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 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에서
남북의 두 지도자는 4.27 판문점 선언을 하기에 앞서 1953년생 소나무를 판문점에 심었다. 백두산 흙과 한라산 흙을 뿌리고 대동강 물과 한강 물을 뿌렸다. 표지석의 글은 '평화와 번영을 심다'였다.
문익환은 더불어 함께 과거를 묻자고 했지만, 남북의 두 지도자는 65년의 과거를 묻는 동시에 사철 푸르른 소나무의 새로운 한반도 미래상과 꿈을 심었다.
그러나 심기는 두 지도자가 심었으되, 한반도 인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기워나가야 할 1953년생 소나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평화체제 구축의 길이 순탄하게 고속도로처럼 이어지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어리석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처럼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길을 갈 수 있기는 할 것이라고 낙관하는 것도 위험하다.
1미터 앞에는 아예 길조차 없는 신천지가 한반도 평화체제의 길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것도 기후변화 시대답게 이전의 기후와는 전혀 다른 기후와 환경 속에서 위성항법장치(GPS)도 없이 헤쳐 나가야만 하는 길 찾기다.
당장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행정부의 정책은 이란 핵협정 탈퇴에서 보듯 그때그때의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롤러코스터다. 미국은 이미 펜타곤과 월가가 정치 경제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군사 제국이다. 예컨대 일본 태생으로 친일을 공공연히 천명하는 전 태평양사령관 주한 미대사 해리 해리스의 강한 반중 봉쇄정책 노선만 해도 일본의 재무장과 함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강력하게 친미 정책을 펼치고 주한미군 주둔을 포함한 한미동맹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 현실주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평화체제 구축에 필수인 한에서는 그럴 것이다. 종미주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불가피한 선택의 문제다. 친일도 친중도 친러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의 허리를 자른 155마일의 비무장지대가 실제로는 지구상의 가장 위험한 무장지대였음을 한반도 인민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때문에 휴전선을 포함해서 전 세계에 깔려있는 전쟁세력과 지뢰밭의 숲을 제거하면서 길 찾기를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한반도 전체 인민들의 힘뿐이다.
결코 소수 전문가들과 재벌들의 손에 맡겨서 될 일이 아니다. 그런 위임과 방임은 한순간에 길 찾기를 절벽으로 이끌 수 있다. 오직 인민의 힘으로, 수많은 인민들의 집단 지성과 인해전술만이 가장 확실한 평화체제 구축의 내비게이션이다.
수천수만 개의 '주민자치 마을회의'가 한반도 평화체제의 주춧돌이다
일찍이 미국 건국 이전에 미국 인민들은 타운미팅(town meeting), 즉 마을회의를 통해 모든 마을 문제를 토의하고 결정했다. 타운미팅은 실제 지역 정부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 타운미팅 같은 민주정치의 실천이 미국 독립선언과 민주정치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19세기 말 스위스 인민들의 민주주의 운동 당시 스위스는 이 같은 미국의 직접 민주주의 제도를 배워 도입하기까지 했다.
우리에게는 이 같은 타운미팅과 유사한 인민의 자치 기구가 미국보다 훨씬 이전부터 유구한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직도 모정(茅亭)이란 동네 이름이 남아 있을 정도로 조선 후기까지 있었던 모정(茅亭)·도청(都廳)·공청(公廳) 등 촌락민 공동집회소가 그것이다. 1970년대까지도 남아 있던 농촌 지역의 촌회, 즉 마을회의와 두레회의가 그것이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의 집강소와 1945년 해방 직후 전국 각 지역마다 인민들 스스로 조직한 인민위원회가 그것이다.
이 같은 마을 자치회의의 복원이야말로 한반도 평화체제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주권자 평화세력의 근거지다. 읍면동장이 임명하는 지금의 하향식 주민자치위원회는 그냥 관변조직일 뿐이다. 우리는 이런 주민자치위원회를 지역 주권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밑에서부터 스스로 선출하고 운영하는, 정부와 독립된 마을회의로 탈바꿈시켜 나가야 한다.
인민이 단순히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집회와 시위는 그 동기가 사라지면 중단된다. 국가와 사회 체제를 민주주의로 바꾸기 위해서는 집회와 시위만으로 불가능하다.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과정도 이행 이후의 유지도 집회와 시위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는 인민 스스로의 결사체가 없다면 지속가능한 집회와 시위조차 불가능하다.
