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중 10편을 골라 주 2회(수, 토요일)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네이버 블로그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에는(https://blog.naver.com/tongwoohn/222631939375) 2020년 7월 이후의 모든 연재 글( 25편)을 볼 수 있다.
1. 김구 선생 마이크 잡다
2. 죽산 선생 마이크 잡다
3. 마륵사(마륵사) 선생 마이크 잡다
4. 일곡(유인호) 선생 마이크 잡다
5. 김재준 목사 마이크 잡다
6. 강원용 목사 마이크 잡다
7. 스코필드 박사 마이크 잡다
8. 서인주 도사 마이크 잡다
9. 이지 스톤 마이크 잡다
10. 땅 속 운동권 마이크 잡다
나는 일찍이 어른들의 발자취를 따라 충현서원을 맴돌았다. 서원을 개설하신 서기(徐起) 선사의 유지를 받들어 경학보다 선현들을 따라 배우기로(使我學聖賢) 마음먹었으나 점점 선학(禪學)으로 방향이 기울어지면서 명찰들을 찾아 헤매다 보니 자연 오랫동안 고암마을을 비우기도 했다. 늘 도학자들이 붐볐지만 서원에 들릴 때마다 뵙게 되는 세 살 위 최(재선) 도사의 안광은 너무나 형형해서 범접하기 어려웠으나, 그때마다 날 친동생처럼 대해줘 참 살갑게 느꼈었다.
한편으로 정역(正易)이요 또 달리 남학(南學)이요 하지만, 또 불도(佛道)요 유도(儒道)요 선도(仙道)요 하지만 현세를 말세다 크게 비관하면서도 선천 후천을 나누는 문왕력(文王曆) 복희력(伏羲曆)에 따라 태평성세를 모색하는 풍조가 대세였기에 사람은 다 귀천 없는 하느님의 자손(人乃天)이니 모두 하느님 모시듯 해야 한다(侍天主)는 대목에서 최 도사의 가르침은 나를 크게 울렸다. 연치는 5년 차가 안 났지만(肩隨之) 나는 완전히 큰 스승님으로 그 형님을 모셨다.
선생님이 구도 10여 년 만에 귀향길에 오르시면서 그 원대한 구도 여정(旅程)을 말씀하실 때 워낙 깊으신 말씀이라 잘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갑년 안에 큰바람이 일고 100년이 되어야 개벽이 올 것이다, 미완이면 다시 백 년을 기다려 후천개벽이 있을 것이니 세상 변화를 조급히 생각지 마라시었다. 내 도를 닦은 지 십 년 안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니 형편 닿으면 한 번 찾아오라시면서,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십 년이 을묘천서시며 또 그 더 5년은 상제 배알이셨다.
충현서원에 워낙 많은 도인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북적거리니 간간이 일어나는 이적이나 이변은 불원천리하고 귓전을 울려댔다. 걸승처럼 고행을 하면서도 늘 선생님 선사의 귀추에 귀를 열고 조금의 소식에도 긴장을 해왔다. 을묘천서(乙卯天書)는 선생님보다 세 살 위인 최양업 신부셨다고는 하나 알 길은 없었다. 매우 곤궁하게 지내시면서도 통도사에서 수개월씩 수행을 거듭하시고 통성기도까지 드리셨다니 하느님이 감동하신 건 아닐는지 짐작해볼 뿐이었다.
그러나 생각을 더 굴려보니 아니 그러면 유불선 모두와 서학까지를 어우르는 도통이란 말씀 아니시겠는가. 내 길이 갑자기 좁아지면서 광대무변한 선생님의 길이 훤히 내다보였다. 이젠 선생님을 뵈어야 한다,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선생님이 은적암으로 피신하셨단 얘기가 들렸다. 아니 이건 하느님의 축복 아니신가. 서둘러 남원 길을 재촉한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 것이니 꼭 필요한 말씀만 여쭙자며 입맛을 다셔본다.
