입시 두 달을 앞두고 매일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일단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시라고. 아마도 당시 졸업정원제가 시행되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것 같은 대학입학이었다. 아무튼 조선대학교에 입학하였고 들어가자마자 자발적으로 탈춤반 ‘비나리’에 가입하였다.
여느 대학의 탈춤반처럼 일상은 탈춤과 막걸리 그리고 학습의 시간이었다. 탈춤반 ‘비나리’는 황해도 <강령 탈춤>을 대표적인 춤으로 삼고 있었고, 나는 앞사자를 맡아 정기공연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당시 강령탈춤 전수자는 현재 샤머니즘 박물관 양종승 관장이었다. 지금은 짧은 머리에 뿔테 안경을 쓰고 있지만 당시에는 머리도 길고 멋있게 파마를 돌린 쾌남아였다,
탈춤반은 탈춤을 통한 창작 마당극을 지향하였으나 역량도 역량이지만 준비 과정에서 학원 담당 정보과 감시를 넘지 못하고 자료들을 압수당하기도 했다. 탈춤반에서의 기억을 핵심어로 정리한다면 탈춤, 미대 앞 잔디밭, 막걸리, 오금 돋음, 5월 자료 정보과 압수, 보안 의식, 화순 야학 지원, 가장 행렬...등 이다. 내 기대만큼은 아니었어도 대학 생활 초반은 탈춤과 함께 자유와 낭만이 함께 했다.
사화문화패 갈릴리로
인생의 전환 시점들을 뒤돌아보면 마당극 <돼지풀이>가 대학 탈춤반에 가입하게 하였고, 또 다른 계기는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광주계림초등학교에서 열린 기독청년전국하계수련대회 참석이었다. 전국의 기독청년 행사였는데 여기에 참석한 소설가 황석영 선생께서 허리띠 빼 들고 “이것이 무엇이여 비암이라는 것이여, 한번 잡숴봐~” 일명 ‘뱀장시’를 처음 보았다. 일명 ‘황구라’의 진면목 접한 것이다.
집담회에서 기독 청년이기도 하고 대학 탈춤반이라는 나의 소개에 적극적으로 다가온 분이 오정묵 선배였다. 이어서 문화패 '갈릴리'에서 활동하게 되었는데, 대학 탈춤반의 조직 내 정리도 없이 이는 내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탈춤반 ‘비나리’에서는 결코 달갑지 않았겠지만 지나친 보안 의식과 제한적 활동에 대한 나의 저항이었던 것 같다.
문화패 '갈릴리' 는 정치 사회적 문화활동이 어려운 상황에서 기독교라는 종교의 울타리를 보호막으로 극회 '광대' 의 활동을 이은 사회문화운동 단체였다. 의정부 YMCA다락원에서의 공연 등 몇 차례의 공연 활동이 기억난다.
세월의 흐름과 망각이 잡아먹은 탓에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활동단원들은 많은 시간을 전남대 농과대 뒤편의 선배 자취방 4면을 소주와 막걸리병으로 두르며 많은 논의와 궁리가 있었던 것 같다. '갈릴리' 는 극단 '신명'을 창단하면서 해소되었지만 극회 '광대'와 극단 '신명' 창단 사이의 문화운동 단체였고 엄연한 활동 사례들도 있기에 광주의 문화운동사 정리에 있어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놀이패 신명 활동
‘82년도에 극단 '신명' 창단 공연을 '갈릴리'와 전남대를 비롯한 조선대 탈패 출신을 중심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국립극장 허규 극장장으로부터 마당극 <돼지풀이> 초청을 받았다. 이는 임진택 선배의 역할이 컸었고 공연을 위해 서울 올라간 첫날 임선배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했다. 당시 극회 '광대'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준비하였지만 돈철애비 역의 김윤기 선배가 군대에 있는 관계로 내가 맡게 되었다. 마당극 <돼지풀이> 관람이 계기가 되어 대학 탈춤반에 들어갔고 이어서 문화운동에 입문했는데 마당극 <돼지풀이> 공연에 배우로 출연하게 되었으니 운명은 이렇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극단 '신명'의 창단공연은 <안담살이 이야기>이다. 20세기 초 조선에 대한 외국의 지배에 초점을 맞추면서 1905년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통해 미국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를 도와준 사실을 극화했다. 제목에서 '담살이'는 머슴을 일컫는 말로 구한 말 전남 보성지역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했던 안규홍을 가리킨다. 마당극에서 주인공이라 할 건 없는데 <돼지풀이>에서는 돈철 애비역을, <안담살이 이야기>에서는 전봉준 역과 안담살이 역으로 비중 있는 역할로 마당극 배우로서의 입봉을 하였다.