헌법과 법을 바꾸고 정책과 제도를 바꾸는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추동하고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수많은 인민의 결사체들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민의 일상생활 모든 분야에 걸쳐 수도 없이 만들어지는 지역 인민들의 결사체들이다. 지역 결사체들의 연대와 연합이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수많은 결사체가 없으면 이행도 유지도 안 된다.
인민의 결사체는 민주주의 광장 정치를 지속시키고 민주공화국과 한반도 평화체제를 유지하는 주춧돌이다. 그 가운데 가장 밑바닥 풀뿌리 자치조직이 전국의 리동마다 푸른 소나무로 커나가야 할 주민자치 마을회의다.
'회의(會議)주의'가 평화 세력의 비옥한 땅이다
사람은 내 몸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내 안의 탁한 공기를 바깥으로 내보내는 소통의 숨을 쉬어야 목숨을 유지한다.
회의는 이웃과의 소통이고 숨이다. 공동체와 사회, 국가는 회의라는 숨을 쉬면서 갈등을 관리해야 유지된다. 회의라는 들숨과 일상생활이라는 날숨이 민주주의를 숨 쉬게 만들고 신선한 피를 공급한다. 친목모임이건 민간단체건 시민사회단체건 정당이건 국가 기구건 회의를 통한 소통이 없으면 그 조직은 숨을 못 쉬고 질식사하거나 활동이 없는 가사 상태, 동면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인민이 국가와 공동체의 현안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심의하고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기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이 바로 결사와 회의를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와 의견이 전혀 다른 타자와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주권자의 자격이다.
인민의 민주정치 능력, 국가와 공동체의 통치 능력이란 결사와 대화, 회의와 토론을 할 수 있고 대화와 회의 토론을 통해 배우고 학습하고, 그리고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래서 민주주의 광장 정치의 요체이자 핵심은 결사와 회의다. 그것도 수없이 많은 결사와 회의와 토론이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정보와 지식의 공유는 필수다.
한국 인민들 대부분은 이런 결사와 회의를 태어나서 어른이 될 때까지 거의 한 번도 제대로 학습하고 훈련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학교에서도 민주주의 훈련은 거의 없었고, 있다 해도 잠깐 형식에 그치는 정도였다. 오히려 학교는 군대처럼 비판과 저항의식을 삭제하고 독재 정치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주입식 노예 교육의 현장이었다.
주민자치 마을회의 같은 인민의 자유로운 결사체는 이 같은 회의와 민주주의 학습의 교실이다. 이런 결사체 민주주의가 튼튼하게 지역에 근거지를 확보할 때 비로소 국가주의의 노예교육 산실인 학교와 군대를 민주주의 공동체 학교, 민주주의 공동체 군대로 바꿀 수 있다.
민주주의는 백화제방이다. 민주주의는 시끄럽다. 시끄럽지 않으면 살아 있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내 주장을 강하게 펼치는 것에 대해 좋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네 주장만 하지 말고 내 말도 들어봐라.
그렇다. 이게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내 주장은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 내 주장이 없는 사람은 노예의 사고방식에 젖은 불쌍한 사람이다. 내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주권자 자유인이 아니라 지배 세력의 여론 조작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노예들이기 십상이다.
동시에 민주주의는 내 주장을 강하게 주장하기에 앞서 다른 주권자의 강한 주장을 존중하면서 들어야 한다. 주권자라면 통치와 주장의 상호 교체 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나의 뚜렷한 소신과 주장과 함께 또 다른 '나'의 소신과 주장에 대한 경청이다.
경청과 대화야말로 민주주의의 요체다. 자유인이라면 내 주장을 강하게 비판하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다른 자유인을 또한 존중하고 경청해야 한다.
어떤 주장이건 옳고 그름이 분명한 주장은 별로 없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별 무리가 없다. 때로 요령부득의 주장이나 장황한 사설, 지루한 논리 전개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적절히 그런 주장을 간명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적절히 도와주는 것이 자유인의 덕목이다. 그게 자신의 주장이 정말로 깊이 있는 주장인지 검증할 수 있는 성찰의 기회이자 자유로운 삶을 향한 길이다.
