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월호는 안 되는 거죠?"
친구가 이 말을 남기고 제주를 떠나 청와대로 향했다. 나는 제주제2공항 건설을 막으려는 시민들의 모임인 제주도청앞 천막촌 활동을 하며 그를 가까이서 알게 되었다. 작년 천막촌 사람들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광장이 되는 시간>을 펴내며 '승리의 시간대'라는 절에 이렇게 적었다.
700일에 다가가는 날들 동안 ‘이길 수 있지 않을까’를 희망하며 아침마다 제주도청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던 ‘그’가 지금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으로 가서 단식자 곁을 지키는 나의 친구 황용운이다. 그는 세월호 참사를 겪고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세월호의 목적지였던 제주로 와서 희생자를 추도하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기억공간 re:born’을 열었다. 그런 그가 “지금이 세월호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다”라는 절박감에 다시 서울로 향했다.
두 가지 3년
대체 왜일까. 왜 지금 시점에 세월호 생존자가 청와대 앞에서 단식하고, 나의 친구는 그의 곁으로 갔을까. 지금, 돌아보아야 할 두 가지 3년이 있다.
앞의 3년 : 2014년 4월 이후 촛불광장을 거쳐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등장했다.
뒤의 3년 :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등장 이후 2020년 11월 세월호 생존자가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하고 있다.
어느 쪽 3년이 더욱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을까. 앞의 3년이 절망과 희망의 과정이었다면, 뒤의 3년은 뭐라 불러야 할까.
앞의 3년 동안 우리는 이 말을 자주 들었다. “대한민국은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 ‘세월호 이후’의 시간대에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정권교체가 일어났다. 그런데 뒤의 3년에 대해 세월호를 주어로 두고 이런 물음을 꺼내보자. ‘세월호 문제는 문재인 정부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얼마나 달라졌는가.’
분명 변화는 있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여러 검찰 수사와 재판이 진행 중이고 ‘사회적참사 진상규명 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가 출범해 활동 중이다. 관련 소식을 간간이 언론에서 접하며 시간이 진상 규명을 향해 흘러가고 있겠거니 막연히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조사할 계획이다”, “조사 중이다”라는 말은 종종 들려왔지만 그래서 무언가가 “드디어 밝혀졌다”는 소식은 아직 접하지 못했다.
사실 앞의 3년만이 아니라 뒤의 3년 동안도 세월호는 정치권과 언론에서 수시로 회자되었다. 다만 그때 세월호는 진상 규명의 과제가 아닌 정쟁거리였다. 야당은 문재인 정부를 비방하기 위해 ‘강원 산불 5시간’, ‘서해 피격 10시간’, ‘월북공무원 사살 47시간’을 운운하며 세월호 7시간을 번번이 소환했다. 최근에는 야당 측 공수처장 후보 추천위원이 세월호 참사 진상조사를 방해한 전력이 있는 변호사라서 논란이었다.
세월호 문제는 정쟁거리로서 줄곧 언급되고 있지만, 정작 세월호의 진상은 제대로 드러난 게 없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특조위, 선체조사위, 사참위라는 세 번의 위원회, 두 번의 감사원 감사, 거기에 수많은 검찰 조사가 있었지만 세월호가 침몰한 자리에는 여전히 항로변경설, 암초충돌설, 구조결함설, 내부폭발설 등 갖가지 설이 떠다니고 있다.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채 304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법적 책임을 물어 처벌된 자는 세월호 선장과 선원, 그리고 이들만을 구조한 해경123정 김경일 경장뿐이다.
답을 구하지 못한 물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진상은 무엇이고, 아직 추궁하지 못한 범죄는 무엇인가. 크게는 ‘왜 침몰했는가’와 ‘왜 구조하지 못했는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왜 침몰했는가’와 관련해서는 이명박 정부 때 선박 규제가 완화되었고, 선사가 세월호를 개조했고, 해수부는 안전관리와 감시감독에 소홀했고, 선주는 세월호에서 평형수를 빼냈고, 대신 제주해군기지로 보내는 철근을 잔뜩 싣고서 운항했다는 점 등을 짚을 수 있다.
