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난감하기 짝이 없는 글을 의뢰받은 것이 작년이었다. 작년, 2020년 늦가을 김선출 선배(76학번, 창립멤버)께 전화가 왔고 ‘네가 동아리 문을 닫았으니 마지막을 써야 되지 않겠냐’ 는 말씀이었다. 그렇지, 내가 동아리 문을 닫았지. 허허.
동아리연합회에 등록된 명칭은 민속문화연구회였고, 우리는 탈패나 탈반이라 불렀던 나와 선배들과 후배들의 동아리는 2004년 12월 31일 해단했다. 나의 활동기간은 1997년부터 2004년까지이고, 1999년부터 2001년까지 군대 시절을 제외하면 6년 가까이 되는 시간이었다. 탈패의 해단도 내가 졸업을 앞두고 급하게 춘천을 올라가야 되는 상황 때문이었다. 나는 2005년 1월 3일이 첫 출근이었다. 비어진 동아리방을 아무도 올라오지 않는 대강당 2층을 내버려두고 졸업해 버릴 수 없었다.
그 많은 동아리 물품 중에 선배들이 했던 마당극 공연 팜플렛과 대본집, 사진앨범, 총회 자료집과 신입회원 방명록, 아나(탈패에서는 회원들을 아나라 불렀다. 그런데 아나가 무슨 말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아나사랑! 탈패사랑!)들이 서로의 고민을 응원하며 써준 노트들을 중심으로 챙겼다. 큰 라면박스로 4박스 분량이었다. 80년대 자료들은 전경들의 잦은 학내 침탈로 자체적으로 소각시킨지 오래라는 말을 들었다. 칼빈 목총(주로 오월마당극)과 강령탈춤과 고성오광대, 사자탈처럼 부피가 큰 공연 소품은 남겨둘 수 밖에 없었다.
선후배들한테 따로 동아리를 닫네 마네 할 겨를도 없이 나 혼자 판단하고 결정한 것이었지만, 탈패의 존속이 무의미해지고 있음은 오래전부터 공감하던 바였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탈패에는 03학번과 04학번이 없었다. 02학번과 01학번들도 모두 고학년이었고 공무원 시험이든 토익이든 취업이 목을 죄고 있었다. 학교에 남아 있는 나같은 90년대 학번들까지 긁어 모아도 10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탈춤이든 마당극이든 자체 공연은 커녕 연습도 제대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004년 12월 31일 송년회를 빙자해 90년대부터 2000년대 학번까지 광주에 있는 아나들을 불렀고, 장소는 윤수안(95학번) 선배가 풍물로 마을운동을 하던 광산구 들판의 비닐하우스였다. 마침 폭설이 내렸고 여기저기서 아나들이 모두 모여든 시간은 대략 자정이 다되어서였다. 다들 폭설만큼 폭음을 했고 새벽까지 풍물을 치고 춤을 추고 극락강변에 서서 일출을 보고 헤어졌다. 93학번부터 02학번까지 대략 열 댓명의 뒷모습이 탈패의 마지막 풍경이었다.
나는 그 날 아직도 기억에 남은 말이 윤수안 선배가 “선배들이 70년대 탈춤을 추고 동아리를 만든 이유가 시대의 요청이었듯이 다시 탈춤이 필요한 시대가 오면 누군가는 탈춤을 출 것이다”는 비장감 가득한 선언이었다. 물론 아직 탈춤을 추는 사람들은 없지만 그 만큼 세상이 좋아진 탓일까 싶기도 하고, 또, 여러 생활전선에 있는 아나들을 보며 탈패에서 체화한 문화운동을 각자의 방식으로 하고 있구나는 생각에 내 뒷날이 돌아봐진다.
