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중 10편을 골라 주 2회(수, 토요일)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네이버 블로그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에는(https://blog.naver.com/tongwoohn/222631939375) 2020년 7월 이후의 모든 연재 글( 25편)을 볼 수 있다. 편집자
1. 김구 선생 마이크 잡다
2. 죽산 선생 마이크 잡다
3. 이지 스톤 마이크 잡다
4. 일곡(유인호) 선생 마이크 잡다
5. 마륵사(마륵사) 선생 마이크 잡다
6. 김재준 목사 마이크 잡다
7. 강원룡 목사 마이크 잡다
8. 스코필드 박사 마이크 잡다
9. 서인주 도사 마이크 잡다
10. 땅 속 운동권 마이크 잡다
푸른 밤송이로 태어난 나는 항상 담대하고 거칠 것 없는 몸가짐을 좋아했으며, 내 안으로 이글거리는 적성赤誠의 밤톨이 차오르고 있음을 느끼며 자랐다. 어머님의 태몽을 들을 때마다 범상치 않은 미래가 펼쳐지는 듯했다. 그러나 나를 먼저 가로막고 나서는 것은 상놈의 신분이었다.
아버지는 양반들과 자주 쟁투를 벌이셨고, 1년이면 몇 번씩이나 관아를 들락거리셨다. 삼촌도 솟증을 죽이지 못하고 늘 술에 취해 양반들과 으르렁거렸다. 이 모두가 상놈이 된 때문이었다. 나의 꿈은 먼저 상놈의 신세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집안 분위기에 휩싸여 나도 또래 양반 자식들과 대결하기 일쑤였다.
힘이 달리면 부엌칼을 들고 나와 설쳤다. 양반과 섞여 글방에 다닐 때는 글로써 이겨보리라 얼굴을 책에 묻었다. 성적이 꽤 올라갔고 양반들의 시기도 따라 올랐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어른들에게 상놈을 벗어나는 길을 물으니 과거에 급제해야 한다고 했다.
16세에 응시하려다 연로하신 아버지께 기회를 들이고 물러선다. 그때 이미 과장은 막장이었다. 설쳐대는 탐관오리들의 옆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양반의 길을 접고 독불장군을 다짐했다. 상서相書, 지서地書, 술서術書를 빌어다 탐독하면서 결국 ‘선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넉넉한 경사가 있음을 깨닫는다.
수도 입덕에 열을 올리고 있을 즈음 동학 소식이 들려왔다. 반상귀천, 빈부격차 없는 개벽 세상에 마음이 끌려 보은으로 내려가 최해월 선사를 알현한다. 직첩을 받아들고 황해도접주가 되어 많은 동지(聯臂)들과 함께 해주성 공략에 선봉을 섰다. 일군의 총기 난사로 겁을 먹은 사령부가 갑자기 퇴각 명령을 내린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러나 다음을 기약하며 군사들을 조련시킬 수밖에 없었다. 구월산 패업사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동학군을 일탈한 폭도들의 공격을 받아 많은 동지를 잃었다. 엄동설한에 홍역을 앓는 몸으로 어머님이 손수 지어주신 명주 군복을 벗어 동지들의 주검을 감싸 묻으며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리라 재삼 다짐한다.
잠시 안 진사(중근의 부친)에게 몸을 의탁하면서 왜적과 싸울 결의를 다진다. 백두산 기슭을 돌며 독립기지 건설을 물색하고 돌아오는 길에 국모 시해 소식을 듣고 의병에 가담한다. 치하포에서 변복한 일인을 알아채고 칼을 빼앗아 그를 난자한다. 국모 복수를 내세웠지만 일인들의 눈치를 보던 사법 당국에 체포된다.
벌써 초죽음이 되어 인천감옥으로 이감되는 아들을 따라오시며, 차라리 물에 몸을 던져 함께 고기밥이 되자는 어머님께, 옳은 일을 했으니 하늘이 보살피시리라 위로 말씀을 드린다. 외적이 들어와 나라의 상징인 대궐을 범하고 친일 주구들과 작당해서 왕후를 죽였다면, 백성들이 너나없이 들고 일어나 왜인을 닥치는 대로 척살했어야 맞다.
대대로 영화를 누리던 삼한갑족과 당대의 권문세가들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잡혀간 지 3년 만에 고향을 찾았을 때 모두들 장한 일을 했다고 환영했으며, 11년 후 다시 안악사건으로 검거됐을 때도 왜경들이 나의 전과를 까맣게 모르고 있을 정도로 나를 응원하는 백성들의 마음은 한결 같았다.