‘왜 구조하지 못했는가’와 관련해서는 판단을 그르치고 “가만히 있으라”고 선내 방송을 내보내고 도망친 선장, 무책임하고 무능했던 해경, 컨트롤 타워 역할을 못한 당시 정부 등이 응당 조사받고 책임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 이후 6년 넘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촛불정부가 들어선지 3년 넘는 시간을 보냈는데도 ‘왜 침몰했는가’와 ‘왜 구조하지 못했는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답을 구하지 못했다. 그사이 2019년 4월 15일에는 세월호 참사 관련 공소시효 5년에 해당하는 범죄들의 공소시효가 지나갔다. 내년 4월 15일이 되면 공소시효 7년에 해당하는 업무상과실치사상죄와 직권남용 등의 범죄도 공소시효가 끝난다. 304명이 희생당했는데 그 누구도 처벌할 수 없게 된다.
또 한 가지 의식해야 할 시기가 있다. 올해 12월 10일이면 사참위의 조사기간이 종료되고 이후 보고서 작성기간 3개월이 지나면 사참위의 활동 자체가 끝난다. 그리되면 ‘왜 침몰했느가’와 ‘왜 구조하지 못했는가’는 영구미제로 남게 될 것인가. 그리하여 4.16가족협의회는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 개정’, ‘4.16세월호 참사 관련 박근혜 전 대통령 기록물 공개’의 국회청원을 진행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간담회, 캠페인, 문화제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청와대 앞 연좌농성을 통해 국정원과 군을 비롯한 정부기관이 조사에 협조하고 자료 제출 요구 등에 불응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왜 단식하는가
그런데 왜 세월호 생존자 김성묵은 단식을 시작해 20일 넘게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는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목소리를 들으러, 그리고 그의 곁을 지키는 나의 친구를 만나러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김성묵과 함께 단식하는 김태령도 있었다.
찾아간 날은 10월 30일이었고, 단식 21일차였다. 김성묵은 청와대의 실효성 있는 반응을 얻어낼 때까지 자신이 버티지 못할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이제는 단식일이 30일로 접어들고 밤에는 서리가 내릴 것이다. 그들은 단식할 뿐 아니라 노숙하고 있었다. 청와대 앞의 광장이라서 천막을 세울 수 없다. 바람막이도 없다. 밤이 되면 옷을 껴입고 길 위에서 버틴다. 배고픔과 추위를 이겨내는 수 백 번의 1분들을 보낸 끝에 아침 햇살을 맞이할 것이다.
21일차의 단식자에게 많은 질문을 할 작정은 아니었다.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여쭐 생각이었다. 하지만 말문을 연 김성묵은 말씀을 이어갔고, 나는 소중한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녹음기를 켰다. 다음은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간추린 내용이다.
그리고 힘주어 말했다.
단식자가 무리하며 길게 발언해서 걱정되었다. 하지만 도중에 말씀을 끊을 수 없었다. 그때 한 시민이 찾아와 대화가 중단되었다. 그 시민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대통령선거 유세 때 “세월호 진실, 끝까지 규명하겠습니다. 국정농단 세력을 제압할 힘을 저 문재인에게 주십시오”라고 발언하던 사진을 크게 출력해와 그 자리에서 피켓을 만들었다.
우리는 세월호 이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청와대 앞 단식장에 오기 전까지 나는 막연히 ‘세월호 이후’를 살아간다고 여기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세월호 이후’에서 현재 진행중인 ‘세월호 사태’로 돌아온 것 같았다.
세월호 문제는 벌써 오래 전에 현안에서 밀려났다. 한동안은 정서를 환기하는 세월호 참사, 배후를 떠올리게 하는 세월호 학살이라는 표현도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사태도 아니고 사건이라며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만든 채 과거 속에 박제해두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무참한 죽음들을 나는 아직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 대체 그 많은 사람들이 왜 죽었는지, 왜 한 사람도 구조하지 못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상기해보면, 사태 초기에 우리가 ‘세월호 문제’라고 할 때 그것은 세월호에서 일어났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모순이 세월호 사태를 통해 드러난 문제를 뜻했다. 세월호는 많은 생명을 앗아간 거대한 참극이자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이 초래한 사회적 타살이었다. 국가는 안전을 위한 규제를 완화시켰고, 선주는 배의 복원력을 위한 평형수를 빼냈다. “세월호 문제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병폐와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대한민국은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라던 지난 말들은 대한민국이 곧 세월호임을 뜻했다.