나의 관심은 늘 국태민안이었다. 집집마다 원화소복을 바라지만 나라 바로 세우는 게 첩경이란 생각이었다. 나라의 동량들이 튼튼해야 할 터인데 권비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무슨 수를 써야 하나. 굿을 해야 하나, 천제를 지내야 하나, 얼마나 크고 높게, 고천문은 얼마나 길게, 또 대궐 기둥마다 부적을 붙여야 하나. 고관대작 묘비만 밟고도 천 리 한양에 다다를 수 있다니 무슨 수가 있겠는가. 민안이란 무엇인가. 빈부귀천이 상경(常經)이니 구구로 있으란 말인가.
수운 대신사께서는 많은 도인 가운데 얼른 알아보시고 혈육의 정으로 안으시니 주위가 모두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저만 이러실 수 없사오니 얼른 여쭙겠습니다. 저는 썩은 벼슬아치를 몰아내는 일이 급선무라 올립니다. 선사께서 잘 보았다 하시면서 일에는 순서가 있느니라. 곧 제 바람을 아시기에 ‘내 갑년에 오래 입고 있던 청옷을 벗으려 할끼고 다시 왜색에 휘말리다가 두 갑년에 되어야 큰 개벽이 있느니라. 이때를 놓치면 다시 100년을 기다려야 하느니’.
‘천지 운수는 때가 돼야 변하는 이치로 알고 늘 천주를 모시며 기미를 살펴야 하느니라. 지금 내가 도를 말한다고 모두 서두르니 큰 걱정이다, 때를 기다리며 힘써 도를 닦아야 한다. 도 닦지 않고 덤비면 하느님이 외면하시느니라. 도를 닦아야 하느님께 말씀을 드리고 받자올 수 있느니라. 물극즉변(物極則變)이라. 지금은 정세개벽(靖世開闢)의 시대라 근신우근신이다’. 큰절 올리고 물러서니 수십 명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어 퍽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선사 신사의 안광이 전 같지 않으시며 인당의 주황색은 어딘가 흐려오고 계심에 마음은 계속 언짢았다 상제를 배알하셨는데 어인 일인가. 필경 사람이 구름인 것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울분이 온 백성을 휘감아 돈 때문 아니셨을까. 반부사삼불입(班富士三不入)으로 보았는데 이라도 백성의 원한이 충천하고 있었던가. 이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대신사의 신상이 적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극기복레(克己復禮)라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서둘러 내포로 돌아왔다. 바닷물이 조석으로 열 길 넘게 출렁이며 아산만으로 흘러들어와 있는 땅. 예부터 천문지리 풍수들이 모여들어 달의 영휴(盈虧) 삭망(朔望)에 따른 천기의 흐름을 주시하고 있었다. 멀리 지리산 북쪽을 타고 내리는 물이 운장·마이·덕유·대둔산과 합쳐 소백산 대청호에 이르고는 다시 정렬을 가다듬어 황해로 유유히 흐르는데 뜻밖에 계룡산·칠갑산에 가려 남향 길로 접어들고는 기어코 익산에 이르러 지리산 물을 다시 만나니 얼마나 희한한가.
또 서둘러 향을 사르고 글을 올렸다. 선사께서 말씀 주신대로 때를 기다리실 줄 믿으면서도 주위가 하도 달궈지니 혹시 순절을 각오하시질 않나 조바심이 들었다. 얼마 안 있어 제자들에게 근신통문을 보내셨단 소식을 들으니 다소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어인 일인가. 지방마다 접주를 정하시다니. 다시 성지 용담으로 복귀하시다니. 하기야 왕실은 무후가 반복되어 사양길로 접어들고 홍경래 이후에도 계속 반복되는 민란이니 도탄 민중은 어디에 기댈꼬였다.