민주주의의 진짜 자유는 홀로 누리는 고독한 가짜 자유가 아니라 서로 소통하는 공존과 호혜와 대화의 자유, 갈등 조정과 관리라는 평화의 자유이다.
주권자 스스로 권력 행사할 수 있는 기회, 6.13 지방선거
6.13 지방선거가 머지 않았다. 대부분 민주당 압승을 예상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민주당 권력자들의 어깨 힘과 오만은 가히 눈 뜨고 못 볼 지경이다. 지역에서 체감하는 중앙당 권력자들의 적폐 갑질은 전략공천이란 이름으로 경선을 없앤 작태에서 보듯 자유한국당이나 바른미래당이나 오십보백보다.
2017년 촛불 이후에 민주당 정당발전위원회가 100년 정당을 내세우며 당원자치회를 중심으로 직접민주주의를 과감하게 도입한 야심 찬 혁신안(2017. 9. 20.)은 최고위원회에서 통과되기는커녕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민주당에선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어이없고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촛불혁명의 완성은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건설이다. 그러기 위해 개헌은 필수다.
지금의 국회에 헌법 개정을 맡기는 것은 개에게 물고 있는 갈비를 내놓으라는 것과 같다. 개는 주인일지라도 제 밥그릇을 건드리는 사람은 당연히 으르렁거리며 물어버린다. 지금 대한민국 국회가 여야 가릴 것 없이 딱 그 모양이다.
우리는 2년 뒤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민주권의 헌법 개정을 확실히 하겠다고 약속하는 후보를 지금부터 지역 주민들 속에서 키워내야 한다. 헌법개정을 포함한 광범위한 국민발의권과 국민투표 확대, 국민소환권, 대법원장의 주권자 선거, 최소한 지역 검사장과 경찰서장, 법원장의 선거를 통한 지역주권자들의 임명권과 사법권 위임 절차 등등 주권자들이 합의할 수 있는 국민주권과 제대로 된 지방분권 개헌안에 대해서도 이 과정에서 인민들 스스로 수많은 토론과 숙의를 거쳐 합의해 낼 수 있다. 사실 지방분권도 지방자치단체에 권력을 몰아주는 것이 아니라 지방의 주권자들이 빼앗겼던 권력을 다시 탈환하는 지역자치 분권이어야 한다.
새로운 민주공화국 헌법안을 만드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다. 인민주권의 헌법개정 초안은 이미 여러 판본이 공개되어 있는 상태다. 지난 3월 26일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 전문도 청와대 누리집의 국민소통광장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문제는 주권자인 인민이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권력자 실세는 인민 자신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개헌안을 만들어 나가는 국민 주체의 개헌 운동, 새로운 민주공화국 건설 운동이다.
우리는 읍면동 단위에서부터 이같은 개헌을 추동해 나갈 수 있는 지역 주권자들의 민주주의 결사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예컨대 '00면(동, 읍)을 가꾸는 시정모임' 같은 조직 말이다. 이름이야 각 지역의 주민들이 알아서 다양하게 작명하면 된다.
이 시정모임에서 협치기구인 읍면동 주민자치위원회도 주도하고, 지역의 각종 민원과 현안과 갈등도 조정하고 관리하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원이나 국회의원들처럼 권력을 휘둘러 민원 해결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민을 조직해서 주민들의 힘으로 해결하는 주민조직화 방식으로 말이다.
무엇보다도 주요한 임무는 2년 후의 국회의원 선거와 4년 후 지방선거에서의 주권자 '시민후보' 진출이다. 주권자 직접 민주주의의 지방정부를 실천하는 시민후보 말이다.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세우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지속시킬 수 있는 인민주권 개헌 주권자 후보 말이다. 지역 공동체 자치 정부의 연대를 통해 연방정부를 실행하는 직접 민주주의 후보 말이다.
2년, 4년, 아니 시간이 훨씬 더 걸릴 수도 있다. 주권자로서 성숙해 가는 과정은 시간의 숙성이 필요하다. 다만 깨어 있는 촛불이 꺼지지 않으면 된다.
문익환의 꿈이 촛불을 든든한 뒷배로 둔 문재인 정부의 4.27 판문점 선언으로 현실이 되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피부에 와 닿는 소식이 차갑지가 않다.
이 선거가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주권자의 주권 행사 기회인 선거라는 사실만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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