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디아스포라적 삶, 지금도 집을 나설 때 다시는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마음에 뒤돌아서 집을 다시 쳐다본다. 남산 안기부, 독일, 북한, 그리고 미국 망명생활, 내곡동 안기부, 검찰 조사의 통과 의례가 이어졌다. 그 이후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정지된 듯, 움직이는 춤사위를 멈추어 설 수밖에 없는 역사적 순간을 체험했다. 지난해 추석 무렵 “탈춤과 나” 원고 청탁을 받았다. 채희완 선생이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마치 자술서를 써야 되는 절박한 숙제처럼 아련한 기억 속의 풍경들이 떠올라 달만 바라보고 사는 박꽃처럼 혼자서 쓴 웃음을 지었다. 문득 어느 날 동양 사람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유리창에 FBI 태그를 내보이며 집으로 찾아왔던 일이 떠올랐다. 이것저것 묻더니 “비자 기한이 3개월밖에 안 남았는데, 불법 체류자가 되면 어떻게 할거냐”라고 물었다.
도대체 나를 돌아오지 못하게 프레임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변호사들인지, 창작과 비평사의 이시영인지, 작가황석영석방대책위원회 관계자들, 부모님 아니면 가족들. 그 누구인지 지금도 그것이 알고 싶다. 사선을 넘어 고국에 돌아오니 “집도 없이 뭐하고 살았냐”며 부모 형제 가족 친구 주변 사람들이 반기기보다는 “누구시더라!”라고 되묻는다. 살아가려면, 죽지 않고 살기 위해 가슴에 묻고 있던 김명수의 탈과 춤 이야기를 이제는 말하고 싶다.
오금을 죽이며 살리며, 탈춤
1968년 중2 여름 방학 때 김기수 선생에게 봉산탈춤 팔먹중춤과 노장춤 등 기본 춤사위들을 중,고,대학교 1년 선배인 김기인을 포함해 10여 명이 같이 배웠다. 수업이 끝나면 발레리나 꿈을 갖고 테크닉 연습에 집중하기 위해 통나무로 지어진 무용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배가 고프면 아카시아 꽃잎을 따먹던 기억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우리는 칼춤을 배우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탈춤이라니! 모두들 얼굴이 탈바가지처럼 되어버렸다.
김기수 선생이 “학생들에게 탈춤 전수를 하고 싶다”고 학교 측에 요청한 것으로 알고 있다. 손목에 한삼자락을 끼고 할아버지 같이 뒷짐을 지고 오금을 죽이며 살리며 발디딤 연습부터 했다. 덩 덩 덩 덩 덩 덩 덩 덩 덕 따르르르, 아하~ 쉬이~ 아하~ 쉬이~ 쉬이이~ “산 속 깊숙이 들어가 중이 되어 세월 가는 줄을 몰랐더니…한바탕 놀아 보세~” 덩덕 기닥 덩~더 음 잦은 타령 장단에 맞춰 “낙양동천 이화정” 하늘을 향해 불림을 하고 외사위 겹사위 춤사위들을 익히느라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며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개학 후 발레 연습을 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몸이 탈춤 추듯 움직이는 것을 보고 서로 쳐다보며 웃음꽃을 터트렸다. 물론 탈춤 연습은 중단되었다. 틀에 박혀 발레로 정형화된 내 몸이 건물 무너지는 듯 해체되는 경험, 땅바닥을 볼 수 있는 여유, 숨통을 살리는 호흡법도 배웠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김천흥 선생 제자 한옥희 선생에게 검무, 기본춤 등 한국춤을 배웠다. 학교 측의 후원으로 합숙을 하며 자고 먹고 집중적으로 연습을 하면서 콩쿠르를 준비했다. 전국 무용 콩쿠르에서 연달아 종합 우승기를 거머쥐었고, 고3 때 발레 솔로 부분으로 대상을 받아 졸업식에서 공로상도 수상했다.
2010년 3월 맨해튼 코리아소사이어티 갤러리에서 “밤의 가면: 한국전통무용극으로부터의 얼굴들” 전시가 열렸다. 전시된 탈들은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김기자 석좌교수의 소장품이었다. 전시 중인 봉산탈춤의 탈들은 인간문화재 김기수 선생이 제작한 것이다.