답답한 마음으로 아산만의 수문장 솔개바위 뒤로 들어찬 고샅골 그 한 가운데 서당을 열어 후학을 가르치고 있는 서행(徐行)을 찾는다. 이미 이운규·김항·김광하 제학들을 섭렵하고 그 모두가 권을 추구하나 본래 뜻대로 저울대 역할을 못 하게끔 귀신이 농간을 부려 권귀가 되고 연이어 권비·관비들이 판을 치며 재물과 분대(粉黛)를 탐하니 차라리 선비들이 과거 대신 농사와 약초를 재배하며 백성의 길흉을 가려줌만 못하다면서 그 터를 닦고 있다.
서당에 들릴 때마다 부쩍 자라 어른 같은 학동 이민수. 늘 할아버지같이 달려와 지낸 얘길 소근거린다. 아니 내가 여러 번 이인이라고 추켜올린 최재선 선사가 참형 당했다는 것 아닌가. 더 놀란 것은 어느새 동학이 예까지 들이찼단 말인가. 너무 덤벼드는 제자들이 두렵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자진(自盡)하신 것 아닌가. 변화란 때가 있는데 선사도 그리 말씀하셨는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약초를 심으시고 길흉을 따져주시며 억울한 백성의 소두(疏頭)가 되시길 바랐는데.
나는 학동들에게 근신우근신을 당부한다. 권력에 섣불리 칼을 들이대면 곧 개죽음이 된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인데 그건 어리석음이다. 하늘이 알아주신다고 대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다. 차라리 힘을 합쳐 권비·관비를 물리칠 계략을 세워야 한다. 적게 상하고 상대를 많이 넘어뜨려야 하느님의 상을 탈 수 있다. 옳은 일이라고 덤벼들어 목숨을 바친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적들을 혼비백산시키기 위해 결사 항전하는 경우 말고는 극히 삼갈 일이다.
다시 초당으로 돌아온 나는 향을 사르고 수우선사님의 명복을 빌었다. 귀신에게 홀렸다가 영험한 부적과 주문을 받으셨다니 댐새 고달픈 백성들의 귀를 파고들기 십상이었다. 서학과 달리성급히 조선의 하느님이라시니 조선이 오래 믿어온 신령님이셨다. 하지만 같은 부적 주문으로 여러 다른 사람의 여러 다른 근심을 울림은 여러 다른 사람이 한군데로 몰려 힘을 쓰게 될 공산을 높임이니 잘못 난이 되기 십상 아니겠나. 이 난을 어찌 바로잡으실란가. 선사님.
나는 곧 많이 널브러질 주검을 넘어 펼쳐질 개벽에 관심이 쏠려옴을 참을 수 없었다. 20년 뒤 갑신에 청옷을 벗으려다 도리어 왜놈의 옷을 입게 되고 10년이 못 되어 백성이 들고일어나니 동학교도들이 때를 만난 듯 뒤엉켜 왜놈들을 물리치려 나섰다. 나는 이 살풍경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감는다. 아쉬운 것은 아직도 소중화요 그 의병이요 그 민보군이요하며 동학을 탄압하는 꼴은 참기 어렵다. 하지만 어쩌랴. 이제 모든 후사를 제자들에게 맡길 수밖에.
고샅골 서행은 오랜만에 서가거사(居士) 후 200년간 아산만 느지를 맴돌다 명멸한 많은 향사를 떠올린다. 과거나 관도의 유혹을 물리치고 백성들의 삶과 밀착하여 고락을 함께한 선학들의 삶은 퍽 고달팠지만, 도를 행한다며 사특을 주저하지 않은 입신양명보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당당한가. 저들이 아직도 가문을 빛낸 선조로 숭앙 되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며 몸 바쳐 다스린 나라 꼴이 오늘의 민란이라니. 어인 일인가.
서행은 침통한 표정으로 사당 앞에 엎드린다. 앞으로 피가 피를 부를 터이나 어찌하오리까. 예부터 귀신(天)을 받드는(亨之) 게 덕치의 근본(敎之至)이라 했지만, 실제로 권력(王)의 만세 융창을 바라는 장치로만 작동되었을 뿐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작태가 허다했다. 오늘 그 권력이 또 왜놈들과 작당하여 백성들을 개 패듯 하고 있으니 안타깝고 한스러울 뿐이다. 선대부터 내려오는 가르침을 따라 물을 건널 것인가. 원래 조상 대대로 자리 잡은 소머리 산은 물 건너 쌍부와 한통속이었지만 언젠가 아산만이 터져나갈 때 갈라섰기에 그간은 마음의 고향이었다.