이후 90년대 중반까지는 마당극 공연 활동을 하였고 1988년에 광주 5월을 다룬 마당극 <일어서는 사람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광주 5월의 진실을 알리는 데 일조하였다. 기억나는 것 중대구 공연의 금반지 사건은 정말 기억에 남는다. 대구YMCA 초청으로 갔는데, 공연 후 이야기 마당이 펼쳐졌다. 질문 중 하나가 대구는 광주 5월의 가해 지역인데 피해자로서 오늘 공연 소감이 어떠냐는 거였다. 나는 “가해자는 정치군인이지, 광주나 대구 우리 모두 피해자이다.”라고 답하였다. 이야기 마당이 끝나고 그 질문자는 본인이 경북대 의대 출신인데 답변이 고맙다며 졸업 반지를 손가락에서 뽑아 주었다. 나는 받을 수 없다 하였으나 한사코 거부하는 바람에 누군지는 기억해야 하지 않겠냐며 이름과 전화번호와 함께 금반지를 받았다. 이후 대구 YMCA 측에 사연과 함께 금반지를 되돌려 주라며 전달하기도 했다.
그 외에 농촌 현장의 수세 싸움과 우르과이라운드 반대 투쟁, 소값 싸움 등 여름과 겨울에는 농촌의 우시장과 오일장을 장돌뱅이처럼 돌며 마당극 공연을 하기도 하고 장구와 북을 들고 투쟁 현장을 함께하는 건 일상이었다. 87년 6월항쟁은 물론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금남로 충장로 등지에서 그림패, 문학패, 노래패들과 함께 문화선전 활동을 하였다.
특히, 89년에는 80년 이후 처음으로 5월 전야제를 ‘구동 실내체육관’에서 기획·연출 하였고, 국민운동본부 지원으로 90년에 전일빌딩 앞에서 드럼통과 베니어판으로 무대를 만들어 금남로에서 최초 광주 5월 전야제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오늘로 치면 예술감독인데 89년과 90년 그리고 92년 행사의 기획과 연출을 담당하였다. 그 후 광주 5.18 전야제 행사는 광주 5월의 주요 행사로 자리매김하며 오늘에까지 계속 진행되고 있디.
그 후로도 여러 가지
2000년대 중반에 영화제작사 ‘기획시대’의 유인택 대표와 만나게 되었다. 원래 80년대부터 마당극에서 문화운동을 했던 선배인지라 익히 알고 지낸 관계였고 영화판에 간 뒤로 간간이 소식만 듣고 있었던 때였다. 안성기, 김상경, 이요원, 이준기 등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는 광주 5월 영화였다. 정말이지 당시 촬영을 뒤돌아보면 김지훈 감독과 배우 스텝들은 시대의 의무처럼 모두 열심히 찍었다. 나는 홍보이사라는 명함을 받고 해결사 노릇을 많이 했다. 감독이 헬리콥터 빌려 달라면 경찰청과 소방청을 다니며 섭외하였고, 몹신을 위해 시민 엑스트라 1000명이 필요하다면 모아 오고, 경찰 장비가 필요하다면 경찰청에 들러 협조를 받아오기도 하였다. 개봉 이후에는 5월 어머니들을 모시고 서울도 여러 차례 왕래했다. 그래도 공식 관람객 약 730만 여명을 기록하며 광주의 진실을 전국화하는데 조금이나 역할을 하였다는데 자부심을 느낀 시간이었다.
인생 반세기를 넘기고 지난 세월을 곰곰이 뒤돌아보면 80년 3월에 보았던 마당극<돼지풀이>는 내 운명의 지침을 바꾸었고, 80년 5월은 역사의 현장을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보게 하였다. 이후 영화 ‘화려한 휴가’는 운명처럼 다가온 의무였다. 박사논문도 <1980년대 이후 마당극 연구>였다. 2000년 후반부터 대학 강단에 있으면서도 예술 현장과 항상 가까이했다. 최근에는 문체부 산하 공공기관에서 기관장을 지내며 예술 현장의 자생력 제고와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을 세계로 진출시키는 문화행정가로도 일하였다. 탈춤과 마당극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김도일: 문학박사, (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객원교수, (전)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