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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미국은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수 있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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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미국은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전쟁국가 미국] 1차 아프간전쟁(1979-89) : 미국 대중동전쟁의 시작 (상)

2001년 9.11테러는 아무런 연유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자행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9.11테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기원과 배경과 진행 과정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9.11테러의 출발점인 1979년 12월 25일 소련군의 아프간 파병, 그리고 이에 대한 미국의 강경 대응에도 나름대로의 연유와 속셈이 있었다.

간단히 말해 소련이 아프간에 군대를 보낸 것은 자신의 세력권이자 남쪽 국경을 접한 아프간이 친소 사회주의 집권세력에 대한 이슬람주의 반군의 저항으로 극도로 혼란해지자 이를 평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련 지도부는 카불 점령을 1968년 체코의 자유화 개혁에(프라하의 봄) 대해 군대를 보내 진압했던 것과 같은 자위적 조치로 간주했던 것 같다. 당시 소련의 무력 진압은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을 불러일으켰으나 미국은 이에 직접 대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79년 카터 행정부는 소련의 아프간 파병이 주권국가에 대한 ‘침공’이며 나아가 세계 에너지 자원의 보고인 걸프지역을 무력 점령하려는, 즉 이란과 사우디 등을 정복하려는 시도라면서 즉각 군사 대응에 나섰다. 미국은 이집트, 사우디, 파키스탄 등 이슬람 국가들은 물론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등 우방국과 중국까지 포함된 거대한 반소 연합전선을 결성해 소련을 패망에 이르게 한 아프간전쟁의 덫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한마디로 소련의 아프간 파병은 자신의 붕괴를 초래한 역사적 오판이자 치명적 실수였다.

인접 국가의 정세를 안정시켜 자국의 안보를 지키겠다는 소련의 파병을 미국은 왜 걸프지역에 대한 군사 정복 시도로 규정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미국은 이미 1978년부터 이슬람주의 세력을 앞세워 소련에 타격을 가한다는 속셈을 갖고 있었고 소련은 이 덫에 걸려든 것이다. 아프간 사태에 대한 미국의 군사대응은 1979년 12월 소련의 ‘침공 이후’라는 것이 미국의 공식 입장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미국의 아프간 비밀전쟁을 주도한 브레진스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북아프리카에서 남아시아에 걸쳐 있는 이슬람주의 세력이 소련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면서(아프간 북쪽 소련의 중앙아시아 지역은 이슬람 주민이 다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78년 말 경부터 나는 '위기의 호(弧)' 테제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중동지역에 대한 미국의 힘과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안보 프레임워크'가 필요했다."

그는 또 카터 대통령에게 (1979년 1월) 이란혁명으로 소련의 군사 공격에 대한 걸프지역의 방어막이 무너졌고, 따라서 이제 대안은 '아프간 자유의 전사'들을 지원함으로써 소련을 아프간에 묶어 놓는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미 1973년부터 이슬람세력을 지원했던 미 중앙정보국(CIA)은 아프간 정부가 통제력을 잃기 시작한 1979년 3월 이후 아프간 반군에 대한 비밀 지원을 강화했다. 소련의 아프간 파병이 미국의 군사 개입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비밀 개입이 소련의 파병을 이끌어낸 셈이다.

1995년 9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는 ‘아프가니스탄과 냉전의 붕괴’를 주제로 아프간전쟁 당시 미국과 러시아의 고위 정책결정자 즉 외교관, 군인, 정보기관 담당자들이 회의를 가졌다. 미 브라운대 왓슨연구소가 조직한 이 회의는 소련의 아프간 파병과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 그 정책결정 과정을 검토하는 4번째이자 마지막 회담이었다.

미국 측에서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과 스탠스필드 터너 CIA 국장, 윌리엄 오덤 국가안보회의(NSC) 소련 담당 국장, 마셜 슐만 국무장관 특별보좌역 등이, 러시아 측에서는 아나톨리 도브리닌 당시 주미 대사와 아프간 주둔 소련군 사령관을 역임한 발렌틴 바레니코프 국방 차관 등이 참여했다.