글을 쓰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차일피일 미루다 해까지 넘어간 상황에서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게 며칠 전 <우리는 매일매일>(강유가람, 2019)이란 영화때문이었다. 또, 작년에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창비, 2019)을 읽은 탓도 있다. 90년대 학생운동과 여성운동이 작품의 전경과 후경을 오가는 두 편의 작품을 보고 읽는 동안 나의 90년대가 엎치락뒷치락 했다. 그 곳의 여성들과 달리 나의 90년대는 고통보다는 기쁨이 더 컸고 말 할 수 없는 상처는 가부장적 문화라기 보다 우울한 나의 천성때문이었지만, 나는 작품에 그려진 90년대가 가리키는 여러 기호들이 좋았다. 풍물패, 농활, 연세대사태, 민중가요, 페미니즘 문화제(성정치학), 거리행동(퍼포먼스에 가까운) 등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사랑하고 투쟁하자는 90년대 폭발적인 에너지들이 좋았다. 이제는 모두 사그라 들어 버렸고, 어느 세대에게도 딱히 인정도 관심도 받지 못하는 90년대 스무살을 맞이한 사람들의 혼란스러움이 좋았다. 좋았다라고 하면 문화적 전유와 착취밖에 안되니 다른 말을 써야 하지만 내가 해명할 수 있는 단어의 품이 많지 않다. 공부와 삶을 게을리해서이다.
다만, 90년대는 80년대 전투적 학생운동 선배들의 전설과 2000년대 제도화 되어 가는 후배들의 현실 사이에 낀 어찌보면 해방구 같은 시간이 아니었을까. 위계적인 군대문화가 지배하던 대학에서 해방구라는 표현이 맞지 않지만, 기존의 관습적인 사고방식에 문제제기를 하고 교조적 학습보다는 내 몸의 억압에 맞서고 당당히 욕망을 분출하려고 했던 그래서 걸리적 거리는 것들은 모조리 발본색원해 뿌리끝까지 싹 다 불질러 버리고 싶었던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들의 총화로써 해방구 말이다. 그 해방구의 감각 역시 나와 동시대를 보냈던 누군가는 다르게 감각할 것이고 나의 감각이 다른 이의 생채기를 건드는 것은 아닐까 두렵지만 말이다. 꼴에 욕심에 사십대가 된 꼰대아재의 마냥 추억팔이가 안되기까질 바라고 있으니, 나의 이십대를 지배한 탈패에 대해 써야 된다는 이 계면쩍은 글 앞에서 노파심과 자기검열이 계속된다. (글이 잘 쓰여지지 않는 이유이고 끝까지 제 집을 찾아 들어가지 못할 예감이다.)
고등학교때 학교 밖에서 씨네마떼크 활동(불법 빽판 비디오로 운영되던)을 하며 장선우 감독의 <열려진 영화를 위하여>를 읽었다. 신명, 카메라, 말뚝이, 열린영화와 같은 개념들이 이해 닿을 수 없는 나이였지만 만약 대학을 간다면 탈춤반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선우 감독이 대학때 탈춤과 마당극 동아리를 했다고 들었고 전통과 현대, 서구것과 우리것, 기계장치와 몸짓을 어떻게 결합시킬 수 있었는지가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또, 어차피 연극영화과는 갈 수 없었고 이미 그때 내가 감독이 될 수 없음도 감지했던 때였다. 1997년 5월 연극반으로 오라는 선배-씨네마떼크에서 만난-의 권유를 뿌리치고 탈춤반을 찾아 2층으로 올라갔다.
첫날부터 강령탈춤 기본무를 배웠다. 우리가 신명마당이라 불렀던 대강당 앞 잔디밭에서. 그때 군대도 미루고 춤을 가르쳐주고 동아리를 지킨 선배들은 95학번들이었는데, 96년 연세대 사태를 겪고 나서 탈패는 탈춤과 풍물, 소리와 같은 기량이 중심이어야 한다. 정치투쟁은 그 다음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탈패가 탈춤도 제대로 못추면서 정치투쟁에만 매몰될수록 동아리를 유지하는 구심력과 원심력은 소멸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민족전대의 자랑 동아리’연합회의 회장과 문예분과장이 우리 탈패 선배였음에도 선배들은 끝없이 정치투쟁과 기량강화 사이에서 고민하고 토론하고 치고 받았다. 