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통령선거에서는 기후변화가 사소한 쟁점조차 되지 못했지만, 적어도 지난 몇 년간 외신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한반도만 지구 바깥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 나라 언론에서 그나마 기후위기 소식을 자주 접할 수 있는 곳은 외신란이었다. 그래도 다른 나라들에서는 최근 몇 년 새 기후위기에 관한 관심이 부쩍 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나라 밖 분위기마저 달라진 듯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탓이다. 삽시간에 세계인의 관심이 전쟁에 쏠리면서 기후위기는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만 같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겉모습일 뿐이다.
정색하고 다시 보면, 전쟁을 둘러싼 국제 동향 가운데에 기후위기와 직간접적으로 얽히지 않은 것을 찾기가 오히려 힘들다. 전쟁 초기에 '체르노빌'이라는 이름이 재등장하며 핵발전소 안전 문제가 새삼 주목받았다. 당장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들여오기 힘들어지자 발을 동동 구르는 유럽 국가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에너지 체제 전환에 가장 앞서 있다는 이들 나라조차 여전히 화석 연료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미국 군수산업의 때 아닌 특수는 '그린 뉴딜'을 자본주의 회생 기회로 만들겠다던 미국 바이든 정부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준다 등등.
말하자면 비록 우리는 잊고 있을지라도 기후위기는 알게 모르게 쉼 없이 전진하고 있다. 전쟁으로 딴 곳을 향하던 눈길이 다시 지구 생태계 쪽으로 돌아오면, 그때는 더욱더 돌이킬 수 없는 규모로 커진 재난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인류는 불과 몇 달 후를 내다보더라도 '미지의 미래'를 각오해야 하는 형편이다.
최근 영어로 출간된 트로이 베티스(Troy Vettese)와 드류 펜더그래스(Drew Pendergrass)의 저작 <Half-Earth Socialism(지구의 절반 사회주의)>(Verso, 2022)은 이런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가는 인류에게 꼭 필요한 경고와 충고를 담고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정신 나간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을 이 책 내용은 오히려 한국 사회가 얼마나 거대하고 근본적인 시대 변화에 무감한지 보여줄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만하다.
에드워드 윌슨의 '지구의 절반' 프로젝트
먼저 'Half-Earth Socialism'이라는 이상한 제목부터 설명해야겠다. 마지막 단어야 우리말로 옮기면 '사회주의'이지만, 문제는 'Half-Earth'라는 말이다. '지구의 절반'이라니 무슨 뜻인가?
이는 에드워드 O. 윌슨이 제안한 '지구의 절반' 프로젝트에서 따온 말이다. 에드워드 윌슨, 익숙한 이름이다. 이제는 일상어로도 쓰이는 '통섭'을 주창한 진화생물학자 윌슨(1929-2021), 그 사람이다.
윌슨은 말년에 <지구의 절반: 생명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제안>(2016년)이라는 저작을 발표했다. 이 책은 우리말로도 나와 있다(이한음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7). 그러나 윌슨의 다른 저작에 비해서는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윌슨이 생전에 이를 알았다면, 무척 섭섭해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류세 3부작'이라는 이름으로 진화생물학 연구 역정을 총정리하면서 동시에 이로부터 기후위기에 대비할 지혜를 끌어내고자 남은 힘을 쏟아 부었고, 이 책은 그 중 결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윌슨은 과학기술과 산업문명 자체를 거부하는 생태 근본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기후 위기에 따른 대멸종으로 종 다양성이 사라질 경우에 인류 역시 생존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한 사람의 생물학자였다. 그래서 그가 인류 전체에게 남긴 유언과도 같은 제안이 '지구의 절반' 프로젝트다. 여러 나라가 국립공원을 만들어 자연을 지키듯이, 종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지구 전체에 걸쳐 보호구역을 정해 인간의 발길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규모가 어림잡아 지구 '절반'이다.