이 회의를 통해 당시 미국 내에서 아프간 사태 대응 방향에 대해 이견이 있었다는 것, 소련 측은 심각한 안보 불안에 직면했다는 실상이 드러났다.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 대신 참석한 슐만 특별보좌역은 당시 국무부는 국방부와 브레진스키 등 NSC의 강경 대응 방침에 반대했다고 밝혔다. 브레진스키 등은 소련의 아프간 파병이 걸프지역의 석유자원을 노린 것으로 미국에 대한 전략적 위협이며 따라서 강력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소련과의 데탕트를 추구했던 밴스 국무장관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카터 행정부 당시 비둘기파 밴스 장관과 매파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은 사사건건 대립한 것으로 유명했으나 결국 최종 승자는 브레진스키였다.

다음은 브레진스키 수하였던 오덤 장군의 발언.

"당신들은 이미 앙골라와 에티오피아, 남예멘을 장악했습니다(소련은 1970년대 후반 북한과 쿠바 병사들을 동원해 이들 국가의 민족해방투쟁을 지원했다). 그리고 이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소련이 샤(팔레비 국왕. 1979년 1월 이슬람혁명으로 해외 망명) 몰락의 배후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이 일련의 사건들은 이 지역에서 소련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들은 아프간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이는 당신네 군대가 걸프지역 내 미국의 핵심적 이익을 강력하게 타격할 능력을 갖게 됐음을 의미합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당신들은 아프간에 군대를 보내면서 걸프 지역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소련이 아프간 침공의 여세를 몰아 이란, 사우디 등에 대한 군사 정복까지도 노렸다는 주장이다. 이른바 '오덤-브레진스키 테제'다.

이 발언에 대해 도브리닌 전 주미 대사와 파병 당시 소련 정보국 KGB의 카불 지국장이었던 레오니드 세바르신 등은 강력 반발했다. 특히 아프간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바레니코프 장군은 오덤-브레진스키 테제는 '냉전 편집증(Cold war Paranoia)'이라고 비판하면서 당시 소련은 이 지역에서 "동네북 신세"였다고 털어놓았다. 미국과 그 동맹국인 사우디, 이집트, 파키스탄 등의 협공으로 심각한 안보 불안을 겪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바레니코프 장군의 발언.

"미국은 오랫동안 이란을 지배했잖소. 미 해군은 인도양을 통제하고 있고. 우리 솔직히 말합시다. 파키스탄은 워싱턴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있었죠.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파키스탄은 아프간 동쪽, 이란은 서쪽의 인접국). 그래서 파키스탄은 이미 소련군 파병 이전부터 우리가 지원했던 아프간 공산정부, 즉 아민 및 타라키 정부에 반대하는 이슬람 게릴라들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대주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따라서 소련 안보에 대한 위협은 아프간‘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지역에 대해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바레니코프에 따르면 1979년 당시 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이란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이란을 침공해 호메이니를 축출할 것이며 이후는 아프간도 공격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만일 아프간이 미국과 파키스탄의 공격에 무너진다면 미국은 아프간에 단거리 미사일을 배치해 카자흐스탄의 ICBM 등 소련의 전략미사일 기지를 위협할 것으로 봤다. 이 때문에 1979년 가을 바레니코프 장군은 이란과 인접한 투르크메니스탄에 머물면서 미국의 이란 침공에 대비했다고 한다.

그는 아프간은 "우리의 세력권"이고 "우리 국경이지, 당신네 국경이 아니다"면서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프간 파병이라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어째서 우리가 카불 정권의 붕괴를 결코 원치 않았는지를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레니코프가 아프간 파병을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말한 이유는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뇌부가 파병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12월 12일 브레즈네프 총서기는 그로미코 국가주석, 코시긴 총리, 안드로포프 KGB 국장, 우스티노프 국방장관 등 일부 정치국원들과 약식회의를 통해 12월 25일 오후 3시부터 작전 개시, 12월 27일 완료 예정의 파병 계획을 승인했다. 단 사흘로 예정됐던 파병은 예상치 못한 미국의 강력한 대응으로 10년으로 늘어났다.

아프간의 혼란이 소련 안보에 미치는 위협에 대한 소련 수뇌부의 불안은 그로미코의 비밀서한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1989년 사망 직전 아프간 파병 결정의 배경을 정치국에 설명하는 서한을 아들 아나톨리에 구술시켰는데 이 서한은 1997년 공개됐다.

