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018년 발표한 공공보건의료 발전종합대책은 그동안 공공의료를 취약지역, 취약계층에게 초점을 맞춘 보완적 역할로부터 모든 국민에 대한 필수적 의료 제공이라는 보편적 역할로 확장한 출발점이었다. 그 이후 2019년은 지역의료, 2020년은 감염병 대응을 키워드로 한 공공보건의료 강화계획을 연이어 발표했다. 아무 시도도 없는 것에 비하면 낫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올해 수립된 제2차 공공보건의료 기본계획에 대한 전문가와 시민사회의 반응은 신랄했다.(☞ 바로가기 : 참여연대 6월 3일 자 '[공동성명] '제2차 공공보건의료 기본계획'은 정부의 공공의료 포기 선언') 정부가 공공의료 강화라는 사람들의 요구 앞에 실질적 변화를 위한 행동이 아닌 '시늉'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었다.(☞ 바로 가기 : '서리풀 논평' 5월 3일 자 ''올드 노멀'을 벗어나지 못하는 공공보건의료')
공공의료 강화를 향한 흐름에는 특히 민간 중심의 의료 인프라에서 소외되고 지역 소멸과 더불어 필수의료마저 위태로워지고 있는 지역의 필요가 큰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연달아 내놓은 공공의료 강화 대책의 비전에 명시된 '누구나 어디서든' 이라는 문구와 주요 성과지표인 '지역 격차 감소'가 이를 반영한다.
하지만 코로나19라는 강력한 동인까지 더해지며 이제는 정말 바뀌려나 싶다가도 좀처럼 속 시원하게 나아가지 못하는 정책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도대체 무슨 장애물 때문에, 또는 어떤 절실함, 역량이나 기술이 부족해서일까 답답해진다. 지역에 공공의료를 확충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고 경제성이 없다는 논리는 지역을 취약하게 만든 과거의 원인이자 지금도 나빠지게 만들고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현재의 원인이다. 한국의 의료접근성이 빠르게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가진 가치의 저울은 바뀐 적이 없는 것 같다.
오늘 소개할 논문은 <환경연구와 공중보건 국제학술지>에 실린 지역에 거주하는 노인의 의료이용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이다.(☞ 바로가기 : "돌봄과 치료를 받을 가치가 없어요" 중국의 시골에서 노인의 의료 이용에 대한 문화적 평가절하와 구조적 제약) 제도와 역사는 다르지만 도시-농촌 간 격차는 중국도 마찬가지여서 지방은 노인인구와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인구 비율이 높고 의료를 비롯한 사회복지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 불평등이 있다.
연구의 배경은 중국 광둥성의 진촌마을이다. 경제적으로 취약하고 지리적으로 고립된 이 마을에는 지역의 일차병원인 50병상 규모의 진촌병원이 있다. 인류학자이자 생명윤리학자인 저자는 이 병원에서 6개월 동안 머물며 20명의 노인(60세 이상) 입원 환자와 돌봄제공자, 10명의 의료진에 대해 참여 관찰, 반구조화, 비구조화 인터뷰를 수행했다. 주로 관찰하고 질문한 내용은 환자들의 건강상태, 과거 건강문제를 해결한 경험, 입원 치료비용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만성질환에 대한 경험, 인식, 치료 찾기, 돌봄을 하고 받은 경험 등에 초점을 두었다.
저자는 병원에 입원한 노인 환자와 가족을 관찰하고 면담했던 전반에서 시골 노인 환자의 의료이용에 대해 '돌봄과 치료의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가치절하 담론을 발견했다. 이 '가치 없음' 담론은 노인의 가족뿐 아니라 의료진에서도 나타나며, 적극적인 의료서비스 추구 행위는 문화적으로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져 많은 노인 환자들이 이를 내재화하며 만성 증상들을 당연한(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견디는 전략을 취하는 모습을 보였다.