인간 문명은 지구의 대략 절반만 점유하자. 나머지는 다른 동식물 몫으로 돌리자. 이것은 무슨 대단한 양보가 아니다. 이 정도 조치는 취해야 인간 문명 자체가 붕괴하지 않을 수 있다. <Half-Earth Socialism>의 두 저자는 윌슨이 제안한 이 프로젝트를 고스란히 이어받는다. 단, 윌슨의 프로젝트가 실현되려면 자본주의가 모종의 사회주의로 전환되어야만 한다고 본다. 그래서 책 제목이 우리말로 "'지구의 절반' 사회주의"다.
이런 주장에는 대전제가 있다. 체제 변화 없이도 기후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논자들이 내세우는 해법이 하나같이 실제 효과가 미흡하다는 점이다. 두 저자가 비판하는 대표적인 해법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핵발전 확대이고, 다른 하나는 요즘 주목받는 바이오에너지 탄소포집저장(beccs)이나 태양복사관리(SRM) 같은 기술공학적 해법이다.
핵발전 확대론에 대한 비판 논리는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익숙하다. <Half-Earth Socialism>에서 보다 흥미로운 부분은 지구 행성 전체의 태양 복사 에너지나 탄소량을 관리할 수 있다는 기술공학적 해법의 한계를 비판하는 대목이다.
대기 중에 유황 에어로졸을 살포해 태양 복사 에너지를 산란시킨다는 SRM 구상은 미국 같은 강대국 정부가 가장 선호할만한 해법이다. 하지만 오존층 파괴나 더 심각한 기후 교란 같은 대재앙을 몰고 올 가능성이 높다. 바이오에너지 작물 재배 면적을 늘려 화석 연료를 대체하면서 동시에 광합성을 통해 탄소를 흡수한다는 beecs 구상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최소 인도 면적만큼 새로운 경작지가 필요하다. 이를 확보하려면 기존 숲을 대량 파괴해야 하는데, 이것은 더 효과적인 탄소 흡수원을 없애고 실험적인 새 흡수원을 만드는 미친 짓이다. 게다가 숲이 파괴되니 대멸종은 더욱 앞당겨진다.
<Half-Earth Socialism>의 이러한 비판은 절대 흘려듣고 말 내용이 아니다. 저자들이 결코 이른바 '문송한(문과라서 죄송한)' 인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저자 중 펜더그래스는 하버드대학 환경공학 박사과정에 있으며, 특히 지구 생태계 변화 관찰에 인공위성 등 우주공학을 활용할 방안을 연구 중이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들은 기후위기를 다루는 다른 저작들에 비해, 이미 대기 중에 배출된 탄소량을 줄이지 않으면 기후급변에 대처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지금부터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재앙을 막을 수 없다.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를 달성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며 나온 기술공학적 해법들이 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 궁지에서 빠져나갈 길이 있을까? 두 저자가 보기에는 오직 '절반의 지구' 프로젝트에 담긴 해법만이 출구가 될 수 있다. 가장 좋은, 아니 유일한 길은 숲을 늘려 대기 중 탄소를 흡수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숲'이란 좁은 의미의 숲만이 아니다. 인간의 손길에서 벗어난 육지와 바다 면적을 늘리자는 것이다. 얼마나? 최소한 지구 '절반'만큼 말이다.
다만 윌슨이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에는 문제가 있다. 그는 기존 경제사회체제가 변화하지 않고도 사람들의 선의에 따라 숲을 늘릴 수 있다고 봤다. 보통 이런 태평한 권고를 들을 경우에 잘 사는 북반구 시민들은 "그럼 남반구에 숲을 늘리면 되겠군" 하고 대꾸한다. "우리는 소비자본주의를 이어가겠다, 너희는 탄소 흡수 식민지가 돼라." 결국 사하라 사막에 태양광 발전 단지를 만들겠다는 유럽인의 사고로 돌아가게 되고, 숲은 실제로 조금도 늘지 않는다.
이런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기만 할 수는 없다. 숲은 늘어나야만 한다. 어떻게? 베티스와 펜더그래스가 제시하는 해법은 전 지구적인 생태-경제 계획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숲을 최소한 지구 절반만큼 늘리려면 농경지와 공업용지, 도시 면적을 조절해야 한다. 더구나 태양광과 풍력 중심 에너지 체제를 수립하려면 역시 광대한 대지가 필요하며, 이에 따라 인간의 산업 및 거주 영역을 더욱 엄격히 조절해야 한다.
