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동 개발 사업의 시행사인 화천대유는 잘 알려져 있듯이 주역에서 회사 이름을 따왔다. 주역 64괘 중 14번째 괘인 화천대유(火天大有)는 하늘 위에 불이 놓인 상(象)으로 태양이 만물을 비추는 풍요와 부유함을 상징한다. 화천대유가 엄청난 사업 수익을 올린 것을 보면 풍요와 부유함은 이름에 딱 들어맞는데 왜 이런 큰 말썽이 빚어진 것일까. 이 분야에 조예가 깊은 김두규 우석대 교수한테 물어보았다. "대유괘는 하나의 음효와 다섯 개의 양효로 구성된다. 양은 강함을, 음은 부드러움을 뜻하지만 동시에 양은 반듯함을, 음은 부정함을 뜻하기도 한다. 부정한 음의 소수 세력이 다수 양의 지도자가 돼 부(富)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 할 경우 부는 '원망의 창고'(怨之府)가 된다. 대유괘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낮게 처신하라', '소유의 마음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내용이라 알쏭달쏭 잘 이해는 할 수 없지만 '낮게 처신하고 소유욕에서 자유로워야 하는 괘'라는 설명은 마음에 와닿았다. 탐욕에 가득 찬 마음으로 부동산 개발에 나선 사람들이 분에 넘치는 거창한 이름을 주역에서 따왔으니 사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던 셈이다.
내친김에 대산(大山) 김석진 선생이 쓴 <대산주역강의>를 펼쳐보았다. 김석진 선생은 근세기 주역의 최고 대가로 꼽히는 야산(也山) 이달 선생의 제자로, <대산주역강의>는 전 3권에 모두 19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이다. 그중에서 화천대유 편을 찾아 읽어보았다. 10쪽 정도의 설명을 몇 번씩 읽어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마지막 '총설' 부분은 이 괘의 본뜻이 어디에 있는지 어렴풋이 알려주는 듯했다. 김석진 선생은 스승 야산 선생의 말을 인용해 "내가 소유한 것이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을 잠시 빌린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내 소유가 사회의 소유이며 화합과 평등을 이루는 공동의 대유가 우선이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이 괘를 해설했다. 또 "큰 재산과 명예, 직책 등이 있다 해도 하늘의 뜻에 순종하며 사람에게 신의를 지키지 않으면 그것을 잃게 되고 마는 것"이라는 설명도 말미에 붙여놓았다. 과연 김만배씨 등은 화천대유 괘에 담긴 주역의 이런 깊은 뜻을 헤아리고 회사 이름을 지었을까.
화천대유 때문에 주역이 갑자기 언론에 오르내리더니, 이번에는 국민의힘에서 '주술 선거' '부적 선거' 논란이 불붙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손바닥에 '왕(王)'자를 쓴 채 텔레비전 토론회에 나온 것이 화근이 돼 '부적 선거' 비판이 일자 윤 전 총장 쪽이 홍준표 의원을 향해 "이름을 고친 것이야말로 주술적"이라며 반격에 나서는 등 시끌벅적하다. 여기에 '천공'이라는 분의 '정법 강의' 논란, 항문침 시비 등이 겹치면서 국민의힘 내부의 '주술 선거'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우선 이름 짓기, 이름 바꾸기 등을 놓고 크게 시비를 벌일 일은 아니라고 본다. 평생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자신을 대표하는 것이 이름인데 누가 이름을 함부로 짓겠는가. 예전에는 할아버지 등 집안 어른이 직접 또는 작명가의 도움을 받아 이름을 지어주곤 했는데 아무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동양철학은 삼라만상의 구성요소를 나무·불·흙·쇠·물로 보고 이를 '오행'(五行)이라고 하는데, '성명학'에서는 '오행의 상생'을 중시한다. 목·화·토·금·수 중 그 사람에게 부족한 것을 이름으로 보충한다는 것이 성명학의 골자다. 한자가 가진 원래의 기운을 따지는 '자원오행'을 비롯해 '수리오행' '음령오행' 등을 이름을 짓는 중요한 요소로 여긴다. 그런데 요즘은 순한글 이름을 많이 지으니 이런 성명학도 크게 소용이 닿지 않는 시대가 됐다.
명리학이나 성명학 등에 비하면 손바닥 왕(王)자는 상당히 격이 떨어진다. 이것은 일종의 '부적'에 해당한다. 글씨, 그림, 기호 등을 통해 재앙을 막거나 복을 기원하는 '주술적 도구'가 부적이다. 초자연적 존재의 신비한 힘을 빌려 목적을 이루려는 일종의 방술(方術), 술법(術法)에 해당한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의 뛰어난 국학자인 이능화 선생이 지은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를 보면 '무격(巫覡)의 술법'으로 공창, 신탁, 궤경, 미복, 복명, 접살법, 도인무, 강신술 등과 함께 '부주'(符呪)가 들어 있는데 부적이 부주에 해당한다. 부적을 쓰는 방법과 재료는 수없이 많으나 누런 빛이 도는 종이인 '괴황지'에 붉은색 물감인 '경면주사'로 쓰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직접 몸에 글씨 등을 쓰는 경우는 드무니 손바닥에 쓴 '왕'자는 일종의 '간이 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원래 나약한 존재인 인간이 뭔가 절대적인 힘을 빌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염주, 십자가 목걸이, 벽에 걸어놓은 달마도, 대문에 붙이는 '입춘대길' 글씨 등도 넓은 의미에서 부적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윤 전 총장의 '왕'자도 크게 탓할 일은 못 된다. 다만 다른 문제는 있다. 하나는 '거짓 변명'이고, 둘째는 신비주의에 대한 과도한 심취 여부다.