일인 타살은 그만큼 민족의 애국심을 크게 일깨웠던 것이다. 고향에서 애국지사로 떠받들려 후진 양성에 전력할 수 있었던 것도 나의 성의가 많은 사람들을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희망이 없는 곳에 희망을 거는 것이 혁명가의 길이라면 정의한의 입지 또한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무모한 충돌로 힘을 낭비하는 것은 극히 삼갈 일이었다. 나의 과단성에 의지하여 항일운동을 하자는 제의가 여러 번 있었으나 모두 자중자애하기를 권했다. 이재명이 비감을 못 이겨 총을 뻥 뻥 쏠 때 노백린 형과 나는 한 사람의 결기로는 오히려 일을 그르치기 쉽다고 총을 빼앗았다. 후에 이재명이 이완용을 척살하려다 실패했을 때 우리 둘이는 크게 후회했지만, 안중근의 종제 명근이 울분을 토하며 날뛸 때 힘을 비축했다가 효과적으로 써야 한다고 만류했다. 무조건 신중을 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성과가 확실할 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희생을 최소화하고 그들의 넋을 위로할 자신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두 번째 갇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풀려난 나는 고향을 지키며 장기전에 들어갔다. 간간이 들려오는 만주·연해주·상해에서의 동지들 소식은 가슴을 설레게 했지만, 청·일, 로·일 양 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기세는 만만치가 않았으니, 이에 합당한 전략을 궁리하다 보면 울울답답이 밀려와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다만 농장관리를 맡아 생활 터전이 잡히면서 모처럼 단란한 가정을 이루니 큰 위안이었다. 결혼해 10여 년 간 고생만 한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을 얻으니 나이 마흔을 넘어 찾아온 농장지경弄璋之慶이었다. 그때 바로 3·1이 터졌다. 가정사에 연연할 내가 아니었지만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섰다.
잔인한 왜놈들에게 도륙당할 백성들이 큰 걱정이었다. 어차피 격동을 휘어잡고 운동 역량을 키워나갈 중심에 서야 했으니 나 자신 몸을 사릴 수 없었다. 나는 상해로 뛰었다. 신민회에서 알게 된 혁명 선배들이 반가이 맞아주었다. 나는 독립 정부의 수위나 청소부가 되겠다는 심정으로 지나친 자리다툼이나 지역 대립을 완화하려 애썼다.
어떤 갈등도 민족 우선으로 봉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많은 사람이 소망하는 재산에 대해서도 나는 탐관오리의 축재는 미워했지만, 절약하고 뼛심으로 모은 재산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탈옥 후 삼남을 돌며 여기저기서 지주와 농민이 대립하고 타협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았으며, 농장을 맡으면서는 일부 농민들의 나태와 작폐를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임정이 건국강령을 만들 때 나는 이런 점을 망라하고자 애썼다. 이제 일제만 물리치면 온 국민에게 희망찬 대도가 열릴 것이었다. 가장 주장이 센 공산당도 나라를 세운 후에 경제 정책으로 타협하면 될 것으로 보았다. 모든 이해관계를 민족 지붕 밑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중요했고, 또 그 방면의 큰 진전도 있었다.
그러나 조국의 앞날이 미·소의 분할 점령으로 캄캄해지니, 26년 전 상해로 떠날 때와 다름없이 초조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무 발언권도 얻지 못한 임정 앞에 때를 만난 듯 불나비와 쥐새끼들(飛蟲鴟梟)이 친미와 친소로 갈려 쟁투를 벌인다. 나오느니 한숨이요 터지느니 탄식이라. 이 노릇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다들 새 나라의 동량이 돼 주리라 기대했던 인재들이었다. 어찌 강대국을 물리친단 말인가. 이제부터가 진정한 독립운동이었다. 그런데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독립이 가능한가. 그동안 보아온 월남을 생각한다. 일본이 물러간들 또 불란서가 들어올 것 아닌가.
다시 독립 국가를 생각한다.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선량한 강대국은 없는 것인가. 악의 강대국을 내쫓아야 한다던 강대국이 스스로 그 자리를 차지하는 셈 아닌가. 아니면 건국강령까지 마련한 임정을 방해하고 자기들의 구미에 맞는 정권을 세우려는 저의가 무엇인가. 우리의 살 길은 무엇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옷깃을 여미고 하나님 앞에 선다. 스물다섯에 주위의 권유로 하나님을 믿었다. 사랑과 평화, 이웃과 더불어 걷는 삶, 최후의 심판과 영생, 속죄로 복을 받는 기쁨 등등 많은 설교가 있었다. 하나 내 속으로 들어온 십자가는 이웃 사랑이요, 이웃 사랑을 방해하는 불의와의 싸움이요, 최후의 승리가 정의에 있다는 확신이었다.