모두 다 한때는 같은 선에 있었던 선배들이 동아리 노선을 달리하는 와중에도 나와 같은 후배들은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선배들도 그때 뿐이었지, 뭔 진짜 못난 놈들끼린 얼굴만 봐도 오지다는 것 마냥 술 한 잔 먹으면 금세 젓가락 뚜들기고 춤추고 노래 부르고 온갖 마바리같은 짓거리 함시롱 놀았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97년 총학생회 선거에서 NL과 연대 사태 이후 NL에서 이탈한 반NL, 그리고 몇 년만의 PD연합(전남대에선 좌파로 불렸던)의 선거로 학내가 요동을 쳤다. ‘패’ 자가 들어간 문예동아리들은 당연 NL이었지만 탈패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연대 사태 이후 조직적 정치활동 중단을 공식화 한 선배들 덕분에 탈패는 세 개의 파가 모여 선거운동을 하는 다른 조직에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연출됐다. 나는 씨네마떼크에서 만난 선배들이 PD쪽이라 탈패 들어오기 전부터 학습을 받으며 자연스레 PD연합에서 선거활동을 했고, 막 제대한 예비역들과 연대를 다녀온 선배들-연대사태로 감옥을 다녀온 선배들도-은 NL과 반NL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때가 좋았다. 다른 문예동아리나 학생회에서는 NL과 반NL로 나눠지며, 그렇게 죽고 못살았던 선후배도 동기들도 변절자네 끄나풀이네 죽일 놈 살릴 놈 하며 선전활동마다 득달처럼 쳐죽일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였지만, 탈패는 그렇지 않았다. 선거 후 휴유증으로 동아리들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90년대 세대들은 모두가 말하는 학생운동의 끝물을 나도 제대로 목격했다. 정치투쟁이든 기량강화든 탈패는 기본적으로 문화고 예술이고 문화운동을 지향한다는데서 서로의 색깔로 갈라치기를 하지 않았다. 학습이고 문건이고 노선이고 뭐시고간에 전수관 가고 농활가서 하루 열두 시간 이상씩 몸으로 부대낀 사람들이 분유한 강한 정서적 연대를 그깟 말놀음에 불과한 정치 따위가 깨트릴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탈패에서 배운 가장 큰 정치였다. 무엇보다 깊은 문화의 힘이었다.
당시 전남대는 여름은 강령탈춤, 겨울은 고성오광대 전수를 갔다. 96년까지만 해도 풍물 전수를 영광 우도굿으로 갔었는데 아나들의 숫자도 무엇보다 경제적 자원도 부족했다. 당시 전남대 풍물패는 임실 필봉굿이 장악했고 농악반은 화순 한천굿을 쳤다고 한다. 사실 나는 풍물을 잘 몰라 아직도 그 가락들의 차이점을 모른다. 다만 70년대 이후 광주 풍물굿의 연희사를 정리하려는 선배한테 귀동냥으로 들은 사실이다.
회비도 없는 아나들의 경제적 자원은 졸업한 선배들의 후원금, 개업식과 회갑연 돌잔치 등에서 불러주는 수익사업 등이 대부분이었고, 94학번 선배들은 지역 막걸리 라디오CF까지도 했었다고 한다. 3월 단대나 과학생회 출범식 같은 무당을 모시는(나의 동기 김윤미가 주로 무당을 했고, 기수마다 전설적인 무당들의 계보가 있었다) 고사에는 수익보다는 연대의 의지-혹시나 신입생하는-로 갔고 막걸리만 진탕 얻어 먹고 오는 것이 다반사였다. 졸업하고 안 일이지만 선배들이 주말이나 방학에 노가대를 참 많이 했다고 한다. 내리사랑이라며 왜 그렇게 사주고 왜 그렇게 얻어 먹었을까...
전술했듯 탈춤 전수는 인원이 부족해 다른 대학 탈춤반들과 연합해서 다녀오고, 후엔 각 학교를 돌아다니며 합동공연을 했다. 한 명이라도 신입생들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당시 탈춤반들의 지상 최대의 과제였다. 내 기수에서 끊기면 안된다, 문을 닫을 수 없다가 당시 모든 탈춤반들을 지배하는 정서였다. 그래서 신입생들이 들어오면 한 번이라도 술 건수를 더 만들려고 놀러가고 춤 배틀도 하고, 공연하면 악사로도 부르고 교류들이 많았다. 서로 품앗이 팔아주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조선대 비나리, 광주교육대 아리랑 사위, 광주대 불림. 기독교간호전문대, 목포대 마파람, 목포해양대 등과 오고 갔었고, 조선대와는 전주에 있는 강령 전수관으로 교육대와는 고성 전수를 2년이나 함께 갔다. 1999년 9월에는 전주에서 광주로 둥지를 튼 정재일 사부의 강령탈춤 전승회와 함께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대 탈춤반이 모여 합동공연을 해야 할 정도로 동아리 구성원들이 부족했다.
