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그리고 철이 들 무렵부터 이제까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은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흘러가면서 또 다가온다. 탈춤은 내게 학문이나 예술이기 전에 이미 인생이었다.
느지막히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재수할 때부터 품었던 생각대로 탈춤연구회를 조직하였다. 교련반대, 삼선개헌반대, 유신철폐 등 학생시위로 대학휴교령이 잦았던 때라 마침 강의가 드물기도 했다. 강의가 있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았기에 시간이 남아돌아 못다푼 한이라도 있는 듯이 마냥 한껏 탈춤에 빠져들 수 있었다. 가르치시는 보유자 선생님들도 대학동아리로선 처음이어선지 참으로 열정적이셨다. 71년 가을 노란 은행잎이 보료처럼 깔린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정에서 횃불을 밝히고 봉산탈춤을 창립공연으로 올렸다. 대학탈꾼만으로 대학교정을 마당판으로 삼아 뒷풀이까지 곁들여 스러진 옛 탈판의 정경을 재현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동아리 지도교수로서 그동안 지도와 편달을 아끼지 않으셨던 정병욱, 이두현 교수도 대학탈춤, 나아가 대학문화의 가능성과 밝은 전망에 흐뭇해하셨다.
1971년 노오란 은행잎 교정
관제문화, 고급문화, 상업대중문화에 대항하는 새로운 청년문화의 한 대안으로 대학탈춤이 제시되기도 했다. 1969년에 이미 부산대에 전통예술연구회가 생겨나 탈춤을 비롯해 우리 것에 대한 대학가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1971년에 서울대본부에 민속가면극연구회가 등록되고, 73년 이후 이화여대, 서강대, 연세대 등에 탈춤동아리가 생겨나면서부터는 전 대학의 탈춤화라는 열풍이 거세게 일었다. 그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또 거기에 몸을 실리기도 했으니 그땐 세상만사가 온통 탈춤뿐인 듯했다. 그런가 하면 봉산탈춤, 강령탈춤, 은율탈춤, 양주별산대놀이 등의 예능보유자 선생님들이 어여삐 여겨 이들의 정기공연, 초청공연, 순회공연, 민속경연대회에 전수자가 아닌 전수자로서 여러 차례 함께 무대에 서 보는 영광스러움을 맛보기도 했다.
탈춤동아리의 동료 가운데는 당시 대학운동권학생들의 본거지라 할 만한 ‘후진국사회연구회’의 회원들이 많았다. 그 동아리는 도시빈민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학생운동의 총본산이었다. 1970년대 당시 광주대단지사건과 노동자 전태일 분신사건은 학생운동의 향방을 가름짓는 일대 충격적인 사건으로 다가왔다. 낭만적 민족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탈춤운동도 자연스럽게 시각조정을 하게 됐다. 민족의 실체인 민중의 삶의 문제영역 속에서 탈춤을 보게 되고 현장공연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유신 선포와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은 이를 더욱 부추겼다. 역사민속학적 접근의 성과를 결집한 이두현 저 ‘한국가면극’과 함께 ‘민중의식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탈춤의 내용과 양식적 특성을 해석한 조동일 교수의 논문들은 탈춤관계 논의들과 실천행위의 튼튼한 논거점을 제공해 주었다. 이후 탈춤과 민중, 탈춤과 민중문화운동, 탈춤과 민족예술운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관계로서 하나의 개념틀을 이루었다. 미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탈춤을 통해 한국미학, 민중미학, 민족예술론의 기초를 입론하는 일이 지상과제가 아닐 수 없는 터였다.
대학원에 진학하고서도 학업에 전념하기보다는 탈춤활동에 몰두했다. 그리고 민족문예전통의 현대적 재창조라는 다소 거창한 이념을 앞세우고 창작활동에도 관여했다. 이애주, 이종구, 김민기, 임진택, 김석만, 홍석화, 김영동, 장만철 등과 공동작업으로 음악극 ‘소리굿 아구’와 춤극 ‘땅끝’을 무대에 올렸다. 앞의 작품은 기생관광을 소재로 일본의 정치 ․ 경제 ․ 문화적 재침탈 야욕을 드러낸 것이고, 뒤의 것은 외딴 섬을 장악하고 있는 섬주의 처녀공출을 통해 폭압적인 정치 상황을 묘사한 것이었다.
