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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美CIA 역사상 최대 비밀공작으로 시작해 '역풍'으로 끝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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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美CIA 역사상 최대 비밀공작으로 시작해 '역풍'으로 끝나다

[전쟁국가 미국] 대중동전쟁 1979-2021

2019년 11월 이후 중단됐던 <전쟁국가 미국> 연재를 재개합니다. 우선 9.11테러 20주년을 맞아 1979년 이후 42년간 지속됐던 미국의 대중동전쟁에 대해 알아봅니다. (필자)

2차 아프간전쟁 종료가 의미하는 것

지난 8월 30일 아프간 주둔 미군이 철수를 완료함으로써 2001년 9.11테러 이후 시작된 2차 아프간전쟁이 공식 종료됐다. 다음 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아프간전쟁 종료의 의미에 대해 “다른 나라들을 재건하려는 중대한 군사작전시대의 종료”라고 설명했다. 군사력으로 다른 나라들에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이식하려는 노력을 더는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미국이 아프간 철수를 단행한 것은 2016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드러난 중하층 국민들의 현 체제에 대한 반감, 그리고 점점 커져가는 중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9.11테러 이후 2차 아프간전쟁 및 이라크전쟁 등을 통해 대중동지역 전체에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 2001년 10월 미국의 침공 이후 두 달 만에 권좌에서 쫓겨났던 탈레반의 정권 탈환은 미국의 20년 군사 개입이 헛수고였음을 웅변한다.

현재 미국에서는 친미 카불 정권의 조기 붕괴와 철수 당시의 혼란, 그리고 이슬람세력의 폭탄 테러 등을 이유로 바이든 대통령 책임론이 거세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정치인과 언론들은 9.11테러 이후 시기에만 초점을 맞춰 중동 사태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즉 9.11테러는 아무 잘못이 없는 미국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난데없는 공격이었고, 이를 예방하기 위한 미국의 20년 노력(테러와의 전쟁)이 실패했다는 식이다.

1차 아프간전쟁과 9.11테러

하지만 이는 일종의 ‘역사적 기억상실증’이다. 왜냐하면 9.11테러범은 바로 미국 자신이 키워낸 무장 세력이기 때문이다. 테러범 19명 중 15명이 미국의 최대 우방인 사우디 출신이다. 미국은 1979년 12월 25일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계기로 전 세계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끌어모아 돈을 대고, 무기를 주고, 훈련을 시켜 소련과의 전쟁에 나서게 했다. 1차 아프간전쟁(1979-89년)이다. ‘소련의 베트남전쟁’이었던 이 전쟁에서 소련은 패배했고(1989년 2월 철수),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1차 아프간전쟁은 미 중앙정보국(CIA)이 주도한 비밀전쟁이자 대리전쟁이었다. CIA 역사상 최대의 비밀공작(Covert Action)으로 불리는 이 전쟁으로 미국은 소련의 붕괴라는 역사적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냉전 승리 이후 10만~15만 명으로 추산되는 무슬림 전사들을 방치함으로써 9.11테러, 그리고 대중동지역 전체의 혼란을 초래했다. 10년간의 전투로 단련된 무슬림전사들은 1990년대 이후 보스니아, 코소보, 체첸, 리비아, 시리아, 예멘 내전 등에 참여했다. 또한 미국에도 테러를 가했으며 그 정점이 9.11테러였다.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 소행이었다.

다른 한편 아프간에서는 파키스탄 정보국(ISI)이 양성한 탈레반이라는 무장집단이 1994년 혜성같이 등장해 1996년 9월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탈레반이 지배하는 아프간은 알카에다 등 이슬람 무장세력의 은신처 역할을 했다. CIA의 비밀공작이 알카에다를 비롯한 이슬람 무장세력의 발호, 탈레반과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정권의 등장이라는 역풍(Blowback)을 초래한 것이다. 이러한 실상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9.11테러 이후이다. CIA 주도의 비밀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 부시 행정부는 9.11테러를 계기로 테러 퇴치가 아니라 대중동지역 전체를 민주화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했다. 2003년 3월 이슬람세력과는 적대관계인 이라크를 침공함으로써 군사 개입의 판을 키운 것이다. 당초 계획은 이라크 평정에 이어 이란까지 굴복시킴으로써 대중동지역 전체를 미국의 영향권 아래 편입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야망은 이미 2004년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고, 결국 미군은 2011년 말 이라크에서 철수했다. 이후 오바마 행정부는 아프간만은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당초 2015년 예정이었던 철수 계획을 연기했으나, 결국 트럼프 행정부가 2020년 2월 탈레반 측과 평화협정에 합의했고, 바이든 행정부 들어 철수를 완료했다.

미국의 대중동전쟁은 2001년 9.11테러 이후가 아니라 1979년 12월에 시작됐다. 1980년대는 미국과 이슬람 세력의 전폭적인 공조로 소련을 패퇴시켰고, 1990년대는 양자 간의 협조와 대결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2001년 9.11테러를 계기로 이슬람 무장세력의 반미 실체가 드러났으나 부시 행정부가 테러세력 퇴치보다는 대중동지역의 패권 장악을 위한 이라크전쟁을 시도했다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즉 9.11테러는 대중동전쟁의 출발점이 아니라 전환점이었을 뿐이다. 미국의 대중동전쟁은 1979년 시작돼 2021년 끝난 것이다.