거기엔 길지라는 소름(울음)재가 있고, 원(뚝)을 막아 생긴 쉬(開墾)논이 많아 약초 재배에 매우 편리했다. 고샅골은 동학으로 인하여 점점 흉흉했다. 서행은 고심 끝에 바다를 건넌다. 솔(소름)재 밑에 글방을 여니 과연 오래전부터 도사들이 의견을 모은 대로 우명성이 낭자했다(牛鳴聲狼藉). 서행은 조용히 향을 사르고 축을 읽었다. 역술 대가 원천강이나 서지평은 시대에 맞게 변형되어야 한다. 서행은 서인주 도사의 개벽 예감을 더듬기 위해 사당을 지어 모시기로 한다.
서 도사가 그리도 아끼시던 이민수 군도 어느새 입지의 나이에 들어 동학의 주요 지도자로 우뚝 솟고, 수운의 총기포령이 내려진 뒤에도 백성들의 덧없는 죽음을 막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쏟고 있다. 기별이 닿는 대로 도사의 가르침에 한 치의 벗어남이 없도록 신칙하길 거듭할 뿐이다. 다만 도사의 예언을 알아차리기엔 아직 천명관인 서행은 시간 나는 대로 도사의 사당에 꿇어앉아 100년 개벽과 또 다른 100년 개벽을 예감하고자 간절한 소망을 태운다.
서행이 그간 도사의 개벽을 받잡건대 갑년에 일본에 업힌 이래로 또 갑년에 이르러 왜놈들이 물러갈 거로 보시는 듯했고, 이때 정말 유사 이래의 큰 개벽이 일 듯하지만 온전치 못하면 다시 100년을 기다려야 후천개벽이 완성된다는 말씀으로 들렸다. 서행 또한 갑년을 넘기니 이를 정리해서 아들 익(翼)에게 넘긴다. 이후 계속 개혁 개혁하다가 일본이 망해 들어간 자리에 또 큰 개혁이 오는데, 온전치 못해 다시 100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익은 풀이 했다.
해방까지는 대충 맞아 들어갔는데 그 후 100년을 어떻게 갈무리할 것인가 서익은 선사의 사당을 지켜본다. 미·소의 냉전 틈바귀에서 전쟁을 치렀고, 나라의 단전(丹田) 사타구니에 외군이 주둔하니 나라 꼴이 아니다. 임오 이래 청·왜 60여 년. 다시 이번 주둔은 100년 가야 풀린다니 2045 아닌가. 미군이 우리 뜻대로 물러가질 않을 터이니 내외 압력 아니겠는가. 그 주둔 자리가 걷어내기 힘들 것이니 4반세기는 걸릴 것이다. 2020부터 준비해도 족하지 않다. 익의 풀이다.
미리미리 불안을 느낀 일부 부유층들의 재산 도피가 제일 문제다. 남미의 재산가들이 미국 은행으로 도피하기 때문에 늘 시끌거린다. 병행해서 북한과의 우의를 높여야 한다. 한국의 불안감을 낮추는 방법이지만 오히려 키울 수도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 복지를 확충해서 저소득층을 감싸 안고 부유층의 아량을 유도해야 한다. 북한과의 평화적 교류가 결국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첩경임을 인식시켜야 한다. 오랜 단일민족의 문화적 기반을 살려 공감대를 넓혀야 한다.