기억해보면, 세월호 사태는 정말이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놓은 듯했다. 구조과정에서 철저히 무능했던 공권력, 이해관계로 얽히고설킨 관료집단,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보수언론, 노동 비정규직화와 위험사회의 일상화, 승자독식과 각자도생의 사회논리, 공공성을 저버린 국가. 그런데 이것들이 다 튀어나오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붙잡았던가. 이 사회는 단 한 번이라도 그 병폐와 모순이란 것을 끝까지 응시할 수 없는가. 희생을 끝간데까지 새겨 진정한 세월호 이후를 열어낼 수 없는가. 세월호에서 그걸 해내지 못한다면, 대체 얼마나 더한 재난과 희생을 기다려야 그 과제에 나설 수 있단 말인가. 그 적나라한 병폐와 모순을 겪고 그로부터 무엇을 얻었기에 한국사회는 지금 세월호 이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세월호의 진상이 지금 규명되지 않는다면
과거사. 김성묵의 말에서 과거사는 의혹이 남겨진 채 현안에서 지워지고 만 사건을 뜻했다. 실제로 그렇다. 우리는 지금 세월호 이후에 있는 것 같지만, 우리가 세월호 이후를 개척해낸 것이 아니라 세월호가 우리에게 과거지사가 되었을 뿐이다.
만일 문재인 정부 동안 진상이 규명되지 않아 그의 말대로 과거사가 된다면 미래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단적으로 말해, 한때 참사니 학살이니 떠들썩했지만 결국 처벌받은 사람은 몇 명 되지도 않는 미제사건이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세월호 문제가 과도하게 부풀려져 정권을 빼앗겼다고 여기는 수구세력은 두고두고 공세를 벌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싸움, 촛불광장마저 음모론의 재물이 되고 지겨운 정쟁, 혐오의 언설이 반복되고 또 반복될 것이다. 세월호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자들은 “이제 지겹다”는 조롱에 시달릴 것이다. 세월호가 그런 식으로 운운될 때마다 우리의 인간성과 윤리성과 사회성은 조금씩 부패할 것이다.
한편 세월호의 진상 규명을 바래온 시민들은 크나큰 좌절을 겪을 것이다. “세월호마저 결국 그리되더라”라는 서사와 기억은 미래의 정치와 사회에 얼마나 해롭게 작용할 것인가. 나의 친구는 “왜 세월호는 안 되는 거죠”라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에 많은 걸 걸고 있기에 “세월호는”이라 느끼고 있다. 사실 사회적 타살과 의문 있는 죽음은 세월호 참사 말고도 많으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만일 세월호‘마저’ 그리된다면 그의 절규처럼 “왜 ○○○는 안 되는 거죠”라고 절규해야 할 일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다. 과거사로 방치된 세월호는 우리의 미래를 겨냥해 돌아올 것이다.
과거사 되기와 역사화 하기
‘과거사 되기’의 반대 방향은 능동적으로 ‘역사화 하기’이다. 역사로 삼아 현재를 구성하는 일부로 만드는 길이다. 예전에 한 세월호 탑승자 유족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기억되는 게 아니라 환기되길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화 하기의 의미이자 의의이다. 세월호 참사를 보다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역사적 추동력으로 삼는 일이다.
온전히 역사화 하려면 제대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휴지부(…)만이 잔뜩 쌓인 채 과거사가 되지 않도록 철저히 조사하고 진상을 밝혀 의미화시켜야 한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역사화 해낸다면 세월호는 세월호 이후 한국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돌이켜 보게 하는 부표가 되어줄 것이다. 그래서 세월호는 우리에게 침전된 가능성이고 아직 못 이룬 약속이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열흘이 지난 시점에 이런 메모를 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때의 메모는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그것은 쓰라리다.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자가 청와대 앞에서 쓰러지려 하고 있다.
낮 동안 먹지 못한 자가 또다시 살을 에는 긴 밤을 지새우고 있다.
빛의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단식이 더 이상 길어져선 안 된다.
진실이 더 이상 늦어져선 안 된다.
윤여일은 제주대 학술연구교수입니다. <광장이 되는 시간> <사상의 원점> <사상의 번역> <동아시아 담론>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 <상황적 사고> <여행의 사고>(하나·둘·셋)를 쓰고,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 <촛불이 민주주의다>를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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