'왕'자에 대한 윤 전 총장의 해명("같은 아파트 주민인 지지자가 손바닥에 적어준 것을 손 세정제로 지워봤지만 잘 안 지워진 것" 등)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으니 더 길게 언급할 필요도 없을 듯싶다. 그냥 쿨하게 인정하고 넘어가도 될 일을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식 해명으로 논란을 더 키웠다. 관심의 초점은 그가 이런 신비주의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가인데, 상당히 그 방면에 심취해 있다는 징후가 발견된다. '천공 스승'에게 감복해 수시로 만났다는 대목도 그렇다.
천공의 도력(道力)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자기소개' 내용을 보면 약간 황당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수행이 3년 7개월째가 되면서 밤에는 '차원계'(신들의 세상)를 왕래해 신들과 대화했다." "수행에서 의문이 풀리지 않을 때는 곡기 끊기를 수십 회 거듭하면서 70번을 죽었다 살아나기를 되풀이했다" 등등. 며칠 전 한 지인이 "정말 황당한 내용"이라며 '정법 유튜브 강의 동영상'을 하나 보내왔다. <정법강의 4429강 : 애인이 있는 기혼자들>이라는 제목의 강의인데, "결혼해서 남편이 있는데 애인이 생기는 경우들이 많다"는 한 여성의 질문에 천공이 '설법'을 하는 내용이다. 천공은 "필요한 것을 배우자가 충당을 못 해주니까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 우리 관습과 법은 남자는 (외도를) 용인하면서 여자는 안 된다고 한다. 모르게 하라. 그것이 답이다"고 말했다. 물론 끝에 가서는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배우자가 내 곁을 떠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교훈을 덧붙였지만, 전체적인 답변 내용을 들으면서 과연 이런 게 '정법'(正法)인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경회루에서 한복을 입은 여성 수십 명에 둘러싸여 찍은 사진도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 사진을 보니 천공의 순수함이나 신뢰성에 심리적 빨간불이 켜졌다.
지난 3월 천공을 만난 <조선일보> 출신 최보식 기자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윤 전 총장과 천공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가까운 듯하다. 과거 박영수 특검에서 윤 전 총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 관련 수사를 할 때 부인 김건희씨의 소개로 알게 된 뒤 두 사람이 열흘에 한 번쯤은 직접 만난다는 것이 천공의 설명이다. 천공은 "그(윤석열)가 고비 때마다 물으면 답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열흘에 한 번'은 과장이 섞여 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윤 전 총장이 그를 자주 만나 '자문' 을 구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윤 전 총장은 천공의 어느 면이 그렇게 감탄스럽고 존경스러울까?
윤 전 총장뿐 아니라 부인 김건희씨도 '그쪽 방면'에 관심이 지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도 '아바타를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연구'라는 다소 희한한 주제다. 어찌 보면 '부창부수'라고도 할 수 있겠다. 윤 전 총장은 사법시험을 8차례나 낙방하는 과정에서 역술 쪽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이야기는 진위 확인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충분히 상상은 된다. 사법시험에 거듭 고배를 마시면서 앞날에 대한 불안이 엄습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미래 운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런 습관이 지속돼 국가의 중요한 책무를 맡고 나서도 고비마다 '영험한 도인'의 도움을 받겠다는 태도는 조금 곤란하다. 게다가 그가 검찰총장 초기부터 대선에 출마한 현재까지 자신의 행보와 '정치적 앞날' 등을 놓고 '도인'과 긴밀하게 상의해왔다는 대목에 이르면 섬뜩함과 함께 음험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지난 대통령 선거를 되돌아보면 역대 대선이 있을 때마다 정치판에는 온갖 종류의 역술이 횡행하곤 했다. 역술인, 도사, 풍수인, 무당 등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와 각자의 신통력과 예지력을 놓고 불꽃 튀는 경쟁을 벌였다. 대선 후보들의 레이스와는 별도로 '역술 챔피언 경연장'이 펼쳐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경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정도가 심한 것 같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인간의 인지 범위를 넘어서는 영적이고 신비한 세계가 존재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순간순간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정치인들이 그쪽 세계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신비주의에 과도하게 심취하는 것은 위태롭다. 정치인 본인에게도 위험하지만 자칫 '국가적 리스크'가 될 수도 있다. 고려 공민왕 시절의 신돈, 제정 러시아 시대의 라스푸틴, 조선 말기 명성황후의 측근 신령군 등 '주술 정치'의 폐해는 더 이상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의 최순실씨 등이 생생한 실례를 보여줬지 않은가.
<대산주역강의>의 서문을 읽다 보니 이런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올곧은 대안은 바로 근기(根氣)를 기르는 것이다. 선인들의 마음 자리와 그들의 정신을 익혀나갈 때 내부로부터 단단해져오는 기운들이 이 혼탁한 사회와 세계를 깨끗이 정화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야산 이달 선생은 주역은 물론 점, 관상, 풍수 등에도 두루 능통했으나 세상을 뜰 때 유골을 화장하고 봉분도 만들지 말고 한 치의 땅도 남기지 말라고 했다. 올바른 마음 닦기를 통해 근기를 기르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청정한 정신세계를 가꾸는 마음이 아니라 개인의 탐욕과 영달을 위해 삿된 '술법'에 매달리는 것은 극히 경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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