익은 회심의 미소를 띠고 아들 승(昇)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미 불혹의 나이를 넘은 승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아버지가 겨우 삼칠일이 지난 손주의 이름을 지어주시면서 치세의 능신이 될 만하다 하셨기에 늘 귀를 기울이는 편이었다. 그러나 커가면서 애비의 비결이나 도첨(圖讖)적 경향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있어 쉽게 호응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이번만은 몇 번을 곱씹어도 대세란 생각에서 슬쩍 떠본 것이었으나 승은 아예 귀담지 않는 눈치였다.
2045년에 미군이 철수한다는 예감은 다른 100년에 후천개벽이 있을 거란 오래 탐색의 총화였다. 하나 관비들이 판을 치는 관도의 유혹을 물리치고 약초를 재배하며 백성들의 길흉을 가려주고, 때로는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소두(疏頭)로 나서길 주저하지 않는 선비의 삶이 그간 어렵게 지켜온 집안 내력이어서 아들은 한방의업으로 터를 잡고 민족의 수호신 하느님을 정성껏 모시기 위한 제축문 다듬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덤덤하고 말았다.
승은 열 살을 넘긴 나이에 사서삼경을 섭렵하고 이어 내려오는 가풍에 따라 천상(天常)을 연구했다. 늘 우리 곁을 지켜주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언제나 천문지리의 출발점에 서 계셨다. 승은 예서 좌표를 잡아가며 새로운 역학과 명리학에 빠져들었었다. 여러 날 여러 해에 걸쳐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와 제문을 유신했다. 제는 소제와 대제였다. 소제는 징 하나로 열고 하늘에 닿을 만한 함성으로 축을 마감하되 절절한 푸닥거리와 굿도 쉽게 곁들이기로 했다.
문제는 소(疏)였다. 소두는 때때로 목숨까지 각오해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을 끌어들여 세를 과시함은 권귀의 놀잇감이 되기에 십상이다. 때때로 만인소란 게 그랬다. 그래서 간절한 소는 천상에 올려야 한다. 시 3백이 거의 다 소라 했지만, 왜 그 성현들의 발분(發憤)이 시객들의 자미(刺美)를 돋우었을 뿐 3천 년 동안 공허하게 공전하고 말았는가를 따져봐야 한다. 그래서 대제다. 천상을 소로 감동드려야 한다. 지성감천이 바로 그 뜻 아니겠는가.
또한 서경의 시일갈상(是日曷喪)이나 시경의 불소찬(不素餐)은 아직도 폭군을 질타하고 있지만 왜 조신들은 끄떡도 안 하는가. 나라란 권(權)이요, 권은 원래 형평을 잡아주는 저울대다.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고(仁) 백성들이 서로 사랑(禮)하게 하는 지침이다. 그렇지 못하면 군자가 먹는 녹은 소찬(공밥)이 된다. 그래도 모든 군자가 녹을 먹으려 걸걸한다. 권에 귀신이 붙어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귀신이 아니면 어찌 벼슬이 돈이 되겠는가.
군자들이 그 많은 세월 인의예지를 인성지강(人性之綱)이라 외쳤는데, 권귀를 내쫓는 일을 외면한 것은 그들이 너나없이 부귀영화를 누리려 했기 때문이다. 권귀는 나아가 백성에게도 붙기를 좋아한다. 왕후장상을 꿈꾸는 자들이 현혹되어 역모에 가담한다. 민란이다. 최근만 해도 이인좌요 홍경래요 또 임오·갑신에도 얼마나 많은 개죽음이 있었는가. 동학 봉기라 해서 얼마나 다르겠는가. 사람이 귀신에 들면 때로 죽음을 감수하려는 유혹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독립운동은 어떤가. 승이 채 열 살이 안 되었을 때 이웃 두렁바위에서 큰 학살이 있었다. 어른들이 쉬쉬해서 자세히는 몰랐으나 커가면서 보니 그전에 이미 고향 쌍부에 동학 전교실이 여덟이요 교구장 전교사 등 간부들이 많았고, 성미(誠米) 납부에 8도 1위를 다투는가 하면 특별성미로 세전지답을 팔아 바치는 도인도 많았다고 한다. 일인들 개간사업에 몸을 숨긴 의병들이 운동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고 하니 멋도 모르고 당한 살상은 또 얼마이겠는가.