이 서한에서 그는 아프간 파병의 객관적 이유로 "소련 남부 국경의 안정을 저해하고 소련 안보에 위협을 조성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꼽으면서 이란 혁명의 결과 "미국인들은 이란에 있던 반소 군사기지를 파키스탄, 또는 가능하면 아프간에 옮기려 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대소 아프간 비밀전쟁의 주창자인 브레진스키는 1998년 1월 프랑스 언론 <누벨 옵서바튀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아프간 개입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후'라는 이제까지의 공식 입장과는 다른 전쟁의 실상을 밝혔다.

아프간 반군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소련의 파병 6개월 전 이미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진실 하나는 1979년 7월 3일, 카터 대통령이 아프간 반군에 대한 비밀 지원을 승인하는 최초의 문서에 승인했다는 것"이라면서 "나는 이 원조가 소련의 군사 개입을 초래할 것이라고 대통령에 설명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기자가 놀란 표정을 짓자 브레진스키는 소련에 대해 전쟁을 도발한 것은 아니며 "러시아에게 군사개입 하라고 등 떠민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할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높인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어 그는 "이 비밀작전은 뛰어난 아이디어였다. 그 결과 소련의 '아프간이라는 덫'에 걸려들었다. 당신은 내가 후회하기를 바라는가?"라고 반문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 ⓒ AFP연합뉴스

소련 군대가 아프간 국경 안에 들어온 1979년 12월 23일, 브레진스키는 카터에게 "이제 우리는 소련에게 그들의 베트남전쟁을 선사할 수 있게 됐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는 소련 체제는 10년 전쟁을 "감당할 수 없게" 됐고 "결국 소련제국의 붕괴"를 초래했다고 말했다. 소련을 '베트남전과 같은 수렁'에 끌어넣는다는 발상은 1979년 3월 백악관에서 열린 아프간 대책회의에서 국방부의 한 중간 관리가 제안한 것이다.

그는 미국이 아프간 비밀전쟁을 통해 과격파 이슬람주의자들을 지원하고 미래의 테러리스트들을 양성한 데 대해 후회가 없느냐는 질문에 대해 "세계사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가? 탈레반인가, 소련제국의 멸망인가? 과도하게 흥분해 날뛰는 소수 이슬람주의자들인가? 아니면 중부유럽의 해방과 냉전의 종식인가?"라고 반문했다.

브레진스키 주장의 핵심은 자신이 소련 붕괴의 설계자이며 탁월한 전략가라는 자화자찬이었다. 몰락한 폴란드 귀족의 후손으로 조국의 철천지원수 소련을 무너뜨린 데 대한 자부심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난 40여년간 전쟁의 참화를 겪은 아프간 등 대중동지역의 주민들도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브레진스키는 소련군의 카불 점령 다음 날인 12월 26일, 대통령 보고에서 소련의 군사 행동을 방관할 경우 "소련은 곧장 아라비아만과 오만만까지 진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자신이 유도한 소련의 파병으로 아프간은 "중립적 완충지대에서 공격을 위한 교두보"로 전환됐으며, 아프간 장악 후의 다음 행보는 "파키스탄과 이란의 해체"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카터 대통령은 1980년 1월 20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련의 아프간 파병은 "전례 없는 행동"이며 "2차 대전 이후 세계 평화에 대한 가장 중대한 위협", 즉 베를린 봉쇄나 한국전쟁, 쿠바 미사일 위기보다도 위협적인 군사행동으로 규정하면서 브레진스키의 현실 인식에 전폭 동조했다. 그리고 사흘 후 카터독트린을 발표함으로써 이후 40여년에 이르는 대중동 군사 개입의 문을 열었다.

아프간전쟁은 우선 미소 데탕트(1969-79년)를 끝장냈다. 베트남전쟁의 패배에 직면한 미국은 1972년 소련과 전략무기제한협정(SALT1)을 맺은 데 이어 1979년 6월 비엔나에서 카터와 브레즈네프가 전략무기감축협정(SALT2)에 서명했으나 아프간전쟁으로 인해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나아가 한국과 베트남 등 30년간의 동아시아전쟁 시대(1945-1975년) 이후 평화로 복귀했던 미국은 중동 지역에 대한 새로운 군사 개입에 돌입했다. 대중동전쟁은 동아시아전쟁보다 더 길고 참혹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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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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