1977년부터 해외에서 탈춤을 소개한 김기자 교수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어린 시절 탈춤 공부한 기억이 나서 전시장에 갔는데 김기수 선생을 만날 수 없어서 아쉬웠다.
1973년 이화여대 무용과 대학생이 된 뒤, 탈춤반과 룸비니 동아리에 가입했다. 대학생활에 잔뜩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신입생환영회가 끝날 무렵 육완순 선생이 나를 눈여겨 보더니 마치 기생 뽑듯 나를 지목해 자기 방으로 불렀다. “이번 4월 부활절 행사인 <슈퍼스타>에 출연해야 한다.”고 학교 방침이라며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그런데 한 번 공연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학 4년 내내 새벽연습, 저녁연습, 지방공연 등 마치 <슈퍼스타>를 공연하려고 등록금 내며 대학에 다니고 있는 것 같은 일정의 연속이었다. 더군다나 불교신자인 나로서는 <슈퍼스타> 음악을 계속 듣는 것도 인내심이 필요했다. 박외선 선생의 고별 공연에도 출연했다. 한영숙 선생, 김천흥 선생의 춤도 워크숍으로 배웠다. 그리고 '구도적인 공간구성의 대하여'라는 논문을 쓰고 졸업했다.
그 무렵, 탈춤반의 일원으로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에 원정 연습을 하러 간 적이 있다. 그때 마로니에공원 커다란 고목나무 밑에 꾀죄죄한 남학생 6,7명이 앉고 서고하며 기다리고 있던 모습이 수채화처럼 보이는 것 같다. 그때 그 학생들은 채희완, 장만철 등인 것 같다. 이들 중에는 나중에 다시 만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등으로 인연이 이어졌다.
하지만 <슈퍼스타> 공연 때문에 탈춤반 활동을 병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백귀순 선배에게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던 것 같다. 아쉽지만 버들마당 근처에 ‘삐그덕 무용연습실’이 있어서 봉산탈춤 연습 장면을 자주 쳐다보곤 했다. 2000년대 중반에 부산대에서 강연과 춤 워크숍을 했는데, 대학 당시 민속극회 회장이던 홍성원이 객지에서 고생했다며 집에서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고 채희완 선생과 셋이서 오랜만에 탈춤도 놀았다. 나중에 ‘룸비니’에서 이대 탈춤반의 김남수 선배도 만났다. 사실은 그때 그 시절 잠깐 동안 탈춤반 인연들이었던 것 같아서 글쓰기를 망설였다.
1977년 대학 졸업 후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한 외국어대 영어연극 뮤지컬 <깡디드>, 신촌76소극장에서 PMC 프로덕션 예술총감독 송승환의 뮤지컬 <LUV>, 이문열 작 <들소> 극단 실험극장 윤호진 연출의 안무를 시작으로 10여 편을 작업했다. 대한민국연극제에 출품된 이근삼 작 <게사니> 민중극단 대표 정진수 연출의 작품을 마지막으로 연극 안무했다. 뉴욕으로 보낸 정진수의 편지에 의하면, 이 작품으로 상을 받았다며 “나중에 밥을 사겠다.”고 말했다. 그 당시 터벌림 춤사위를 변형해 움직임을 만들고 배우들에게 장단을익히게 해서 안무한 것으로 기억한다. <게사니>는 북한 지역에서 쓰는 순 우리말로 거위를 말한다. 경기도 광주에 살 때 모란시장 장날에 가서 거위 2마리를 사서 키웠는데, 정말로 집을 잘 지키고 그 생명력에 놀란 적이 있다. 뉴욕에 살 때는 영화를 공부하고 있다는 이근삼 선생의 딸이 손님으로 집에 찾아와 만난 적도 있어서 <게사니> 작업을 잊지 않고 있다.