하느님이 보시게 딱하지만 스스로 헤어나길 바라신다. 그 길을 어찌 찾을 것인가. 감천할 만큼 큰 제사를 올리면 그 정성을 가납하신다. 승은 그리하여 권귀를 몰아내기 위한 제단법과 제문·축문 그리고 소문을 다듬기 시작한다. 그러나 서학을 업고 들어온 양귀가 판을 치고 일본도 양귀에 업혀 춤을 추니 이젠 양귀를 바로 알지 않고는 어떠한 제법도 제문도 효험을 거두지 못할 것 같다. 승은 스물이 다 되어 보통학교에 들어간다. 서양을 배워야 한다.
귀신을 쫓는 데는 누대로 내려오는 찰색(察色)에 더하여 찰신(察身)에도 능해야 한다. 양귀는 몸 자체도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랐다. 군함이요 박래품이요 다 양귀들의 소행인데, 그들 내심에 있는 서학도 하느님의 가르침으로 보기엔 가당치가 않았다. 하느님이 병장기를 만들어 약자를 도륙 내라 하실 리는 없지 않은가. 이를 담고 있는 양인들의 골격에서 귀신들을 몰아내야 한다. 승은 이들을 만나야 했다. 보통학교를 나온 승은 인천·서울·평양으로 뛰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평양은 온통 민족주의였다. 들리느니 독립군이요 임정이었다. 만보산사건이 터져 화교 상점은 쑥밭이 되었다, 일본의 이간질은 참으로 무서웠다. 또 다른 음모를 꾸며 만주 전역으로 지배권을 확대한다. 내전에 빠진 중국이라 독립군은 어디를 짚어도 허정이었다. 항일운동은 승산보다 명분이라 하지만, 이 판국에 백성에게 또 다른 희망을 주는 일은 정녕 없는 것일까. 독립군이 절망 끝에 찾아낸 보물이 무정부주의였다. 백성 보듬는 어머니 정부였다.
권귀를 몰아낼 부적을 찾은 듯 한없는 기쁨이 몰려왔다. 이 부적만 있으면 양귀를 문제 삼으랴. 고향에 있는 솔제가 떠올랐다. 소 울음은 어밀 찾고 부르는 소리니, 어미 같은 나라를 뭉쳐낼 산실 아닌가. 승은 격양가를 부르는 백성을 꿈꾸며 귀향을 서둘렀다. 특히 무정부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억압적 권력을 백성의 것으로 들릴 수 있는 기막힌 타산(打算) 아닌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게서 이 작업을 끝내야 한다. 책을 한아름 사지고 양양이 돌아온다.
어느새 독립운동가들이 무정부 운동을 이끌고 있음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무정부란 왕도정치요 지덕요도(至德要道)로 대동세상(無權國家)을 이루자는 것 아닌가. 서화담의 주기론도 백성들이 제 살길을 잘 알기 때문에 그 기(氣)가 잘 뻗어나가도록 길(理)을 내주는 게 권(權)이 할 일이라 했지 않은가. 허나 요순 이래 4천 년, 공자 이래 2천5백 년, 그 후에도 여러 성왕의 꿈이었으나 치세(治世)는 그리 길지 못했다. 권귀는 쉽게 물러가지 않는다.
서양에서는 공화당이, 노국에서 공산당이, 일본에서는 군국당이 무정부주의를 탄압 처형했다. 옳은 일은 항상 어렵게 마련이다. 백성인들 쉽겠는가. 이러(日語)해서 못사는데 영학(英學)해서 살랴, 너 알어(俄羅斯)해라 하니 어쩔까 했는데 아관파천(俄館播遷) 1년 만에 친일파 친러파가 작살나니 유식하다는 백성들은 더 몸 둘 바를 몰랐다. 이어진 대한제국은 이준 열사로 을사조약, 안중근 의사로 경술합방. 황제를 비롯해 전국적인 이등박문 애도 물결이 있었음에도.