다들 동의하겠지만 탈패 생활에서 꽃은 전수였다. 제일 재밌었고 기량이 가장 뿜뿜하게 올라가는 기간이라 모두가 집중하는 가장 큰 사업이기도 했다. 일주일동안 다른 대학 탈춤반들과 함께 밥 해먹고 춤 배우고 노래 부르고 술먹고 그러다 실려가던 시간은 언제나 학내에서 외로웠던 아나들도 자긍심을 갖는 시간이기도 했다. 고성오광대에서 나는 문둥이를 배웠고- 대사가 없고 딱히 춤이랄 것이 없는 비비는 덩치가 크다고 이 대학 저 대학 많이 불러다녔다. 때론 제밀주·할미과장의 산파 봉사역도- 강령에서는 영감이었다.
선배들이 늘 말하던 허종복 사부님은 나 때는 돌아가셔 뵈질 못했고, 허종원, 전광열 사부님께 문둥이를 배웠다. 이윤석 회장님께 고성 기본무인 덧뵈기를 배웠다. 사실 이윤석 회장님 말고는 방금 홈페이지를 찾아본 것이었다. 공식 프로그램은 하루 7~8시간이었지만 학교마다 맡은 배역마다 경쟁심리가 발동해 사부들이 그만 좀 들어가 자라고 해도 새벽 1-2시까지 춤을 추었다. 그리고 바로 술 판, 학교 구분은 사라지고 문둥파 말뚝이파 할미파들간 술 배틀과 동아리마다 내려오는 노는 문화-거의 기행 수준의-를 공유하다 날을 새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잠깐 눈 붙이고 바로 일어나 밥 해먹고 춤 시간에 들어갔다. 토요일 각 대학마다 전 과장을 올리는 공연이 끝난 후에는 바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도 되는데, 아니올씨다. 일주일간 춤 정 술 정이 들을대로 들어 모두들 다음날까지 술을 먹다 먹다 토하면서 헤어졌다. 지금까지 내 최장 음주 시간도 1998년 겨울 고성에서 토요일 오후부터 다음날, 그리고 광주 오는 버스에서, 광주 도착하니 고생했다고 술 사주러 마중나온 선배들 자리까지 2박 내내 술만 먹은 기억이 있다.
마당극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1998년 5월 마당극이 탈패의 마지막 마당극이었다. 농활가서 사자탈 뒤집어 쓰고 농가부채 해결이나 농활대원들과 마을어르신들 화합을 위한 소극들은 이후에도 했지만 마당극으로써 골격을 유지하려 애썼던 작품은 1998년 <오!일팔 18> 이었다. 18은 욕이다. IMF가 터진 직후라 5·18과 민중생존권 문제를 결합한 작품이었는데 당연 대본은 선후배 위계 없이 공동창작이었다. 물론 연출은 김정희 선배(94학번)였고 악은 김기원(93학번) 선배였다. 공연 촬영을 맡겼던 김인철 선배(94학번)는 테잎을 잃어버렸다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해 한동안 우리들의 안주거리 대상이었다.
5·18과 IMF에 대한 세미나를 시작으로 마당극 대본 읽기와 쓰기, 그리고 비디오로 남아 있는 선배들의 공연물을 보는데만 몇 달이었다. 연습이 시작되면 졸업한 선배들의 호주머니를 터는 보급투쟁이 진행되었다. 돌아가며 밥조가 짜졌고 밥조의 기량에 따라 연습의 성패가 달라졌다. 공연 과장 중 당시 가장 치열했던 노동유연화와 구조조정에 맞서 ‘민중생존권 보장과 재벌해체’를 뒤집어 ‘노동자 해고와 노조 해체 보장하고 재벌생존권도 보장하라’는 재벌들이 시위을 하는 과장이 호응이 좋았던 기억이 있다. 신상호 선배(93학번)와 최지영 선배(94학번)의 노련함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에는 광주문화운동 20주년 기념 행사를 전남대뿐 아니라 광주전남 탈춤반들과는 뗄 수 없는 놀이패 신명 선배들과 준비하며 일종의 마당극 갈라쇼 <오늘이 오늘이소서>를 신명마당에서 공연으로 올렸다. <돼지풀이>(1980), <안담살이 이야기>(1982), <당제>(1985), <일어서는 사람들>(1987) 까지 전라도 마당굿의 주요 작품의 주요 장면만을 엮어 만든 20주년 기념공연이었다. 우리들이야 군무 출연이 전부였으나 연습기간 내내 공연에 활용되는 모든 춤과 소리,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진도 쌍북춤을 배웠다. ‘구다다가 아니라 다다구’라고 하는 연출을 맡은 박강의 선배(84학번)의 소리가 아직도 귀에 쩌렁쩌렁하다.
