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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속 운동권 마이크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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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속 운동권 마이크 잡다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10.

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중 10편을 골라 주 2회(수, 토요일)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네이버 블로그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에는(https://blog.naver.com/tongwoohn/222631939375) 2020년 7월 이후의 모든 연재 글( 25편)을 볼 수 있다.

1. 김구 선생 마이크 잡다

2. 죽산 선생 마이크 잡다

3. 마륵사(마륵사) 선생 마이크 잡다

4. 일곡(유인호) 선생 마이크 잡다

5. 김재준 목사 마이크 잡다

6. 강원용 목사 마이크 잡

7. 스코필드 박사 마이크 잡다

8. 서인주 도사 마이크 잡다

9. 이지 스톤 마이크 잡다

10. 땅 속 운동권 마이크 잡다

"살아가는 길 중간에 어두운 숲을 만나 길을 잃었네, 너무도 깊은 잠에 취해 있어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없었네, 마음이 찢겨 나갈듯한 무서움에 떨며 어느 골짜기에 이르러서야, 위를 바라보니 행성의 빛줄기가 밝은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단테의 지옥편 첫머리)."

잠든 지성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그 별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성은 용기와 행동이며 인간다움의 본질이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만으로도 그 본질을 잃는다.

▲단테 <신곡> 지옥편 1곡(어두운 숲속을 헤매며)

그래서 시대정신을 외면하고 행동하지 않는 지성은 곧 인간다움을 잃는 죄인의 길이다. 시대정신이란 무엇인가. 그 시대가 당면한 고통을 해소하는 일이요 그 시대가 안고 있는 난제를 해결하는 일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성인이 되면서 깨닫게 되는 정의감을 행동에 옮기는 일이다. 예부터 인의예지를 인성지강(人性之綱)이라 했다. 의(義)는 그릇된 일을 외면하기 어려운 인간 본성이다. 옳은 일을 외면하면 인간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가책을 느끼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정의감은 천차만별이다. 기질적이기도 하고 환경 탓이기도 하다. 남자는 죽을지언정 불의에 굽혀서는 안 된다(不可以不義屈)는 격려도 있다. 그러나 정의의 관철은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고, 또 쉽게 이루기보다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 한편 공자의 입신행도양명(立身行道揚名)도 입신양명(立身揚名)으로 행도가 빠진 채 부귀영화를 재촉한다. 영광의 길과 영화의 길은 그래서 착종(錯綜)되기 쉽다. 영화가 물성(物性)이라 해도 쉽게 빠지게 마련이다.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원대 복귀하겠다던 혁명 공약. 눈물까지 흘리며 민정 불참까지 선언했던 박 장군. 그러나 그는 곧 이어 대선 출마에 3선 개헌까지 나아가 유신을 선포하며 영구 집권을 꿈꾸지 않았는가. 유족한 가문을 배경으로 소년등과에 성공한 YS는 의회주의만으로도 대만족이었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까지 서민을 살리겠다던 DJ는 IMF 먹구름이 기업을 덮쳐오자 ‘대중경제’를 포기하고 기업 살리기에 앞장서 많은 노동자를 퇴출시켰다.

왕조시대에 의를 구하려다 허다히 죽임을 당한 경우는 그래서 더 떳떳하다. 한말만 해도 동학란이었고, 이어 일어난 척왜 소중화 의병이었고, 끝내 국운이 기우니 민보군과 한데 휩싸여 모두 독립군이 된다. 불의를 타도한다고는 하나 오히려 그 저항이 본질이었다. 독립이 눈에 보여 싸웠다기보다 싸움 자체를 피할 수 없어 싸웠다고 봐야 한다. 순국이다. 의를 쫓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영화는커녕 끝내 불의를 극복하려다 대부분 생을 마감했다.

4·19 전 민주인사가 계셨다. 종교인 언론인 학자들이셨다. 그 이후 4·19세대, 6·3세대, 그리고는 반 유신전사들. 유신 말기 ‘이 한 줌도 안 되는 부패특권층의 부귀영화가 얼마나 많은 국민을 소외의 골짜기로 몰아넣느냐’ 외치며 할복자살한 김상진 군. 무릎 끓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으리라며 지하에서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리라했던 그의 유서,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5·18을 기점으로 극렬히 저항한 386세대. 오늘도 그 여진이 정치 권력화란 비난을 몰고 온다. 다른 한편, 전두환 시대는 당시를 살던 많은 젊은이의 인생행로를 한꺼번에 바꿨다. 경찰에 폭행당하고 구치소 찬 바닥에서 뒤척이다 심한 디스크로 고생하던 문학청년은 학원계를 전전하다 생을 마감했다. 위장 취업으로 작업대를 청소하다 손가락이 잘려나간 명문대생도 장갑을 낀 채 입시 학원가에 둥지를 틀었다. 여러 번 해고되어 석재공장에서 일하다 암으로 세상을 등진 운동가. 귀농해서 두부공장으로 연명하는 운동가도 있다. 정치권에서의 비난은 먼 얘기다.