또 일제하에서도 수재들은 한결같이 고관 되길 희망했다. 마침내 그 극악한 권귀는 세계를 집어삼킨다. 제국주의였다. 아프리카 침략에서 1천만, 신대륙개발 5천만, 1차대전 2천만, 2차대전 3천만. 그러니 인류의 살길은 반제밖에 없다. 조선이 그 앞장을 서야 한다. 왜 조선인가. 우리가 어찌 그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단 말인가. 7천 년간 농사만 지은 나라는 없다는 게 그 답이다. 중국은 2천 년간 살던 양자강 늪지대가 사라지자 우릴 쳐다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중국은 그 많은 고천제에서 왕권의 번영을 빌었지만, 조선은 영고와 무천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권력은 한가위에 길쌈모리를 했지만, 백성은 망월제에서 풍년과 소망을 빌었다. 국가가 종묘사직을 위해 단을 쌓고 묘당을 치장하지만, 백성들의 가슴마다에는 하느님이 더 계셨다. 이제 제문을 가다듬고 많은 제객들이 모여 같은 말로 7천 년의 정성을 쏟으면 하느님이 어이 굽어보지 않으시겠는가. 보시기에 한 줌 친일 세력은 미상불 물거품으로 사라지리라.
설령 일제가 패망하지 않았다 해도 우린 우리대로 의연히 남아있을 것이었다. 우린 우리말을 지켰고 부모님을 공경했다. 조상님께 제를 올리고 이웃의 어려움을 위로했다. 가족들의 순혈을 지켰고 양보를 미덕으로 삼았다. 버리지 못한 것은 오직 권귀였다. 일제의 앞잡이라도 좋았고 그를 위해 동족을 능멸하길 마다하지 않았다. 미소가 들어오니 친미·친소로 갈려 한자리하기 바쁘다. 급기야 분단이니 그대로는 조선은 없다. 대동제를 지내려도 제꾼들이 뿔뿔이다.
어찌해서라도 제꾼을 모아야 한다. 물신까지 엉겨 붙으니 하느님의 심부름은 더 감감해진다. 그럴수록 제단·제문을 장려하게 다듬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젠 대제를 설교 제사로 지내야 한다. 제사 전에 많은 설교문을 내어 제객들의 심금을 울려야 한다. 조용한 숫자가 많아야 한다. 시끄러우면 또 살귀가 날뛴다. 승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느님께 고한다. 하느님의 비답은 늘 한결같으시다. 쉽게 목숨을 버리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감옥도 멀리해야 한다.
그간의 흘린 피가 너무 많았다. 독립군이 흘린 그 많은 피는 무슨 희망을 보았는가. 애국 교도들의 순교로 봐야 한다. 민주화 반독재투쟁은 어쨌나. 이 또한 신념의 순교였다. 순교는 하느님과의 대화다. 이제는 하느님이 상을 차려 놓으셨다. 그러나 외세는 절대 그냥 나가지는 않는다. 이것저것 많이 챙겨간다. 우리도 챙기려면 뭔가는 버텨야 한다. 또 권귀도 원귀들의 넋두리가 들끓어야 물러간다. 그래서 이젠 작두춤이다. 위협이면서 압력이어야 한다.
그러니 결(訣)이나 참(讖)을 기다려서 될 일은 아니다. 아버님도 늘 같은 마음이셨는데 희수를 넘기시니 생각이 많으신 듯하다. 하느님이 잘 굽어살피시도록 제문과 제례를 다듬어 형통시켜야 곧 많은 의인이 몰려들 것이라시며 늘 절절히 하늘을 감동시키려 노심초사하셨는데. 특히 일한 만큼 벌어 재산을 모았다면 누가 뭐래겠는가. 그러니 이 엄청난 빈부 차이를 어떻게 가를 것인가 난제 중의 난제인데 이를 풀 묘수가 쉽지 않으니 제문에 뭐라 여쭈어야 할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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