늘 절망의 순간에 희망을 안겨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셨다. 나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맥박이 요동쳤다. 혁명 난류가 심장에 쏘아 박은 탄환이 아직도 맥박을 따라 자꾸 뒤척인다. 지금 미·소 두 강대국 밑에서 각각 나라를 세운다면, 그것은 온전한 나라가 아니라 속국이요, 우리의 자주성과 독립성은 요원히 물러가는 것이다.
나라는 영영 쪼개지고, 민족도 쪼개지고 종당 간에는 민족문화의 파멸과 함께 민족이 소멸되는 것이다. 민족이란 민족문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남의 문화 변방에서 그 나라에 종속되어 사는 것이다. 자기 민족의 번영을 위해 마음대로 외치는 자유인을 죽이는 것이다. 문화의 중요성을 모를 때에는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가 우리의 가장 빛나는 미덕으로 알았다.
자식들에게 1차 유언으로 일지를 정리할 때만 해도 그랬다. 혁명 용사들이 나라를 세우고 친일주구를 처단하고 나면 백성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가정을 지키며 나라를 받들게 될 것이니 시화연풍時和年豊 태평성대太平聖代 아니겠는가 했다. 미·소가 이빨을 드러내고 침을 흘릴수록 우리가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은 우리 문화 아니겠는가. 이를 중심으로 대동단결함이 활로 아니겠는가.
그 첫 단계가 외군 철수였다.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신탁통치에 매달리기 전에 완전한 독립 투쟁을 벌이는 일이었다. 반만년 역사요 조선조만 해도 500년 아닌가. 무슨 자치 능력이 부족하단 말인가. 왜 신탁통치가 선행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군사대국을 지향할 수도 없다. 경제대국을 지향할 수도 없다. 아니 있어도 다른 나라에 힘을 행사해서 자기를, 자기 문화를 강권하지 않는다.
또 나아가 소리 없이 남의 소산을 거저 싸게 가져 갈 대한이 아니다. 또 그럴 생각도 없다. 우리는 우리 것을 갈고 닦아 남이 본받게 할 따름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은 우리 문화를 선양해서 모든 나라들이 우리를 따라 화목하게 살 수 있도록 앞장서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인 평화를 지키며 이웃과 서로 협동하는 것이요,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요, 나아가 세계 민족이 저마다 나라를 세우도록 하고 서로 우의를 다지자는 것이다.
그러니 나라는 이미 사라졌다 해도 문화의 동질성을 내세워 민족문화를 회복하는 일이 독립을 쟁취하는 첫걸음이 되지 않겠는가. 본말이 전도되어 지금 우리의 주체성과 정체성이 얼마나 훼손되고 있는가. 북한은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곳, 국가 권력에 시달리는 인민들이 그 고통을 호소할 길이 막혀있는 독선국가다. 반면 남한은 어떤가.
부익부의 빈부 격차, 악의 실업률, 최고의 자살률, 날로 더해가는 오염 강산, 교육을 따라가기 바쁜 가정 경제의 궁핍과 그렇게 훈련된 강병들에게 쪼들림을 당하는 약졸, 땅이 꺼지는 패배자들의 한숨, 태어난 자리에서 보고 배운 지식으로 자기를 부요케 할 방도를 찾기 대신 남의 무기로 남의 기술로 이웃을 겨누는 사냥꾼들이 우리의 희망인가. 귀족들만의 전유물인 자유 평등을 모든 국민이 고루 누리도록 하자는 게 근대화 아닌가.
부자는 여전히 귀족이고 쌍놈을 없앴다고 하나 새로운 쌍놈이 생기면 그게 진정한 근대화요 해방인가. 우리가 일제를 거부한 것은 총독부 건물을 인수하여 그 안을 우리의 귀족으로 채우려고 한 짓이 아니지 않는가. 소수만 잘 사는 나라는 언제나 있었다. 그 권력 국가는 백성의 착취를 합법화 한다. 꼭 강대국의 지배 논리를 제 나라에 대입하는 것이다. 경찰과 군대로 귀족의 방패를 든든히 하는 것이다.
이제는 그게 아니라 어느 구석에 있든 많은 국민이 살맛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의 구순한 사회 환경을 온 세계가 따라 배우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합당한 독립운동이다. 강대국의 약육강식 논리를 배격하고 안으로 더불어 사는 공동체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민족이란 영토요, 그 지상 인민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 약육강식의 논리는 민족을 파멸하는 것이다.