묵묵히 동참해 목청껏 구호를 외치던 이들이 자신의 인생을 걱정하는 것은 사치였다. 이제 각자도생 길을 걷는 이들도 가끔 모여 술잔을 기울인다. 엄혹한 군사독재와 맞섰던 젊은 시절을 후회하진 않는다. 다만 정치권 동학들 탓에 순수했던 386이 폄하되는 세태를 더 아쉬워한다. 이들은 여전히 주어진 삶의 공간에서 건실하게 살아가고 있음에 만족한다. 다만 평범한 386의 삶이 비난 받는 386과 구분해서 평가받아야 한다는 소박한 소망이 없는 건 아니다.

그 많던 386은 지금 다 어디에. 지금 그 뿌리는 외친다. 70년 11월. 만 22세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며 분신했다. 81년 5월. 서울대 4년 김태훈은 광주희생자위령제에 침묵으로 참여한 동료들이 사복형사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도서관 6층에서 내려다보다 ‘전두환 물러가라’를 세 번 외치고 투신했다. 바로 엊그제 386 출신 변호사 권경애는 혁명 평등을 외치다 분신까지 결행한 동지들을 한평생 잊지 말자던 언약의 귀착점이 고작 고관이냐며 울분했다.

반독재투쟁 속에 장렬히 산화한 투사들은 부끄러움과 책임감의 원천이다. 지금 적들을 물리치고 386은 나라를 이끈다. 그런데 왠지 부끄럽고 민망하다. 주변부 386의 객쩍은 냉소주의로 치부만 하면 그만인가. 땅 속 운동권 심사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국민소득 3만 불인데 아직도 왜 전태일인가. 왜 불평등 신분세습은 더 공고화되는가. 그 좋아졌다는 민주화는 왜 무한경쟁 무한이윤만 부추기는가. 덩달아 기득권화한 지식인들은 지금 누굴 깔아 뭉기고 있는가.

보이는가. 지금 중위소득의 50% 미만(빈곤층) 비율이 16%다. 5천만 중 800만이다. 비정규직도 1,000만 수준이다. 자본노동비율 베타값이 최근 9배다.(2016 8.3배) 선진국 수준 4~5배보다 또 버블시대 일본보다 높으며, 프랑스혁명 때도 7배를 넘지 않았다. 더하여 상위1%의 주택 소유 32%. 그런데 30인 이하 사업장 1,200만 명 중 노조원 비율은 0.1%에 불과하다. 100인 미만 400만도 1.7%다. 노조원들이 아무리 활동해도 소득개선 되겠는가. 절로 나는 한숨이다.

거기다가 자동화·전산화로 많은 업종이 정합되고 있어 다들 고학력 고능력을 필요로 한다. 소위 정규직의 전문화다. 남은 일은 허드렛일이다. 작업 준비, 마무리, 배송 등. 그러니 정규직의 전문화가 진행될수록 비정규직은 점점 늘어나며, 따라서 정규직의 배려 없이 비정규직의 처우는 개선되기 힘들어진다. 386의 대부였던 김근태 열사의 소원은 따뜻한 시장경제와 평화공존이었다. 우리가 온전히 할 수 있는 민생경제도 이젠 정부가 직접 나서야 할 판이다.

맹자도 국가(明君)가 궁민(窮民)을 살려야 한다고 했다(制民之産). 백성들이 처자를 거느리고 부모를 모심에 부족함이 없도록 해주는 게 목표다. 아니면 나라 망한다(無恒産 無恒心). 지금도 집권층의 중심은 늘 시장경제요, 관료들은 영화누리기 바쁘다. 민주화 세대도 별 수 없다. 준비 없는 소득주도 그 아닌가. 다들 상위 10% 아니면 비관적이다. 출산을 기피하며 다 망하는 판에 기후 위기는 사치라니 이보다 더 한 폭동 있겠는가. 막으려면 활빈정부 되어야 한다.

독자의 소리

우연히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을 읽었습니다.

특히 ‘땅속 운동권 마이크 잡다’에서 20여 년 전 어느 교수(경제장관 역임)가 제창한

‘고통의 교대’가 떠올랐습니다.

그간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해서 기업을 키웠습니다(兄富積金) .

이제 3만불 시대가 되었으니 기업이 노동자를 키워야 합니다(弟富積金).

기업인의 두툼한 손등에 노동자의 깡마른 손을 포개야 합니다.

4.19의거 이래 수많은 운동권이 땅 속에 묻혔습니다.

한결같이 제민지산(制民之産)을 외치고 있습니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약자를 구제해야 합니다. 기본소득보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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