이사도라 던컨에게 바치는 춤, 코파나스 언덕
1980년 9월 공간사랑에서 <김명수 현대무용>으로 데뷔했다. 공연에는 안신희, 구형모, 나상만, 박상원(현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이 출연했다. 그해 <신동아> 12월호에 춤평론 가 이순열의 평론이 실렸는데, 내 작품을 “올해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공연이었다.”고 평했다. 내 춤의 정체성은 현대춤이지만 다음 작품 구상을 위해 경계를 넘는 탐색을 시작했다. 특히 피나 바우쉬의 <봄의 제전>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 공연을 본 것이 많은 자극이 되었다. 김숙자 선생에게 경기도 도당굿 춤으로 진쇠, 터벌림, 제석, 깨끔, 부정놀이, 올림채, 도살풀이 그리고 입춤을 배웠다. 이동안(1906~1995) 선생에게는 재인청 춤으로 태평무, 승무, 진쇠춤, 살풀이,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검무, 기본무, 장고무 그리고 무속 장단을 배웠다. 이동안 춤사위는 근엄하며 법도가 있고 중성적인 모습이 마치 현대춤을 보는 것 같다. “저 몸짓과 소리 속에 한국춤의 정신이 숨어 있는 것 아닌가!”하는 의문 속에 춤 공부를 시작했다. “아~ 으~ 으으 으~ 으~ 니~나노~ 나니~ 니~나노~”를 부르시고 “입장단 속에 춤이 익어 가는 거야!”라고 하시며 춤을 가르치실 때 선생의 장구 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배움을 바탕으로 1983년 이동안 <태평무의 연구>(나래)를 출간했다. 후에 2007년 논문 '한국무용사에서 잊혀진 목소리 : 진쇠춤과 태평무의 담겨진 이동안 춤과 철학의 세대 간 연구'(파리 인터내셔널 댄스 리서치 심포지움, 류주연·김명수)를 프랑스 국립무용센터에서 발표했다. 1983년 절판된 책을 전면 개정하여 2015년 <조선의 마지막 춤꾼 이동안 : 재인청 춤의 기억과 김명수 식 춤 표기법>(서해문집)을 발간했다.
1983년 6월 25일 “도쿄국제현대무용페스티벌”(이사도라 던컨 저택 복구 사업으로 발기한 <코파나스 모임>과 일본 현대무용협회가 공동개최) 팸플릿에 의하면 나는 이 무용제에 안신희와 함께 초청받았다. 무용제 수석 디렉터 안리 미사키는 이 무용제를 가리켜 “국경을 넘어 동호인 댄서들이 자작극 솔로 작품으로 참가하는” “우열을 겨루는 것이 아닌 만남과 우정과 감동”의 “국제친선과 문화 교류”의 장이라고 했다. 주최 측은 “코파나스는 현대춤의 선구자인 이사도라 던컨이 발견한 그리스에 있는 언덕 이름이다.” 또한“International Modern Dance Festival은 콩쿠르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세계 커뮤니케이션의 해에 제1회 도쿄국제현대무용페스티벌을 개최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의미로 평가했다. 그런데 얼마 전 MODAFE 40주년 팸플릿을 보았다. “38년 전 한국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라는 안신희의 언급이 눈에 띄었다. 그 당시 “안신희가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고 누가 보도자료를 보냈는지 알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과 사실이 마주치고 있다. 한국현대무용협회 회장 육완순은 1984년 코파나스상을 만들어 첫 번째로 안신희에게 주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이사도라무용예술상’(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도라상’(한국현대무용뮤지엄)을 만들어 현역 무용가들에게 주었다. 이것이 한국 현대춤계의 대모라는 육완순의 뿌리, 아니 민낯이라고 생각한다. 육완순이 작고한 후, 안신희가 육완순의 후임으로 (사)한국현대무용진흥회의 이사장을 현재맡고 있다.