민족이 없어지며, 민족문화가 말살되며, 민족이 강약·빈부 남북으로 분열되고 있음이 그 입증이다. 44세에 고국을 떠나 70세에 환국한 나. 상놈의 추억 대신 임정 주석의 영광을 안았으니 그냥 죽어도 한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나만의 영광이 아니라 민족의 영광이 목숨을 이어온 목표였고, 또 더 삶을 주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일 것이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 되는 길이 문화임을 보여주시는 하나님 아니신가.
문화란 단순한 민속놀이가 아니요 싸움을 독려하는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아니다. 두레반으로 민족을 불러 모으는 초혼의 노래이며 온정을 나누는 살 비빔이다. 같이 하는 산하가 있어 민족이요, 함께 하는 일터가 있어 민족이요, 더불어 쉬는 그늘이 있어 민족이다. 제 땅에서 나는 소출로 배불리 먹지 못하면 민족이 안 된다. 유무상통은 있어야겠지만 자급자족이 민족생명의 근본이다.
사람을 팔고 금수강산까지 팔아서 잘 사는 민족은 이미 죽은 민족이다. 후손들의 건전한 삶을 방해하는 오늘의 여하한 여유와 만족도 민족을 죽이는 것이다. 간디의 물레는 단순한 비폭력 반제운동이 아니라 민족자존의 영존운동이었다. 우리에겐 그런 지도자 왜 없는가. 제국帝國에서 공부하며 그 제국과 싸울 채비를 갖추기는 쉽지 않을 것이지만, 우리 독립운동 진영에 그런 사람이 꽤 많았다.
그러나 새로 나타난 제국을 안일하게 보는 과오에 빠져 있음은 안타깝다. 많이 배운 사람이 귀족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급제한 사람이 귀족이 되어 백성을 핍박하던 과거와 무엇이 다르랴. 정절은 끝까지 지키기 어려워 정절이며, 누구나 고생을 내려놓고 싶은 게 상정이기에 영화를 놓치기 싫은 것이다. 더욱이 새 제국에 맞서야 별 희망이 안 보이니 더 그랬다. 아무나 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독립운동도 멀리 보고 뛰어든 것 아닌가. 희망은 만들어가는 것이라며 모든 고난을 참아오지 않았는가. 오늘 문화 강국의 희망은 훨씬 뚜렷한 그림이다. 자주 독립, 민족 화합은 왜 지금도 휘발성이 강한가. 약육강식에 다 젖어든 것 같지만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동물을 떠나 사람으로 회귀한다. 외세 의존, 빈부 심화에 사람의 심사는 늘 뒤집혀 있다.
그래서 이를 막으려 강대국은 위세문화, 강자문화, 빈부당연문화를 강화하기에 혈안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강대국이 밖을 침략하여 박수를 유도할 때 약한 나라는 높은 인간애·민족애·동포애로 안을 무장해야 한다. 이로써 밖을 대항하고 그 손아귀를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남이 우습게보고 수작을 부린다. 아무리 외형을 불려 강대국을 따라가기로 민중적 삶이 피곤해서는 점점 저들만의 귀족놀음으로 전락한다.
일제 때도 친일파들은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조선조의 양반을 더 낫다고 할 수 있는가. 그 끝은 매국이었다. 다수가 따분함을 느낄수록 그 사회의 경쟁력은 물거품이 되어 간다. 날 보고 국제 정세에 어두웠다고 한다. 물론 배운 바 지식도 적고 세상을 내다 볼 식견도 많지 않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미국이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는 종전 6개월 전에 알았고, 미국에 끌러가선 안 된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다.
소련이 나중에 끼어들었지만 외세에 의존하는 정부는 독립정부가 아니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3년이고 5년이고 하지만 그건 우리가 결정하는 게 아니지 않는가. 그 간에 이미 나라와 국민은 친미·친소로 갈라져 있을 것이었다. 또 임정을 고집했다고 하나 권세를 누리겠다고 한 게 아니라 구심점이 되어야 정국이 수습된다는 것이다. 사실 곱던 밉던 임정만한 정통이 없었기에 당시의 인재들이 다 임정의 품에 안겨야 했다.