미군이 중동지역에 올인 한 이유, 석유

그렇다면 대중동전쟁은 어떻게 시작됐으며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미국의 군사역사가 앤드류 바세비치에 따르면 1945-80년 중동지역에서는 단 한 명의 미군 전사자도 나오지 않은 반면, 1990년 이후 미군 전사자는 오로지 중동지역에서만 나왔다. 즉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난 이후 1980년대부터는 중동이 미 군사행동의 핵심 무대가 됐다는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미국 냉전 전략의 핵심은 봉쇄였다. 주요 봉쇄 지점은 서유럽, 동아시아, 중동 등 세 곳이었다. 이중 서유럽은 아무런 무력 충돌 없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냉전이 종식됐다. 동아시아에서는 30년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이 벌어졌으나 베트남전쟁 패전 이후 미국이 중국과 화해하고 소련과는 데탕트로 군사긴장을 완화함으로써 1975년 이후 일정한 평화가 정착됐다. 미국은 서유럽과 동아시아에는 미군을 주둔시킨 반면 중동지역에는 군사력이 없었다. 이 지역의 군사적 안정은 1차 대전 이후 이 지역을 지배했던 영국에게 맡겼다. 그런데 1971년 영국이 재정난을 이유로 군사력을 철수하면서 중동지역에 군사적 공백이 발생했다.

1972년 5월 닉슨은 이란을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군사적 대리인으로 지명하고 첨단무기들을 제한 없이 판매했다. 1차 석유파동 후 1974년 6월에는 미국과 사우디가 석유 대금 결제는 미 달러로만 하며 사우디는 석유 판매대금으로 미국의 무기를 구매한다는 비밀협정을 맺었다. 1971년 8월 금태환 정지 이후 늘어나는 미국의 무역적자를 메우고 달러의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두 개의 기둥(Twin Pillar)'으로 불리는 미국의 대중동정책이 완성됐다. 즉 석유의 안정적 공급과 달러화 가치 안정은 사우디와의 비밀협정으로, 중동지역의 군사적 안정은 이란에 맡긴 것이다. 미국에게는 사우디와 이란이 두 개의 든든한 기둥이었던 셈이다.

이란혁명과 아프간 침공

그런데 1979년 중동지역의 안정을 뒤흔드는 두 개의 대사건이 벌어진다. 1979년 1월 이란의 민주화 시위로 팔레비 국왕이 해외로 망명했고, 12월 25일에는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한 것이다. 이 두 사건의 배후에는 1970년대부터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있었다. 팔레비 국왕의 망명 이후 이란에는 자유주의적 혁명정부가 수립됐으나 11월 4일 테헤란 미 대사관 점거 및 인질사태를 계기로 호메이니의 이슬람 세력에게 실권이 넘어간다.

한편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1978년 4월 공산혁명 이후 과격한 개혁조치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공산당 정부와 이에 저항하는 이슬람 세력 간의 대립으로 불안해진 아프간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방어적 조치였다. 이슬람 세력의 저항으로 아프간이 불안해지면 소련 내 이슬람지역인 중앙아시아도 불안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 지도부의 침공 결정은 소련의 존망을 가르는 치명적 실수였다. 미국의 과잉 대응, 1차 아프간전쟁을 초래한 것이다. 브레진스키를 필두로 하는 미국의 냉전세력은 소련의 군사행동을 방어적이 아니라 이란과 사우디 등 주요 산유국들을 무력 점령하기 위한 공세적 행동으로 판단하고 적극 대응에 나섰다.

1980년 1월 23일 카터 대통령은 ‘중동지역은 미국의 핵심 국익이 걸린 지역이며 이 지역에 대한 어떤 침략도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격퇴할 것’이라는 요지의 카터 독트린을 발표했다. 중동지역의 군사적 방어를 위한 신속기동군 창설도 지시했다(1983년 중부사령부로 개편). 이로써 중동지역은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미군의 직접 군사행동 지역이 됐다. 또한 1970년대 이후 지속됐던 소련과의 데탕트에 확실한 종지부를 찍게 됐다. 2차 미·소 냉전이 본격화된 것이다.

당시 미국은 우방국들과 함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전면 거부하는 등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강력 반발했다. 당시 미국인들의 세계인식으로는 그럴 만도 했다. 우선 사우디는 서독이나 일본에 맞먹는 최대 우방국이었다. 석유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 최초로 석유를 발견했고 1930년대까지 최대 산유국이었지만 1950년대부터는 석유를 수입해야만 했다. 해외 석유 의존도가 1969년 20%, 1972년 28%에서 1977년에는 무려 47%였다. 대부분이 사우디에서 들어왔다.

특히 1945년 2월 루스벨트 대통령과 사우디 국왕은 정상회담을 통해 ‘석유와 안보의 교환’을 약속했다. 미국은 사우디 왕정을 지켜주는 대신 사우디는 미국에 대한 석유의 안정적 공급을 다짐한 것이다. 미국은 소련이 실제로 중동지역을 군사 점령할 의도와 능력이 있는지는 따져보지도 않은 채 강력 대응에 나섰다. 9.11테러 직후 미국의 에너지전문가 마이클 클레어가 ‘9.11테러의 출발점은 1945년 루스벨트-사우드 회동’이라고 지적한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슬람세력을 냉전 수행의 주요 동맹세력으로 활용해 왔다는 것이다. 이는 영국의 대외정책에서 배운 것으로 영국은 1920년대 최초의 이슬람주의 조직인 무슬림형제단이 설립된 이후 사회주의나 민족주의 등 진보 세력을 억압하는 데 이슬람주의 세력을 활용해 왔다. 미국 또한 신을 부정하는 소련과의 대결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믿어 왔다. 이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세계무슬림연맹 사무총장을 접견하는 등 1950년대부터 이슬람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런 배경에서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미국이 42년간의 대중동전쟁에 뛰어들게 하는 기폭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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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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