이것은 '시장'에 맡겨서는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 필요한 것은 시장을 포함한 모든 인간 활동을 적어도 지구의 절반보다는 작은 규모로 유지하는 '계획'이다! 그래서 윌슨의 '지구의 절반' 프로젝트는, 베티스와 펜더그래스가 보기에는, ''지구의 절반' 사회주의'로 재구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엄청난 시대 변화에 눈 감고 있는 한국 사회
성장을 억제하는, 아니 어떤 면에서는 축소하는 계획 경제라니! 오늘도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에 노심초사하는 한국인에게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티스와 펜더그래스는 오스트리아 철학자이자 경제학자 오토 노이라트의 민주적 계획경제론,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소련 경제학자 레오니트 칸토로비치의 선형계획법, 사이버네틱스 이론가 스태퍼드 비어가 칠레 아옌데 정부를 위해 개발한 사이버신 시스템 등등을 넘나들며 생태-경제 계획 체제의 가능성을 신나게 논한다. 실은 이 논의가 <Half-Earth Socialism>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인데, 여기에서는 이쯤만 하겠다.
지금까지 소개한 내용만 보고도 많은 이들이 '유토피아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두 저자는 아예 책 서두에서 자기네 논의가 '유토피아적'이며 경제위기, 감염병위기, 기후위기가 겹친 이런 대위기 시대야말로 '유토피아적' 방향 설정에 따른 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못 박는다. 저자들 스스로 그렇다고 미리 전제하고 이야기를 풀어놓으니 '유토피아적'이라고 비판해봐야 소용이 없다.
다만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할 동료 한국 시민들을 위해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하자면, 이 책에 인용된 스위스 연방기술연구소의 제안을 들 수 있겠다. 이 연구소는 산업문명과 지구 생태계가 균형을 이루려면 전 지구적으로 1인당 전력 사용량이 2000kWh(킬로와트시) 수준으로 수렴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현재 미국인은 1만2000kWh를 사용하고 유럽인은 6000kWh, 인도인은 1000kWh를 쓴다. 한국은 1인당 사용량이 2020년 현재 9826kWh다. 거의 미국 수준이다. 이걸 2000kWh로 줄여야 한다고? 마음의 충격을 덜기 위해 가정 사용량만 따져도 한국은 5000KWh 수준이다. 어쨌든 전기 소비를 절반 이상 줄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베티스와 펜더그래스가 주창하는 전 지구적 생태-경제 계획 체제는 아니더라도, 국가별로 전기 소비 총량을 설정하고 개인에게 사용가능량을 할당하는 체제가 등장할 가능성은 결코 적지 않다. 이것만으로도 지난 40여 년간 겪은 시장 만능주의와는 확연히 다른 질서다. 기후위기 때문만이 아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러나듯이 열강 간 전쟁 가능성 증대 등도 이런 질서가 출현하도록 재촉하고 있다.
최소한 1930년대에 시작된 대전환만큼은 근본적이고 충격적일 대전환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100여 년 전 대전환이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대량 생산-소비 체제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같은 자본주의라 해도 그 전과는 차원이 다른 풍요의 자본주의가 시작됐다. 20세기 말 들어 그 관리 주체가 케인스주의 국가에서 초국적 금융시장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대량 생산-소비 체제의 기조 자체는 지속됐고 더욱 확대됐다.
지금 다가오는 대전환은 정확히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미지의 여정이다. 수십억 인류가 풍요를 한껏 누린 뒤에 이를 엄격히 조절해야만 하게 된 초유의 상황이 닥치고 있다. '유토피아적'이라 자처하는 <Half-Earth Socialism> 같은 책조차 이런 현재 추세를 정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전혀 '유토피아적'이지 않다.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이다.
유토피아적인 것은 오히려 지금 우리다. 2022년의 한국인들이다. 세계의 시계가 여기에까지 이르렀는데도 한국 사회는 자칭 '진보'와 '보수'가 오로지 강남식 생활양식을 둘러싸고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시간은 더욱더 급박하게 흘러가는데, 마음만 답답하다. 우리는 과연 깨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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