그랬다면 분단을 감수했겠는가. 시불리로 분단이 됐다 하더라도 임정이 있어 얼마든지 연대가 가능하고 재결합을 이루었을 것이다. 권력에 눈먼 사람이 아니라면 당시의 지식인 선언과 같이 다 분단의 비극을 예측할 수 있었다. 결국 비극은 현실화 됐다. 남한이 미·일을 등에 업고 국가 자본주의를 성공시켰다 하나 국가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백성을 위한 정치가 아니었다. 특히 외자 성장이란 외자 좋은 일만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들에게 생산기지를 제공하는 외에 민족이 영구 번영할 수 있는 기반은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깊이 따지기는 어렵지만 남미·동남아를 보면 그렇기도 하다. 원료는 그렇다 치고 막대한 생산재를 수입하고서는 국내 노동소득이 커질 수 없다. 오늘 민중의 생활고를 악화시키는 주범 아닌가. 또한 통제자본주의라 하지만 아무리 통제해도 아랫목만 설설 끓는데 윗목은 냉랭하다. 윗목 사람들의 창의력은 사장되는데 경제가 제대로 돌겠는가.
또 윗목을 제쳐 놓고 자기들만 살려는 마음가짐으로는 아랫목 창의력도 쉽게 솟아나기 힘들다. 있는 창의력도 시들고 고갈된다. 역대 어느 창의력도 돈만 많이 벌려는 사람에게서 나온 적이 없다. 왜냐하면 창조주와의 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근대화·산업화의 역사를 볼 때 1등은 영·미·불이요, 2등은 독일과 일본이다. 스페인과 이태리도 모방했지만 많이 불안하다. 러시아는 공산주의로 한 몫을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요는 창발력을 발휘해서 기계·기술·원료의 자급도를 높여야 한다. 그래야 안정된 일자리가 늘어난다. 지금 누가 3등을 할 것인가. 중국과 인도는 전통이 복잡 강고하다. 일본을 따라잡는 데는 우리가 적격이다. 그러니 주춧돌을 잘 놓아야 한다. 정의감 없는 사회, 억압된 사회는 창의력이 없다. 군부 독재 30년은 많은 신화를 창조했다. 그러나 저고용, 빈부 격차, 환경 파괴의 부작용을 남겼다. 이 노릇을 어쩌랴. 그 해결책이 안 보인다. 신화를 깨야 한다.
공리공담 가지고는 안 된다. 무엇보다 국민 창의력을 크게 신장시켜야 한다. 북한과의 적대관계 해소가 급선무다. 증오가 충만한 북한의 창의력이 보잘 것 없듯이 맞대응하는 남한도 큰 장애가 걸린다. 공동체의식도 창의력의 한 축을 이룬다. 다른 나라와도 공동체를 말하면서 북한을 놔둬서는 안 된다. 신화는 박정희로 포장되었을 뿐 내용은 내로라하는 지식인 전문가의 두뇌로 채워져 있다. 마치 조선조가 등과한 인재들의 작품이듯 말이다.
서울대학이요, 외국 박사요 다 수재들이다. 그들은 지닌바 지식으로 불꽃을 태웠다. 그러나 기초가 부실해서 기울어지고 있다. 늦기 전에 버팀목을 세워야 한다. 중소기업 육성, 공정한 납품 질서, 토지 수용 확대, 무상기술교육, 극빈자 생활보장 다 급하다. 모두가 느슨하게나마 한 가족으로 사는 것이 국력이다. 국민 위에 떠 있는 산업화는 허구다. 포철을 생각한다. 이 땅에 세워진 거대 시설, 거대 기업은 점점 다국적 기업으로 둔갑한다.
외국인 또 외국 박사 고용도 점점 는다. 많은 한국인이 일하지만 그 덩치만큼 전체 고용과 소득에 기여하지 못한다. 일본·미국의 거대 시설은 파급 효과가 직접 고용의 3~4배나 된다고 한다. 시설·기자재·원료 3방향으로 퍼진다. 우리도 이제 자체 개발을 늘려 간접고용을 극대화해야 한다. 대책이 늦으면 이제 더 성장은 어렵다. 밤을 패가며 땀과 악취와 독취와 싸우는 날품팔이 모작꾼들이 많아서는 안 된다.
야릇한 등불 아래 억지웃음을 파는 논다니들이 들끓어도 안 된다. 떡대로 깡으로 빗나간 의리로 갈취를 일삼는 왈짜들이 거리를 활보해도 안 된다. 세계에서 제일 많은 어린이를 양자 보내는 나라, 일본에서, 미국에서 몸으로 먹고사는 조선 여자들이 많아서야 옛날 정신대를 나무랄 수 있는가. 외국인 노동자, 외국인 신부가 몰려드는 것도 민족적 화근을 심는 일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신칙할 일이 너무 많다. 한심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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