강남 문화예술의 새 장을 여는 <예술극장 판>에서 그해 9월 한 달동안 <전통예술제>가 열렸다. 김명환의 ‘판소리고법 감상의 밤’, 김덕수·이광수·최종실·김용배의 ‘사물놀이’, 박동진의 ‘변강쇠타령’, 김일구·김영자의 ‘국악무대’, 김금화의 ‘철물이 굿’, 이생강의 ‘전통기악의 밤’, 국립국악원 소속 율려악회의 ‘궁중음악의 밤’, 공옥진의 ‘1인 창무극 심청전’, 정명숙의 ‘한국무용의 밤’, 정인방의 ‘회고의 밤’ 등의 공연이 이어졌고, 나는 ‘김명수 전통무용’으로 초청받았다. 장단에는 이동안, 김숙자 선생이 맡아 주셨다. 특히 장고무는 이동안 선생의 구술에 의하면 이날치(1820~1892)의 제자 김인호(1860~1935[?])가 광무대에서 극장 무대에 맞게 재구성하여 이동안 선생에게 전수한 춤이다. 재인청은 1784년 창설되었고, “날쌔게 줄을 잘 탄다”는 의미에서 날치라는 예명을 갖게 되었다. 그가 새타령을 부르면 새가 날아든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1937년경 이동안 선생이 최승희에게 전수하고 1983년 다시 김명수에게 전수해 44년 만에 이 무대에 올려졌다. 한편 1991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최승희가 안무 주연을 맡은 1956년 창작 무용극 영화 “사도성의 이야기”에 이동안의 장고무를 최승희(당시 45세)가 추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그 해 가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세계 커뮤니케이션의 해인 그해 11월, 유엔 주최 “세계전통문화페스티벌”에 초청받아 라마마아넥스 극장에서 공연했다. 콩고, 아이누족, 인도, 모로코 등 40여 개국이 참가했다.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공연 준비를 마치고 분장실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공연 시작 30분 전쯤 어떤 동양인이 한국말로 “오매 환장하겄네”하며 욕을 하며 급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이매방 선생이었다. 객지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너무 놀랐다. 승무를 추기로 했는데, 택시기사가 극장을 못 찾아 헤매다 늦은 것이었다. “아니 니가 누구냐?”고 물어서 먼저 인사를 하고 북 조립을 도와 드렸다. 그런데 화가 안 풀렸는지 중얼 중얼 참지 못하고 장삼 춤사위를 던지며 욕을 하면서 춤을 추다가 북 가락 장단에 저절로 신이 나서 때려라 부셔져라 하듯이 신명이 난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공연이 끝나고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연락처를 달라고 했다. 다음날 전화를 해서 “집 앞에 있다! 문 열어라! 가방이 무겁다.” 하면서 집으로 들어 오셨다. 두 달 정도 맨해튼 집에서 같이 지냈던 것 같다. 마사그라함 스쿨에서 연습 끝나고 집에 오면 밥도 해놓고 청소도 하시며 “나는 공짜 밥은 안 먹는다. 북채 어디 있냐! 한복 어디 있냐!”며 시집살이가 시작됐다. 사실 내 작품을 만들고 싶어서 뉴욕으로 공부하러 왔는데, 그날 이후 집중해서 이매방 춤, 한복 만들고 접고 입는 법, 구술을 통한 춤 역사 공부를 다시하게 됐다. “원래 승무 북은 외북이 맞다. 예전에는 북 칠 때 사람이 들고 있기도 했다.”고 말하며 “사실 어떤 단체가 외국에 공연 간다고 부탁해서 삼고무, 오고무를 재미로 만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천추에 한이다.”라고 후회하셨다. 승무, 살풀이, 산조 영상 기록 작업도 해드렸고 춤 강습을 열어 용돈도 마련해 드렸다. 그리고 1989년 황석영 방북 후 기자들을 피해서 독일 가기 전까지 집중적으로 이매방 선생의 마포 연습실에서 승무, 태평무, 살풀이를 배웠다.
1984년 11월 뉴욕대학 공연학과 <공연이론 : 아시아 춤과 연극>이라는 제목의 Richard Schechner 교수 ‘한국의 가면극’을 주제로 한 강의 시간에 한국춤 시연 공연을 했다. 12월에는 뉴욕 사회 속에 아시아 각국의 문화를 소개한 The Asia Society의 공연 디렉터 Beate Gorden의 초청으로 경기도 도당굿 춤 '부정놀이'를 공연했다. Asian Dance 프로그램으로 일본의 가부키춤, 중국의 경극, 인도네시아의 발리춤도 같이 공연했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통일굿
1985년 가을, 패션디자이너인 친구 김명숙이 맨해튼 집을 방문했다.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플러싱에서 광주 5.18 관련 행사가 열린다며 강연도 하고 영상 상영도 하니 같이 가자고 했다. 망설이다가 가슴을 가다듬고 무거운 마음으로 플러싱 행사장으로 향했다. 며칠 후 이 행사를 주최했던 이들이 나에게 춤과 풍물 지도를 요청해 왔다. 그들은 재미동포 1.5세, 2세들과 마당극을 준비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나는 뉴욕대학원 공연학과 학생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런데 윤한봉, 황석영, 재미한국청년연합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집 근처로 찾아와 집요하게 부탁을 했다. 그래서 주말만 가르쳐 주기로 했는데, 풍물연습을 끝내고 집으로 오가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응급실에 누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광주에서 죽어갔던 사람들 모습이 떠올라 내 개인 공부를 뒤로 미루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11월 미주 최초 마당굿, 뉴욕한인문화패 “비나리” 창립기념공연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공연을 했다. 기획 윤한봉, 연출 황석영, 안무 김명수, 출연 비나리 단원들이다. 김효신 목사, 작곡가 이건용 동생 이희용, UCLA 한국학과 이남희 교수의 동생 이경희, 허영은 박사, 대학생들이다. 정기열 목사 부부, 한호석, 강완모도 스태프로 참여했다. <상록수> 작가 심훈의 셋째 아들인 심재호의 가족, 딸 심영주도 출연하고 사위 서혁교(NAKA미주동포전국연합)도 스태프로 열성적인 지원을 했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젓가락 장단으로 시작해 구음으로 소리를 내어 차츰 무르익으면 저절로 나오는 호흡으로 몸 장단을 두드리면서 무속 장단 터벌림, 진쇠, 올림채 등을 익히게 했다. 탈춤 기본 춤사위로 몸을 흔들어 중심을 잡아 주고 발바닥을 떼었다 붙였다 하며 땅의 정기를 느끼게 했다.