그때 김혜선(98학번)은 들어오자마자 5·18 마당극부터 마당판에 홀려 신명 단원이었고, 지금도 배우로 활동 중이다. 광주문화운동 20주년 공동공로패를 드리려고 했던 황석영 선생님은 못 오셨고, 채희완 교주님만 공연이 다 끝나서야 술이 이만큼 취해 오셨다. 다들 그래도 춤 한 자락 춰달라고 성화를 부리니 봉산 미얄할미를 흐느적거리다 고꾸라지셨다.
탈패의 주제가, 탈반가는 김민기의 <이 세상 어딘가에> 였다. 우리는 매일매일 술을 마셨기에 매일매일 이 노래를 불렀다. 아쉽지만 막차 시간이 다가오고 자리가 파할때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동무를 하고 탈반가를 불렀다. 아시다시피 노래가 확 저음의 곡조라 방금까지 요란스러웠던 분위기에 키득거리기도 했지만 부르다 보면 감정이입이 참으로 많이 되는 노래였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까 있을까
평등과 평화 넘치는 자유의 바닷가
큰 물결 몰아쳐 온다. 너무도 가련한 우리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노래가 끝나면 다 같이 ‘민속문화~ 민속문화! 혁명투쟁!’을 외치고 누군가의 시작으로 옆 사람을 때리는 것이 한 바퀴 돌면 마무리 되었다. 말이 때리는 것이지 록콘서트장의 슬램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매일 매일 탈춤보다는 술을 많이 먹은 탈패의 하루는 마무리되었다. 노래만큼 좋은 세상이 오진 않았지만 막차를 안 놓치려고 뛰어갈 때는 낡은 세계가 뒤에 있는 것처럼 가슴이 벅차 올랐다.
1997년 도깨비 귀면와가 참 멋있게 그려진-최병률 선배(91학번)가 그린- 탈패 문을 열자오수를 즐기고 있던 박철형 선배(95학번)를 처음 만나 오금 장단을 배운 게 엊그제 같다. 허리디스크가 와 탈춤까지 바라지 못하지만 그때처럼 대강당 2층에서 신명마당에서 상대 뒤 광장(외상장부가 있던 단골 막걸리집)에서 딱 하루만 기절할 때 까지 놀아보고 싶다.
나는 지금 광주민중항쟁 전후 광주문화운동에 관한 논문을 준비 중이다. 2017년 국사편찬위원회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윤수안 선배와 함께 1978년 창립된 전남대 탈패와 극회 광대(1980년 창립) 활동과 5·18 민주시민궐기대회를 구술연구한 것이 큰 밑거름이 되고 있다. 당시 면담자는 윤만식(73학번, 창립멤버), 김선출, 전용호(78학번, 탈춤반 재건위), 김태종(76학번, 연극반) 모두 동아리 선배들이었다. 우리가 탈패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탈춤과 나'라는 주제를 끝내면서-어떻게 끝내야 할지- 혹시나 내게 주어진 지면이 더 있다면 '선배들 후배들 동기들 모두 고맙습니다'이다. 매일 매일 어두운 극장에 홀로 앉아있던 게 전부였던 내게 밝은 광장의 환희도, 탈을 벗고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내 안의 좁디좁은 세상이 깨진다는 것을 알려주고 힘을 준 곳이기 때문이다.
추신 : 학번과 대학을 글 내내 써야하는 것이 이토록 편치 않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온다. 그만큼 우리가 달라진 세상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글쓴이 한재섭 : 전남대 탈패 97학번으로 인류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했고 광주문화운동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사)광주영화영상인연대에서 발행하는 영화비평지 <씬1980>의 편집장이기도 하다.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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