양질의 의료기관과 노인의료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진촌병원은 지역의료보험의 보장률도 높아 노인들이 만성질환 문제로 가장 편하게 찾는 지역 병원이었지만 신뢰받는 병원은 아니었다. 환자의 보호자는 이 병원 의사가 가짜 약만 팔고 치료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낮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낫기에는 너무 늙은" 그들의 가족에게는 "충분하다"고 여겼다.
의료진 또한 노인들에 대한 너무 많은 의료적 처치는 "현명하지 못하다"고 설명했다. 대부분의 가족에서 노인은 스스로 의료이용과 치료를 결정할 권력과 자율성을 갖지 못하고 병원 입원을 위한 재정적, 물리적인 부분을 상당 부분 가족에게 의존했기에 스스로의 욕구에 대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단지 결정권이 없을 뿐 아니라 노인은 자기 질병이나 치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단지 의견을 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병원에서 면담한 가족 대부분은 더 좋은 의료서비스로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기보다는 만성적인 증상을 완화하며 재정적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향을 추구했다.
인터뷰를 한 대부분의 노인 환자들은 '가치 없음' 담론을 내재화하고, 만성적인 건강문제가 있더라도 정말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할 때에만 가족에게 병원에 데려가 줄 것을 요청하였고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 같으면 퇴원하겠다고 말했다. "먹고 걸을 수만 있으면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어." 그들은 만성질환을 바로 조절하고 치료해야 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노화의 불가피한 결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심지어는 입원 중 가족의 도움이 필요할 때, 가족의 간병과 돌봄이 소극적이더라도 노인들은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아이들이 여기서 나를 돌보면 돈을 벌지 못하니까요."
연구진은 지역의 노인들이 처한 이러한 현실은 제도적 구조와 지역의 문화적 체계가 상호작용한 결과라고 덧붙인다. 도시에 비해 필요한 의료시설이 부족할 뿐 아니라 사회 연금이나 노인을 지원해 주는 사회복지 자원 또한 부족하다 보니 노인의 의료와 돌봄이 개별 가정의 부담으로 전가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가 노인의 의료이용을 가치절하하는 규범 형성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인프라와 접근성의 차이가 명확한데도 변화가 더딘 데에는 구조적인 제도의 한계, 경제적 우선순위, 정치적 이해관계뿐 아니라 건강과 의료이용의 개인 책임화, 불평등의 자연화·내재화와 같은 미시적 또는 규범적 기제가 얽혀있을 것이다. 아무리 병원이 스마트해지고 교통망이 발달해 30분 생활권을 언급하는 시대가 되었다 한들 지금도 지역에는 여러 이유로 지역 안에서 건강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과 상황들이 많다.(☞ 바로 가기 : 하동주민신문<오하동> 9월 창간준비호 3호 '쉽고도 어려운, 가깝고도 먼 하동에서 병원가는 길')
필요 인식의 불평등은 지역 간 의료이용의 불평등에서 좀처럼 이야기되지 않는 부분이다. 우리 또한 지역에 산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의 불리함을 감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제대로 돌보지 않는 가족에게는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하며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사회에는 다른 기준이 주어져야 한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이라면 정당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할 안전망에 대한 마땅한 책무이자 구조적으로 불리한 집단이 개선할 수 있는 상황에 방치되지 않도록 해야 할 형평성에 대한 것이다. 이용 가능한 인프라의 양과 질이 다른데 같은 전 국민 건강보험 아래 동일한 보험료가 정당하냐라든가 '누구나 어디서든' 이용 가능한 필수의료의 범위가 어디까지냐 하는 이야기로 치환할 수 없는, 이것은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가치의 문제이다.
* 서지정보
- Zou X, Fitzgerald R, Nie J-B. "Unworthy of Care and Treatment": Cultural Devaluation and Structural Constraints to Healthcare-Seeking for Older People in Rural China. International Journal of Environmental Research and Public Health. 2020; 17(6):2132. https://doi.org/10.3390/ijerph1706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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