우리들 공동노선의 배후에는 늘 김지하 시인의 역사관, 종교관, 조직론, 실천론, 예술철학 등이 혈과 맥을 잡아 그윽한 형국을 이루고 있었다. 자생적인 생활문예투쟁조직인 두레패연희와 문화선전조로서 전문예인집단인 사당패연희, 민족의 민중적 세계관과 서구 과학체계, 이 둘의 ‘탁차통’(탁월한 차원에서의 통일)이 화두였고, 동학, 민중신학, 주역 이야기는 김지하 설법의 중심내용이었다. 밤과 아침 사이, 어둠과 밝음 사이의 희끄무레한 배움의 길이라는 ‘夢’ 대한 주역적 풀이와 ‘신생철학’은 광대무변한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후천개벽과 같은 것이어서 내게 더할 수 없는 감동과 함께 학문적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70년대 한국지성사의 고난을 상징하듯 김 시인이 재수감으로 우리들 곁을 한동안 떠나게 되면서 우리는 연극, 음악, 춤, 영화 등 자기분야를 찾아 각개약진하게 됐다.
한편, 대학의 탈춤운동을 사회 속으로 확장시키는 연계고리의 하나로서 탈춤반 출신을 중심으로 한국문화연구모임 ‘한두레’가 결성됐다. 한국문화현실의 실천적 대안을 논의하고 당대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업적과 행적을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연구활동이 중심내용이었으나 기실은 범민중생활문화운동을 위한 사회 공동체 형성이 본래의 취지였다.
미학이 견져올린 민중의 혼
탈춤을 지역사회와 민중생활 속에 환원시키는 작업은 도시 외곽지역과 농촌, 공장 등 현장 창작공연 등으로 나타났고, 크리스챤 아카데미라든가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조직을 통해 현장이 확보됐다. 공장의 노동조합 문화패 건설도 빼놓을 수 없는 현장작업이었고, 기독교단체나 사회단체의 모임에도 공연됐다. 지역현장운동에 실천적 관심을 지닌 작가 황석영 선생과의 공동작업은 일을 규모있고 능률적으로 수행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그의 소설 ‘장길산’은 이러한 실천적 성과와 늘 더불어 있는 것이었다. 그의 투철한 작가 정신은 문예활동가의 산 지표이기도 했다.
느슨하기 짝이 없는 대학원 생활은 미학과 조교일을 맡게 되면서, 어느 정도 긴장감을 되찾는 계기를 맞았다. 예술기원론, 미적체험론, 형태심리학을 비롯해 브레히트, 루카치, 크로체, 주역, 민족종교사상, 神氣論 등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밀린 공부거리가 산더미 같이 한꺼번에 닥쳐왔다. 미학이라는 학문이 결코 약소학문이 아닐뿐더러 인문과학의 순수학문으로서 그 독자적 영역이 확보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1969년 철학과로 통폐합돼 생산력없는 학문으로 강제낙인 찍힌 이후 약소학과로서 학문적, 대학행정적으로 부당 대우에 그 서러움이 어지간하지 않았는데 캠퍼스 이전 과정에서 당한 수모는 지금까지 사무친 원한이 되고 있다.
시대적 고통에 동참하고서
그러나 미학과는 어느 학과보다도 먼저 새로 단장한 대학캠퍼스에 새로운 학문세계를 예축하는 고사굿을 거과적으로 치렀다. 그때 그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해 출구없이 꽉 막힌 유신정권의 뒷덜미를 치듯 대학탈춤반이 중심이 돼 농대생 김상진열사 추모행렬굿을 벌인 이른바 ‘오둘둘’ 사건으로 경찰서 출입과 학교출근이 반반쯤이다가 이윽고 남영동을 거쳐 남산까지 갔다온 후 처음 실시된 교수재임용제도가 말단 조교에까지 영향력을 미쳐 짧은 조교생활을 마치게 됐다. 학문생활의 초입에서 좌절당한 아픔보다도 당대 실천하는 지식인이라면 누구라도 겪었던 시대적 고통에 동참하게 되어, 사지멀쩡한 것이 남부끄러웠던 태를 다소나마 씻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고민은 계속 남았다. 학문의 길을 밟을 것인가, 연행예술가의 길을 갈 것인가. 말하자면 선비냐 광대냐인데, 이에 균형감각을 갖도록 알게 모르게 북돋워주신 이는 김윤수 교수와 신경림 시인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갈등은 갈등대로 남아 낮에는 강단에서 학자연하고 밤에는 무대에서 광대연한다. 연구활동으론 석사논문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집단연희의 민중적 미의식 연구를 위한 예비적 고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해 민족미학, 생명론적 미학을 내세우더라도 ‘예비적 고찰’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또 연행활동으론 마당극, 민족극, 민족굿이라하여 창작도 해보고 연출도 해보지만, 민중신명에 불지피는 신통한 광대노릇한번 제대로 못했다. 대립되는 두 항의 “탁차통‘은 내게 과연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접근할 수 없는 두 틈서리에서 어떤 신기로 노닐 것인가.
탈춤이 내게 던져준 과제는 정치적인 것도, 예술적인 것도 그 다음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인생론적인 것이 먼저였다. 곧 민중공동체적 삶과 나는 한 몸일 수 있는 것인가, 이다.
이 글은 1996년 12월 16일 교수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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