마치 황토길을 걷는 것처럼 발디딤부터 기본 춤사위 연습도 시켰다. 경기도 도당굿을 차용해서 안무 틀을 짜고 앞풀이 뒤풀이 풍물 가락도 가르쳤다. 김효신 목사 부인 허영은 박사가 무당 역할을 맡아 열연하여 관객들로부터 돈도 많이 받았다. 미국 여러 대학이 비나리 팀을 초청해서 공연을 다녔다고 들었다. 1991년 방북했을 때 평양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 사람이 바로 정기열 목사(WCO, 세계문화오픈 사무총장)였다. 평양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 윤한봉은 재미동포 사회에 재미한국청년연합을 만들었고, 5·18 마지막 수배자였다.
1986년 초 조성우, 황석영이 미국으로 전화를 걸어 일본에서도 공연하고 싶다며 간청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한 학기를 쉬기로 하고 일본을 거쳐 한국에서 치료 받기로 했다. 1986년 3월 일본 우리문화연구소 주최 재일동포문화패 <한우리> 창립기념공연 마당굿 "통일굿"을 도쿄, 오사카에서 공연했다. 기획 조성우, 연출 황석영, 안무 김명수, 출연한 우리 단원들이다. 출연자는 재일동포 2세 3세들이고 김영호, 최보, 신가미, 김구미자, 김순차, 오아미, 이정수, 김훈, 문절자, 임만리, 김영희, 진경옥, 최명건, 김수진, 황우철, 고규미, 김신야, 이윤호이다. 조성우는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됐고, 전 민화협 상임의장이었다.
기획팀에서 한국말 대사가 어려우니 일본말로 대사를 하면 어떠냐는 의견이 있었다. 몸의 언어가 말과 같을 수밖에 없으니 일본 춤사위가 나올 수밖에 없다며 반대했다. 아쿠다가와상을 수상한 재일동포 작가 이양지가 생각났다. 춤을 추다 보면 말이 트일 수 있다는 소신에 한국말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 초 이양지하고 같이 도살풀이 연습을 하면서 친분을 갖고 있어서 재일동포들을 정서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연습할 때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연습 중에 저절로 한국말이 튀어나와 모두가 놀란 적도 있다. 무당 역을 맡은 배우 김구미자는 고인이 되었고 한국학 교수도 있고 <신주쿠 양산박> 대표 김수진도 한국을 오가며 활동한다고 들었다. 한우리 팀과 작업하면서 뭔지 모르게 신변에 변화가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귀국하면 안기부 조사를 받을 수 있다고 실행위원들이 말했다. 김포공항 검색대에서 정신없이 짐 검사를 받았는데, 집에 오니 여권이 없어지고 말았다. 아니 여권을 압수당한 것 같다. 황석영은 귀국하여 안기부 조사를 받았다. 조사 받는 중에 안기부 직원을 대동하고 연희동 프라자다방으로 왔다. “할 말이 있으니 미국가지 말고 석방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민족작가회의에서는 황석영을 석방하라고 농성을 하고 있었다. 안기부에서 석방되자마자 집 근처로 와서 만났다. 결국 미국 가는 길을 포기했다.(계속)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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